성삼일 – 다시 들춰본 생각

그리스도교는 기억 위에 세워진 종교이다.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과 부활에 대한 기억이 그 기반이다. 그리스도의 삶이 그랬듯이, 그래서 결국 처형으로 마감되었듯이, 그리스도를 기억하는 것은 늘 “위험한 기억”(dangerous memory – Johann Baptist Metz)이다. 그 기억은 고통받는 사람에 대한, 고통받는 사람과 연대하다가 스러진 인간에 대한 기억이기 때문에, 가해자들에게는 그 사건의 기억을 되살리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다.

시간은 기억의 적이다. 시간은 망각을 부추기고, 거기에 기대어 많은 것들을 숨기기 때문이다. 이 시간의 망각을 저지하려는 안간힘과 기억의 장치가 바로 교회력이요 전례력인 셈이다. 그 안간힘을 보지 않고서 전레력을 보면, 그건 참으로 거추장스러운 전통의 찌꺼기에 불과할 것이다. 역사에서 힘있는 이들은 이러한 기억의 장치를 다시 억압의 장치로 바꾸기도 했으니, 전례와 전례력은 만신창이가 되어 저항과 억압이 가없이 되풀이되며 섞이게 되었다.

이 역사의 오랜 갈등이 태연하게 전례의 전통 여기 저기에 남아 있기도 하다. 아니, 그래서 언제든지 균열을 이루며 비집고 나올는지 모른다. 아마 그래서 전례를 둘러싸고 늘 다툼이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해서 우리의 삶이 두텁듯, 전례는 두텁게, 혹은 무감각하게, 혹은 생채기를 건드리며 아직 살아남아 있다.

“위험한 기억”에 대한 몇 가지 생각을 적다가 마무리하지 못하고, 성삼일을 두고 적었던 생각들을 되돌아 본다.

8 Responses to “성삼일 – 다시 들춰본 생각”

  1. minoci's me2DAY Says:

    민노씨의 느낌…

    그리스도교는 기억 위에 세워진 종교이다. … 그리스도를 기억하는 것은 늘 “위험한 기억”이다. 그 기억은 고통받는 사람에 대한, 고통받는 사람과 연대하다가 스러진 인간에 대한 기억이…

  2. Says:

    그리스도교는 기억 위에 세워진 종교입니다. 그러나 모든 종교가 그렇다는 것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기억이 확장되면 역사가 되고 이 역사가 조직이나 사회로 이어지면 문화도 창조됩니다. 종교라는 제도도 이 역사의 부산 품이라는 것을 우리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가리키는 것은 종교를 넘어선다고 봅니다. 진리라는 것은 시간 안에 있지만 시간을 초월해야 됩니다. 그렇지 않고는 개혁, 진보 혹은 적어도 새로운 창조라는 것은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기억, 역사 전통, 문화 다 소중합니다. 그러나 기억, 역사, 전통에 억매이기 쉬운 인간의 본성을 관찰해야 합니다. 예수가 죽은 것도 이러한 본성의 집단적 광기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봅니다. 기억, 역사, 전통이 억압적인 기제로 작용했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것을 창조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우리는 새로운 것을 싫어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여기서 정체성의 문제가 나옵니다. 왜 기억을 하고, 역사를 공부하고, 전통을 구지 따라야할 필요가 있는가 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전통을 버려 근대화의 문제가 생기기도 했습니다. 종교다원주의의 논쟁도 이에 한 부분이라고 봅니다. 그러나 저는 새로운 창조를 위해서는, 역사와 전통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역사와 전통에 대한 철저한 이해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나”라는 존재도 이 역사와 전통에 찌들려 있고 중독되어 있기 때문입니다(저는 결국 새로운 시작은 “나”로부터 시작 된다고 믿고 있습니다. 저는 철저한 개인주의자가 되고자 합니다). 누가 나에게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키는데 나는 달은 보지 않고 손가락만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공부의 목적은 단순한 것 같습니다. 즉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의 상대화입니다(상대화를 통한 보편성에 대한 추구입니다). 기독교 공부도 이것을 넘어서지 않을 것 같습니다. 즉 신학을 통한 교리와 경전에 있는 절대성을 상대화 시키는 것입니다(여기에서 신학과 신앙이 만날 수 있습니다).
    십자가의 기억이 가해자를 고발한다는 것에 동의하면서 한편 동의 할 수 없습니다. 이 고발은 십자가의 현재적 신앙이 우연하게 만든 부산물일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십자가의 신앙은 가해자에 관심도 없고 가해자가 고발된 것을 기억도 못할 것입니다(십자가 밑에는 가해자와 피해자 모두다 있었습니다). 십자가의 역사성에 대한 기억은 현재 내가 가지고 있는 십자가의 이론에 대한 상대화로써의 의미가 있지 그것이 케리그마와 같은 절대성에 기여하는 의미는 없다고 봅니다. 물론 진리는 특수한 곳에서 작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보편성을 가지고 있기에 이 특수한 곳이 바로 here and now가 될 수 있다고 봅니다. 이런 의미에서 진리는 모든 곳에서 작용하고 있습니다. 진리가 아닌 곳은 없습니다. 단지 저희 같은 범인들은 깨닫지 못하는 것뿐이죠. 그래서 저는 보편성과 상식을 연장선상에서 보고 있습니다.

