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의 의미 – 이브 콩가르 O.P.
그리스도교에서 전통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종종 종교개혁이라는 사고 틀 안에서만 ‘전통’을 본다. 이때 전통은 16세기 당시 서방교회가 물려받은 중세의 관습과 동일시되기 일쑤다. 그로부터 5백 년이 흘렀지만 이런 틀거리는 한국 교회와 신학에서 사라질 줄 모른다. 아마도 스스로 종교개혁의 적자라고 생각했던 청교도의 열광이 미국을 거치며 더욱 배타적으로 강화되고 한국의 식민지적 선교 환경과 그 유산 안에서 더욱 말라비틀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안타까운 일은 보수파는 그렇다 치고라도 진보적이라 자처하는 이들도 이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5백 년 동안 서방교회의 유산 아래서 천주교와 성공회, 여러 개신교회는 아무 일도 안 하고 몇몇 종교개혁자들의 논리만 되뇌고 있었을까? 천만의 말씀이다.
20세기를 통과하면서 이른바 교회 일치 대화가 무르익으며 서방교회 내의 유산은 물론, 그동안 살피지도 않았던 동방교회의 여러 전통에서도 배우며 신학과 신앙에 대한 이해는 더욱 넓어지고 깊어졌다. 게다가 16세기 종교개혁의 혁명적 사건을 인정하더라도, 당연히 그 한계도 여러 면에서 드러났다. 어떤 이들은 정말로 종교개혁이 있었느냐고 묻는다. 20세기의 여러 신학적 반성과 운동은 ‘16세기 서구 맥락과 틀’의 한계를 적나라하게 지적했다. 이 가운데 다시 떠오르는 주제는 ‘전통’에 대한 이해였다.
전통에 대한 이해는 역사와 삶의 연속성과 단절성의 역동적 관계에 대한 이해라고도 할 수 있다. 그것은 물론 신앙의 연속과 단절과도 연결되어 있다. 그 역동성이 상실되는 순간 전통과 전통주의가 나뉜다. 그래서 교회사학자 야로슬로프 펠리칸은 이렇게 말했다. “전통은 죽은 이들의 살아 있는 신앙이요, 전통주의는 살아 있는 이들의 죽은 신앙이다.”
예고 없던 트윗 대화 (@prayandwork & @viamedia) 끝에 이 전통에 대한 생각이 이어졌다. 폴 틸리히의 다음 구절을 인용하고 있었다.
가톨릭 교회(공교회)는 서기 300년경에 마련되었다. 이 때문에 우리는 프로테스탄티즘이 (교회의) 첫 몇 세기에 대한 재확인이라고 말할 수 없다. 가톨릭적(이중적 의미) 양상들은 아주 초기에 이미 강력했다. 이는 성공회의 ‘중도’(via media)라는 것도 교회들의 분열에는 이상적인 해결책일 수 있을는지 몰라도 작동하지는 않는 이유이다. 이른바 첫 5세기에 마련된 합의라는 것은 종교개혁의 원칙들과 합의와는 다르다… 첫 5세기에는 프로테스탄티즘이 받아들일 수 없는 많은 요소가 있다. 예를 들어 교회에 대한 교리, 권위의 체계, 성사에 대한 이론 등이다. (영역본에서 재번역. 괄호는 옮긴이)
이 부분에 대한 여러 해석이 있을 법하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살아온 (가톨릭) 전통을 무시한 채로, (프로테스탄트) 원칙만으로 교회와 교회의 가르침이 설 수는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물론 그 반대도 말이 된다. 그 참에 20세기 천주교 내의 신학적 개혁, 특히 교회와 성사에 대한 이해의 큰 변화를 가져왔던 프랑스 신학자요 도미니칸 사제인 이브 콩가르(1904-1995)의 글을 되새긴다. 그에 대한 우리말 번역 작업은 인색하다.
그의 역작 [전통과 전통들]의 요약판이요 대중판으로 불리는 [전통의 의미](영역본)의 서문을 옮겨 놓는다.
이브 콩가르 O.P. [전통의 의미] 서문
성공회 친구에게서 들은 이야기다. 그는 1956년 성공회와 정교회의 신학 대화 관계를 수립하기 위한 대표로 모스크바에 방문했다. 전통과 전통이 성서와 맺는 관계에 관한 토론이 있었는데, 러시아어 통역자는 이 전통이라는 교회 전문 용어를 잘 알지 못했다. 그래서 전통을 그냥 “옛날 관습”이라고 번역하더라는 것이었다.
