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금요일 – 전례의 뒷 이야기

세월은 망각때문에, 혹은 피할 수 없는 접촉과 영향때문에, 때로 반목했던 역사를 화해시키기도 한다. 그게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이러한 과정에서 서로에게 좋은 쪽으로 새 역사가 열린다면 이를 마땅히 즐길 만하다. 시간 속에서 창조와 모방과 변화가 늘 일어나 뒤 섞이는 탓에 누구에게 진본을 구하려는 것도 부질 없은 일이다.

성 금요일 전례 행사에서 도드라지는 두 예식은 십자가 경배와 성찬례 없는 영성체이다.

서방 교회에서는 예수께서 실제로 달렸던 십자 형틀을 기어이 찾아내어 이를 유물로 삼아 십자 경배를 했다고 한다(그래서 십자 경배에서는 십자고상을 사용하지 않고, 십자가만 쓴다. “보라, 십자 나무. 거기 세상의 구원이 걸려 있네.”) 이 예식은 4세기 성지 예루살렘을 순례했던 에게리아(Egeria)의 기록물에 등장하는데 아마 이를 전후로 서방에 유입되어 성 금요일 전례의 전형을 만들었을 것이다. 반면 동방 교회는 대체로 십자가에서 내려진 예수의 시신을 묻는 것을 재현하며 이를 기리는데 초점을 두었다.

13세기 서방 교회에서 마리아 신심이 높아졌을 때 “애통하는 성모 마리아”(Stabat Mater)가 자식을 잃은 마리아의 슬픔에 초점을 맞추어 발전했다면, 동방 교회는 이미 죽어 내려진 예수의 시신과 성모 마리아와 십자가 주변에 남았던 여인들(남자들은 다 도망가고 없었다. 요한복음은 “사랑하는 제자”가 있었다고 한다)의 슬픔이 성 금요일(“위대한 금요일”) 전례의 주된 내용이었다. 이 관계는 우연일까?

성 금요일은 성찬례가 없는 유일한 날이다. 경우에 따라 전날 축성한 성체를 영하거나, 아예 이 마저 하지 않는 경우도 많다. 성찬례를 거행하지 않으면서 그리스도의 완전한 부재를 실감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가상칠언(架上七言)이라는 예식이 있는데, 십자가 상에서 했다는 예수의 마지막 일곱 말씀을 복음서에서 뽑아 만든 묵상 예식이다. 최근에 성주간, 최소한 성금요일을 지키려는 개신교의 일각에서 자주 사용되기도 한다. 실상 이 예식은 17세기 예수회 선교사들이 남미 페루에서 시작했던 예식이었다. 이게 이후 서방에 다시 역수입되고, 작곡가 하이든은 이 마지막 일곱 말씀에 따른 음악을 만들도록 주문을 받기도 했다.

국경과 문화와 시간을 뛰어넘는 음악의 힘 때문이었을까? 가상칠언 예식은 로마 가톨릭 교회보다는 프로테스탄트 교회들에 더 쉽게 받아들여져 널리 퍼졌다. 아마도 성주간이나 성 금요일에 특별한 예식이 없는데다, 성서에 드러난 예수의 말씀에 초점을 두는 개신교 전통에서 아주 적절한 성 금요일 예식의 대안이 되었을 법하다. 각각의 말씀에 대한 설교나 혹은 묵상 안내로 저마다 훌륭한 예식이 되었다.

종교개혁이라는 격변 속에서 서로 상극으로 등장한 예수회 전통과 개신교 전통이 성 금요일 한 청년의 죽음 앞에서는 하나가 되는 것인가? 역사의 또다른 아이러니다. 하기야 요즘은 영성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는 가운데 예수회 영성에 닻을 대려는 개신교 신학생들이 얼마나 많은가? 역사적인 상극성과 영성적인 상동성은 또다른 문제이겠고, 어쨌든 서로 배우며 풍요로운 유산을 나눌 수 있게 되었으니 참 좋은 일이기도 하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께서 하신 일곱 말씀은 다음과 같다.

1.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 (루가 23:34)

2. 오늘 네가 정녕 나와 함께 낙원에 들어갈 것이다. (루가 23:43)

3. 어머니,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이 분이 네 어머니이시다. (요한 19:26-27)

4.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마태 27:45-46)

5. 목마르다. (요한 19:28)

6. 이제 다 이루었다. (요한 19:30)

7. 아버지, 제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 (루가 23:46)

5 Responses to “성 금요일 – 전례의 뒷 이야기”

  1. 김바우로 Says:

    가상칠언을 생각할때마다 사람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 느껴집니다. 목이 마르면 목이 마르다고 하시고, 자신의 어머니의 안위를 걱정하시며, 아버지이신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마음이 느껴집니다. 또한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은 자들을 용서하심으로써 하느님과 인간을 화해시킨 그분을 보노라면 그리스도교적인 평화와 화해가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추신:다음주나 그다음주에 출판기획서와 디자인 시안을 보내겠습니다. 미리 출판기획과 디자인 구상을 해두어야 출판을 할 수 있을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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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fr. joo Says:

    김바우로 / 부활 축일 잘 지내셨지요? 그 풍요로운 은총이 늘 함께 하길 빕니다. 예, 그분은 참 인간이셨으니까요. 그래서 인간이 만들어낼 수 있는 평화와 화해의 이상을 그 자신의 고통 속에서 이루어내셨습니다.

    추신: 출판할 책들에 대해서 아직 자세히 말씀드린 바 없었는데, 궁금하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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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김바우로 Says:

    제 계획은 독자들이 좋아할만한 책들을 구상하고 디자인하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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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fr. joo Says:

    김바우로 / 예, 흥미롭습니다. 제게도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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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via media 주낙현 신부의 성공회 이야기 » Blog Archive » 성삼일 - 다시 들춰본 생각 Say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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