    보통은 십자가라는 것은 일정한 시간 장소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것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이해는 일반 백성의 고난에 대한 격하를 초래하기 때문입니다(여기서 고난은 고발로 연결되는 것이 아니라 이해와 구원으로 연결됩니다. 역사에 대한 무관심이 아니라 역사를 통해 보편적 수평적 지평으로 나아갑니다). 성서가 기록한 예수의 십자가는 물론 역사적 특수성을 가지고 있지만 이 역사적 특수성이 2000년이 지난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것은 이 특수성안에 인간 모두가 경험할 수 있는 보편성이 있기에 그런 것 같습니다. 바울의 신학이 이러한 이해와 내적 경험을 바탕으로 쓰여져 있는 것으로 저는 해석하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역사의 산물인 문화입니다. 그러나 이 문화가 가리키는 보편성은 이 문화를 반드시 초월해야 됩니다. 왜 진리의 문제를 다루기 때문입니다. 문서 비평을 포함한 기독교 역사공부는 이러한 문화의 보편성을 찾아주는 방법으로써 훌륭한 역할을 합니다. 즉 문화를 역사적으로 상대화시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가리키는 진리를 기독교를 넘어서 보여주는 방법 중에 중요한 하나입니다. 나아가 이 방법을 나에게 적용시켜야 합니다. 즉 이 기독교의 상대화와 함께 내 자신에 내재되어 있는 문화(“나”라는 존재는 문화에 중독되어 있습니다)조차 상대화 시키는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용기가 필요한 이유는 이 중독에는 중독 대상에 대한 강한 의존성이 있고 이 의존성 밑바닥에는 혼자 서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진리를 소유할 수 없고 진리가 인도하는 곳에 대한 무한한 개방성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그러나 이 두려움을 직면하고 내가 중독되어 있는 것을 상대화 시킬 때 보편성이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여기서 철학으로써의 신학이 존재의 의미를 가질 수 있습니다.

    말을 맺겠습니다. 기독교인은 더욱 예수가 가리키는 것은 과연 무엇이고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해 끊임없는 탐구가 필요합니다. 역사적 문헌과 신학서적을 통해, 성서와 내면성찰을 통한 탐구입니다. 이를 통해 그리스도와 기독교가 분리될 것이며, 주체적인 개방된 “나”와 문화가 만들어낸 폐쇄된 “나”가 분리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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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r. joo Reply:

    홍 / 깊은 생각을 나눠 주어서 거듭 고맙습니다. 여기서 드러내는 문제의식과 어떤 사안들에 대한 의견에 전반적으로 공감하고 있습니다.

    토론하여 발전시킬 만한 좋은 주제들이 짧은 글에 많이 나온 탓이라 생각합니다만, 의견의 전개에 대해서는 이견의 여지가 있습니다. 특히 기억과 역사에 대한 언급에서, 놓쳐서는 안될 것이 있다고 봅니다. “누구”의 기억이요, 역사인가 하는 것입니다. 중립적인 ‘역사 비평’은 없습니다. 십자가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나갈 때, 따라가기 힘든 이유입니다.

    철학이든 신학이든, 지식인이든 종교인이든, 제 스스로 매우 염려하는 것이 “도통”한 듯한 태도입니다. 역설적이게도 “도통”의 순간 자기 성찰이 죽어버립니다. 특히 우리처럼 “변합 없는 진리”에 대한 생각을 골몰히 하는 이들이 쉽게 빠지는 함정입니다.

    이런 점에서 끊임없이 자신을 “상대화”하는 일에 대한 언급은 깊이 새겨야 하리라 봅니다.

    깊은 대화를 이끌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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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민노씨 Says:

    오랜만에 다시 읽어봅니다..
    오래전에 이 글을 모티브로 제 부족한 생각을 더하려고 했던 적이 있었는데, 쓰다가 말고 묵혀두고 있다가 최근의 몇몇 사건들 때문에 다시 이어서 써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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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민노씨.네 Says:

    위험한 기억과 투명한 죽음…

    그리스도교는 기억 위에 세워진 종교이다.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과 부활에 대한 기억이 그 기반이다. 그리스도의 삶이 그랬듯이, 그래서 결국 처형으로 마감되었듯이, 그리스도를 기억하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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