많은 사람, 아마도 이 짧은 책을 읽는 독자들도 이 러시아어 통역자와 비슷하게 전통에 대해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많은 사람은 전통이 별 비판 없이 그저 오랜 시간 동안 존중받고 받아들여진 관습의 집합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늘 그대로인 것일 뿐만 아니라 “늘 그렇게 행해진 것”이라고 말이다. 변화를 시도할 때마다 전통의 이름으로 반대하는 소리가 높다. 사회에서 전통은 무엇보다도 보수적인 힘이라 생각한다. 위험해 보이는 새로운 시도를 막는 장치요, 좀 더 넓은 시야를 가지라는 제안을 물리치는 방법으로도 쓰인다. 전통은 변화를 막기 위해 쓰이는 낱말이 되었다.
우리는 어떤 학교나 조직의 전통에 대해서 말한다. 옥스퍼드 대학교의 전통, 혹은 하버드 대학교의 전통, 해병대의 전통이라는 식으로 말이다. 또 비슷하게 다양한 수도회의 전통이나 가문의 전통이라는 식으로도 사용한다. 국가나 지역의 전통에 대해서도 말한다. 이런 용례에서 ‘전통’이라는 말은 단지 보수적인 것을 지칭하지 않는다. 오히려 좀 더 깊은 차원이 있다. 다시 말해서 지속하는 어떤 기풍과 도덕적 태도라는 차원이다. 기풍의 연속성인 것이다. 우리는 어떤 예식을 어떤 종교적인 본연의 심오한 표현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이때 전통은 특정한 기풍을 담으면서 보존하는 것으로써, 늘 그 기풍과 조화하여 거기에 형태를 제공하고 그것을 둘러싸서 모양을 드러내고 옷을 입히는 외적인 형식과 습속이다. 그 기풍의 내적인 힘과 자유가 가진 자연스러운 자발성과 교정 능력을 질식시키지 않으면서 말이다.
이런 전통에 대한 이해는 전통이 단지 보수적인 동력만은 아님을 생각하게 한다. 오히려 세대를 이어서 같은 태도의 연속성과 정체성을 지키는 원칙이라고 할 수 있다. 한 사회학자는 이를 정확하게 정의했다. “전통은, 그 말의 본뜻에서, 과거에 대한 자발적인 소화를 의미한다. 즉 현재를 이해하면서 한 사회의 삶이 지닌 연속성을 깨뜨리지 않고, 또 과거를 그저 한물간 것이라고 여기지 않는 것이다.” 그 다양한 형태 속에서 전통은 어떤 모임의 양심과 같다. 혹은 한 세대와 다음 세대를 연결하는 정체성의 원칙과 같다. 역사를 통하여 앞으로 나아가면서, 모든 것을 변화시키면서도 같은 인류로, 같은 사람으로 남아 있도록 하는 힘인 것이다.
폴 클로델은 전통을 사람의 걸음걸이와 비교한 적이 있다. 앞으로 나가려면 사람은 땅에서 발을 떼야 한다. 한발은 떼고 다른 한발은 땅에 기대야 한다. 두 발 다 땅에 붙이거나, 두 발 다 공중으로 띄운다면 앞으로 나갈 수 없다. 전통이 보수주의를 넘어선 연속성이라면, 그것은 단순한 연속성을 넘어선 운동이요 진전이기도 하다. 단, 조건이 있다. 그 자체를 위한 보수주의를 넘어서서, 전통은 이미 얻은 긍정적인 가치를 포함하고 보존한다. 그것은 과거를 반복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진전을 마련하기 위한 것이다. 전통은 기억이다. 기억은 경험을 풍요롭게 한다. 아무것도 기억할 수 없다면, 앞으로 나갈 수 없다. 우리가 과거의 반복에 노예처럼 묶여 있을 때도 마찬가지다. 진정한 전통은 굴종이 아니라, 신실함이다.
이는 예술 분야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어떤 공식으로만 이어받은 전통, 교실에서 배운 모델을 강요하거나 노예처럼 받아들이기만 해서는 어떤 창조도 없다. 이미 수많은 예술 작품이 있다 하더라도, 그 예술 작품은 계속해서 태어난다. 전통은 늘 다른 것에서 배우는 것을 뜻한다. 학적인 배움이나 모방은 가능한 하나의 예에 불과하다. 우리에 앞서 연구하고 창조한 이들의 경험에서 배우는 다양한 의지도 있다. 이러한 배움의 목적은 그것들이 주는 영감의 활력을 받아들이고 그 원래의 정신 속에서 그 창조적인 작업을 계속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새로운 세대에서 그것은 원래 작품이 지닌 자유와 젊음과 약속으로 새로 태어난다.
