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형 집행과 장로 대통령

집권 말기에 사형을 무더기로 집행한 사람이나, 이 참에 10년 공백을 깨고 사형 집행 재개를 주장하는 이들의 정권 우두머리가 모두 개신교 “장로 대통령”이란게 눈에 띈다. 도대체 부활을 믿지 않는 자들이다.

5 Responses to “사형 집행과 장로 대통령”

  1. 김바우로 Says:

    마치 자신이 하느님이나 되는양 생각하는 것이죠. 사형은 인간이 자신을 하느님이나 되는양 여기는 오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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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민노씨 Says:

    답글을 달까 말까… 꽤 고민했었습니다.
    저는 여전히 사형제도 폐지론과 존치론 사이에서 고민하고 있습니다.
    특히나 국민 대부분이 ‘우행시’와 같은 싸구려 감상주의에 머물러 있다고 추정하고, 정말 눈에 보이지 않는 온갖 사회의 구조적 살인들(특히나 정치경제권력이 자행하는)에는 이토록 둔감한 현실을 돌이켜 보건데.. 정말 고민스러운 주제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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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fr. joo Says:

    김바우로 / 생명을 온전히 하느님께 귀속시키는 것이 근본적인 신앙입니다.

    민노씨 / 그런 주저함이 제게도 있었고요, 같은 고민이 여전히 자리잡고 있습니다. 혜진.예슬 사건을 들으면 같은 또래 아이를 키우는 부모의 입장에서 “** 죽일 놈!”이라는 말이 솟구쳐서 잠 못이루고 눈물이 납니다. 쉽게 말할 수 없는 부분이 있습니다.

    다만 종교만이라도 어떤 마지막 선을 붙들어서, 어떤 상황이 극단으로 치닫는 것을 되돌아보게 하고 버티게 해야 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범죄에 의한 살인이나, 그에 대한 응징으로 보는 제도적 살인이나 같은 한 생명을 빼앗는 것이라는 “보편적 원칙”(물론 이런 주장하는 사람은 근거를 갖고 있겠지만, 다른 이들에게는 특정 종교 혹은 종교인의 자의적 설정이라고 비판받을 수 있이겠지요)을 설정하는 것이 어떤 성찰의 기준점이 되겠다는 것입니다. (죽음의 고리에 대한 단절을 이루기 위한 “마지막 죽음”과 “새로운 생명”(부활)이 제 신앙 전통에서는 그 기준점이겠고요.)

    게다가 특정 범죄 사건에 대한 공분에 슬며시 타고 들어 사형 집행 운운하는 것은 가족에 대한 위로도 아니요, 범죄에 대한 경고도 아닙니다. 그러려면 성폭력(유아,미성년,성년)에 대한 현행 행량과 범죄자 특별 조치가 강화됐어야 했던 거지요. 성폭력은 살인에 해당하리라 봅니다. 그것은 살아있는 기억 속에서 한 사람을 매순간 죽이는 범죄 행위이기 때문이지요.

    도대체 경박하기 짝이 없는 언설에 대한 깊은 실망감의 표현이라고 봐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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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LRA Says:

    사형집행 심오하게 생각하면 모두가 종교인들의 입장이여야 하나, 저는 다르게 생각합니다. 도무지…’피해자’의 인권은 온데간데없고 ‘가해자’의 인권만을 옹호하는 편파적인 모습을 보이기 때문입니다. 사회에서 가장 약자가 누구인지 아십니까?

    여자와 어린 아이들입니다.
    우리나라처럼 남자들에 의한 범죄가 무법천지인 곳이 어디 또 있을까요? 인도의 카스트제도하에 사는 사람들만큼이나 다름 아닙니다.
    소파협약에 의한 미군들의 베스킨라빈스31처럼 골라먹는 재미로 살인하고 약탈하는 것은 또 어떻고요? 그래도 우리는 소파 불평등에 의해 숨죽이고 있어야만 하는 겁니까? 전 그 지역에 살아봐서 더 잘 와닿습니다.

    완전 걸어다니는 무기나 다름 아닙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법적 요소인 보호틀’이지, ‘심정에서 오는 맘의 벽’이 아닙니다. 그리고 MB대통령 저도 마음에 안 듭니다. 하지만, 평화주의자 평화시위는 시민들에 의한 시위로도 충분합니다. 그이상의 권한을 가지신 분들은 똑같이 평화시위를 할 것이 아니라, 법적인 사회법을 마련하는데에 힘을 써야 합니다. 평화는 마음의 평온만 줄 뿐이지, 사회적 제도까지 편견까지 보호해주지 못 하기 때문입니다. 대운하사건도 또한 그렇습니다.

    운하사건…저도 반대합니다. 하지만, 평화 걷기 운동만으로 그것이 관철될까요? 저라면 차라리 신부복을 벗고 어린이 노동착취학대를 반대하기 위해 노동당을 세우고 노동당의 당원으로 나섰던 벨기에의 아돌프 단스 신부님처럼 나서는 편이 낫다고 봅니다.

    삼성사건에 있어서도 가톨릭에서 신부복 입으신 분들이 ‘결과에 불복한다. 불만족이다’ 엄포하듯 하시는데, 그건 그저 뜬구름입니다. 아무런 효력도 영향도 못 끼친단 말입니다. 사제로서의 솟대마냥 보호구역이 되었던 시대는 신구석기시대에서 종결된 것 아닌가요? 7,80년대처럼 군부정치였을 땐 효과가 통했습니다. 누구나 공감했던 시대였으니까요.

    하지만 이랜드사태며 몇몇 소소한(?) 시위할 때는 천막 거치고 물러가라 하시더니 삼성처럼 큰 대박이 나니 사제단이 나설 때다 뭐다 하며 Show 하시는 건 또 뭔가요? 속이 다 훤히 보입니다. 쇼맨십에 그러신다고 밖에는 할 말이 없습니다

    소돔과 고모라는 불신의 시대나 특정정치인이 아닙니다. 바로 편견으로 자신들만의 잣대로 그들만의 리그를 만들어버리는 교회란 곳입니다. 그 교회안에서 설파하시는 사제들이십니다.

    사제제도도 골품제에서 온 것이 아니던지요? 독서삼품직…골품제에서 온 거 맞습니다. 신자가 있어 감사하다가 아닌 시혜적인 태도로
    나를 섬겨라 하는 건 이치에도 안 맞고 어불성설입니다.

    정말 섬기는 자, 낮은 자는 저 높은 곳에 앉아 ‘나를 따르라’ 말하지 않습니다. 저 낮은 곳에 앉아 ‘너를 기다리마’합니다.

    이것이 제가 본 하느님의 모습이며 인자한 미소였습니다.
    님의 하느님은 지금 어떤 모습을 하고 계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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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fr. joo Says:

    LRA / 여러가지 뼈아픈 지적들 감사합니다. 교회와 성직자들이 좀더 책임있게 살아가라는 일갈이니 귀 기울이겠습니다. 특정한 사안들에 대해 주신 의견에 대해서는 중요한 지적이라고 봅니다. 경청하겠습니다. 그런데 저항의 행동 방식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과 방법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분들에게는 불만족스러운 것이겠지만 그 처지에서는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봅니다. 특히나 용감하고 올곧게 현장에서 투신하시는 분들이기에 책상물림하는 저같은 사람이 가타부타할 자격이 없습니다. 오히려 그 하릴없는 절망감을 나누면서 스러지지 않는 희망을 가꾸어 보자고 응원하고 다독일 뿐입니다. 아무 일도 안하고 있는 사람들은 놔두고 분노와 비판이 그분들에게 가는 것은 공정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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