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밤: 시간의 탄생

부활은 새로운 시간의 탄생이다. 창조 이후의 역사를 한번 마감짓고, 새로운 창조의 시간을 여는 사건이다. 그래서 모든 사건은 이제 부활이라는 빛에서 새롭게 해석된다. 그리스도교 신앙 전통에서 과거를 재해석하는 현재의 시점은 예수의 부활 사건이다.

새로운 시간에 대한 강조때문에 고대의 신앙인들은 창조의 시간인 7에 하나를 덧붙여 8일이라는 숫자로 이 새 시간을 표현하려 했다 (7+1=8). 창조의 시간보다 더 풍요로운 시간이라는 뜻이다. 제 8요일이 바로 부활일이며, 제 8요일로서 모든 주일은 이제 부활에 대한 기념일이 되었다. 이 시간은 이제 “위대한 50일”로 확장된다. 같은 셈법이다 (7*7+1=50). 부활절기와 성령강림일은 구별된 교회 절기가 아니라, 새로운 시간의 확대인 “부활 축제”의 전체 기간이다.

제 8요일과 그 숫자는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익숙하게 되었다. 팔각형의 세례대(혹은 세례당)이나, 대축일과 관련한 8일부 따위가 그것이다.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은 결국 새로운 시간에 접어들었다는 자기 인식이었고, 이에 대한 축제였다. 이 축제를 일상으로 하자는 것이 또한 그리스도인의 생활일테다.

이런 의미의 해석이나 추적이 전부는 아니다. 전례와 관련하여 구체적인 행동에 관련된 것들에 어떤 의미를 대입할 수는 있다. 역사적으로, 신학적으로, 또한 교리적으로 이건 이랬노라고 찾아봐서 말해줄 수 있는 부분은 있다. 이런 의미에 대한 지식은 그 의미를 좀더 깊이 돌아다 볼 수 있는 도움이 된다. 그러나 의미 이전의 사건, 다시 말해 의미를 만들어낸 사건을 잘 보여주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 사건을 감추는데 사용되기도 하고, 의미 과잉은 사건과 사실을 왜곡하는 경우도 많다. 신학 논쟁이 허튼 길로 들어서는 건 이런 의미 과잉과 관련되어 있고, 이게 더 추악한 종교 재판으로 가는 것은 이 의미를 독점하는 권력과 관계할 때다.

부활 사건 또한 “의미” 이전에 사건이 있었다. 그것은 “만남”이다. 보라, 복음서의 부활 기사는 언제나 만남과 연결되어 있다. 그 만남의 지극한 인간적인 면들은 이미 이번 부활일 설교에서 귀에 밝히도록 들었을테다. 새벽에 무덤을 찾아 온 여인들과 천사의 만남, 여인과 부활한 예수의 만남 (예수께서 여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여인은 그분을 알아 보았다). 또 부활절기의 본문들은 모두 이런 만남으로 이어질 것이다.

이 만남이 전례의 근본적인 기반이요, 목적이다. 전례는 하느님과 만나는 시공간의 사건이며, 그 사건을 통해서 전례의 공동체는 부활한 몸이 되고, 새로운 시간을 살아간다. 어떤 전통적 형식이나 설교, 또 다른 어떤 요소들은 이 만남의 사건의 종속된다. 다만 전통이 중요한 것은 그것이 경험의 축적인 이상 그 만남의 경험들을 어떤 틀 속에서 보존하고 이어주기 때문이다. 전통 안에서 그 만남은 단절된 현재 만의 만남이 아니라, 지속되는 만남, 신앙의 선조들과 우리들의 그 경험을 이어주어 더욱더 풍요롭게 하려는 작은 안전 장치이다. 이런 점에서 보자면 전례에 복잡하게 얽혀 있는 상징들은 의미만을 담지 않고, 이 만남을 주선하는 매개체로서 먼저 자리 잡아 움직인다.

전례에 대한 개혁이나 혹은 또다른 어떤 실험들도 이런 “만남”에 더 깊이 기대야 할테다. 또한 그 만남이 “부활하신 예수의 신비”인 한, 이 신비가 가져다 주는 새로운 시간과 공간에 자신의 마음을 열어 맡겨야 한다. 그때 우리는 부활을 살아가는, 부활한 몸의 공동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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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e Response to “부활 밤: 시간의 탄생”

  1. via media 주낙현 신부의 성공회 이야기 » Blog Archive » 성삼일 - 다시 들춰본 생각 Say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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