고등 학문의 활력에 책임이 있던 이전의 여러 정신적 태도 – 예술이나 신학과 같은 – 은 요즘 매우 형식적이 되었으나, 이제 과학적 연구라는 세계에서 그 고향을 발견하게 되었다. 과학이라는 말은 더 넓은 안목을 가진다는 뜻이다. 이런 점에서 파스칼의 경구는 진정한 연구자들에게 매우 의미심장하고 중요한 표어일 것이다. “수많은 세기에 걸쳐서 사람들이 이어받은 모든 것들은 한 사람, 혹은 같은 사람의 작업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그는 늘 존재하고, 쉬지 않고 배운다.” 이 유명한 구절은 전통이 지닌 본질의 중요한 차원을 표현한다.
이 짧은 책의 주제인 ‘전통’은 과학이나 예술, 사회학이나 도덕의 전통을 다루지 않는다. 여기서 말하는 전통은 엄밀한 의미에서 그리스도교 전통이다. 좀 더 익숙한 의미에서 독자들에게 전통을 소개하는 것에는 이점이 있다. 그러나 전통에 대한 신학적 문제는 독자들에게 아주 새롭지만은 않을 것이다. 자기 나라의 역사, 종교적인 분열과 얽히고설킨 이 세계의 복잡함 속에서 살다 보면 천주교와 개신교 사이에 존재하는 논쟁에 대해서 눈감고 있을 수만은 없을 테니까. 개신교는 성서의 권위를 주장하고, 천주교는 전통의 권위를 주장한다 하지 않는가?
모든 신자가 보기에 성서(구약과 신약)는 그 높은 위치를 누린다. 성서의 가치는 절대적이다. 그러므로 천주교 신자는 ‘천주교 성서’로 성서를 읽는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 ‘천주교 성서’라는 것이 ‘개신교 성서’와 어떤 점에서 다른지는 잘 모를지라도 말이다. 그는 성서를 개인적 해석에만 의미하면 그리스도교의 신앙 체계에서 잘못된 입장을 갖게 된다고 생각한다. 그리스도교의 분열된 교단을 볼 때마다 매일 이 점을 되새긴다고 본다. 그는 종교개혁 이후로 그리스도인 사이에 “성서냐 전통이냐” 하는 논쟁이 있다는 것을 안다. 이 논쟁은 신앙의 규칙에 관한 것으로 생각한다. 그는 또 천주교에서는 성서를 순전히 개인적인 방식으로 언급할 수 없다는 것을 안다. 우리는 성서를 교회의 지도와 교회의 해석에 따라서 성서를 읽는다. 성서가 가장 높은 근거로서 거기에 기댄다고 하더라도, 개신교 신자가 기대는 방식이나, 혹은 그리 생각하는 것과는 다르다. 천주교 신자는 성서에 따라서 산다고 하더라도 그 밖에 ‘뭔가 더’와 곁들여 산다. 그 ‘뭔가 더’는 교회이다. 그것은 전통이다. 이 말은 교회와 전통이 같다는 뜻인가? 우선 전통은 기록되지 않은 어떤 것이다. 어떤 교리를 삶으로 전달하는 것이다. 말로만이 아니라 어떤 태도와 행동 양식을 통해서 전달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기록된 문서들, 교도권의 문서들, 전례, 교부들의 저술, 교리 교육서 등 모든 것을 포함한다. 이것이 전통의 증거가 되고 전형이 된다.
신앙과 관련된 사안에 대해서 잘 배운 신앙인이라면 이러한 저술을 모를 리 없다. 그들은 적어도 그런 것이 있다고는 알고 있다. 성 어거스틴,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니케아 공의회와 트렌트 공의회처럼 그들에게 꽤 중요하다. 그들은 “천주교”라는 것이 교리서에만 제한되지 않는다는 정도는 알고 있다. 현재 교리서의 내용은 오랜 과거의 많은 사상가, 성인들과 창조적인 정신이 만들어 낸 문화와 그 신심과 전례 등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점을 알고 있다. 현재의 교리서는 시대를 통해서 많은 변화를 겪은 산물이라는 것도 안다. 개인이 가진 신앙은 관계적이기에, 모든 신자는 그 문화 속에서 그 신앙의 선배들의 손을 통해서 이어받은 막대한 유산을 받고 있다는 점을 안다. 이런 유산에 대한 자세한 내용을 모르거나 비판적인 시선을 갖지는 못하더라도 말이다. 그는 그 자신의 문화에 담긴 내용에 대해 혼란스러워하기도 하지만, 그 문화가 다양한 면에서 가치 있고 그 역사가 있다는 점을 안다.
민간전승에 담긴 단순한 지역 관습도 있을 테지만, 공의회의 결정과 우리의 신앙 문화를 풍요롭게 해주는 글을 썼던 신학 교사들을 이어받은 내용도 있을 테다. 본능적으로, 혹은 그들을 인용한 설교자의 예를 따라서, 우리는 더 오래된 저자에게 더 많은 권위를 두곤 한다. 그들은 사도시대 직후를 살면서 사도들의 가르침을 전달했고 고난을 겪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그 토대에 가까웠던 것은 우리가 흠모할 만한 그들의 견실함과 존경할 만한 품위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그들은 창립자나 선구자에게서 보이는 유형처럼 하느님의 섭리로 우연이 그런 진정성을 인정받았다고 할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교 역사 전체를 통틀어 초기 교회를 근거로 삼는 일은 특권의 위치를 누렸다. 요한 23세는 이를 여러 번 이야기했는데, 특히 공의회 소집을 발표하고 로마 교구 시노드 폐막할 때 한 연설이 그 예다.
17세기에는 성찬례 안에서 그리스도의 실재와 교황의 수위성 같은 한두 개의 사안에 대해서 “신앙의 영속성”이라는 이름 아래 근거 작업을 하려는 유행이 있었다. 그 작업은 그 이후 세대들에게 넘겨져서 완성되었다. 이러한 증거 작업은 그 역사적이고 철학적인 맥락과는 동떨어진 채 두세 개의 구절로 환원시켜 이뤄진 일이 잦았다. 그리고 여전히 우리의 신학 지침서에도 발견되는데 아주 간명한 제목을 갖고 있다. ‘성서로 증명된'(Probatur ex Scriptura), 그리고 이어서 ‘전통으로 증명된'(Probatur ex Traditione) 등의 제목을 달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전통”에 대한 이해는 새로운 전기를 맞고 있다. 즉 “르수스망”(ressourcement: 원자료로 돌아가자)이 그 방법이다. 이 멋진 말은 샤를르 페기(Charles Péguy)가 마련한 것으로 근원으로 돌아간다는 뜻이다. 오늘날 이전 것이라는 의미와 더불어 근원에서 시작하자는 의미이다. 이는 페기의 혁명과 개혁에 대한 개념에서 나온 생각이다. “덜 완전한 전통이 좀 더 완전한 전통에 기대는 것; 얕은 전통이 좀 더 깊은 전통에 기대는 것; 새로운 깊이에 닿기 위해 전통을 후퇴시키는 것, 그리하여 좀 더 깊은 차원에서 새로운 연구를 시작하는 것, 그것은 말 그대로, 원자료로 돌아가는 것”이다. 페기는 이를 또 “인간의 역사를 되짚어가는 성찰”이라고도 말한다
이런 면에서 살펴보면, 우리가 다루려는 전통의 문제는 순전히 추상적이거나 이론적인 것이 아니다. 그리고 여전히 단순하게 학문적인 것도 아니다.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관심을 둘 가치가 있다. 전통은 현재의 종교적 상황에 근본적이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교회의 쇄신(비록 본질적인 변화는 없더라도)을 향한 존경할 만한 노력 – 개혁하려는 본능과 르수스망의 표지 – 이 두드러진 상황과, 다른 한편으로 교회 일치에 대한 희망과 열망, 그리고 대화라는 상황은 의견을 나누려는 새로운 분위기 속에서 성서와 교회와 전통의 관계를 하나의 연구 주제로 만들었다.
이 책의 첫째 목적은 모든 신자가 몸소 살아가고 있는 전통에 대해서 알고 있는 바를 검토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 주제에 대한 시각의 일반적인 혼란스러움을 명확히 하려는 것이다. 그 사안은 생각했던 것보다는 아마도 더 복잡할 것이다. 우리와 갈라진 형제들과 우리 사이의 문제를 다루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물론 그 문제들이 예전에 논쟁을 일으키고 불쏘시개가 되었던 것이라도, 극단적인 대립은 피하려 한다. 그러나 이 대화는 어쩔 수 없이 서로 다른 시각의 대면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공정하고 상호 존중의 입장에서 논의할 것이다.
각주는 최소화했다. 이 주제에 대한 좀 더 자세한 논의는 두 권으로 된 <<전통과 전통들: 역사적 고찰>>(Las Tradition et le traditions; Essai historique) 1권과 같은 제목의 <<신학적 고찰>>(Essai théologique) 2권(Paris: Favard, 1960 & 1963)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책을 언급할 때 약어로 각각 EH와 ET를 사용한다.
* Yves Congar O.P. The Meaning of Tradition (1964) 프랑스어 원제: La Tradition et la vie de l’Église (전통과 교회의 삶)
March 30th, 2011 at 4:29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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