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의 회복: 오직 성서, 교도권을 넘어서

전통에 대한 새로운 고찰은 어쩌면 “오직 성서”(sola scriptura)라는 주장과 “교도권”(magisterium)이라는 주장의 대결이 드리운 서구 신학의 그늘을 벗기려는 작업인지도 모른다.

앞서 옮긴 이브 콩가르의 1960년대 저작은 ‘전통의 의미‘에 대한 새로운 고찰이 20세기 그리스도교 신학의 중요한 전기였다는 점을 보여준다. 전통에 대한 새로운 접근은 전통주의에 대한 비판의 한 방식이었다. 역설이다. 그런 점에서 20세기 근대 전례 운동이나,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결과물, 그리고 해방신학, 민중신학, 여성신학 등은 그와 비슷한 맥락에 있다고도 할 수 있다. 물론 그 차원과 방향과 심도는 그 다양한 정치-사회적 맥락만큼 각각 다르다.

21세기는 좀 더 다양하게 그 전통의 내용물을 찾아내고, 전통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덧붙이며, 아예 그 자체로 좀 더 풍요로운 전통을 만들어 낼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그리스도교 역사에 각인된 ‘오직 성서’는 여전히 막강한 힘이어서, 특히 신앙인의 좁은 이해를 부추긴다. 그 반대편에서는 전통주의로 회귀가 돋보인다. 포스트모던의 혼란에 대한 반대급부로 확실한 답변을 제공하는 근본주의가 더욱 세를 떨치고 있다. 그렇다면 이런 전통주의의 위험을 경계하며 콩가르의 이해를 잇는 ‘전통’의 재발견 기획은 어디서 찾아볼 것인가?

20세기 신학의 마지막 거장인 존 매쿼리(John Macquarrie)가 “(영국) 성공회 신학의 미래”라고 평가한 데이빗 브라운(David Brown)의 기획을 엿본다. 그의 주요 저작들은 ‘인간의 상상력이 만들어낸 (문화) 전통과 그 안에 담긴 하느님의 계시’에 관한 기획이라고 하겠다. 그 기획은 역시 고전적인 성공회의 기풍(교의신학보다는 전례와 문학적 언어에 기댄 ‘신학하기’)에 잇닿아 있거니와, ‘성서와 교리’에 집착한 서구 신학의 오랜 그늘을 넘기 위한 조심스럽고도 원대한 신학적 기획으로 읽힌다. 이런 ‘서구’의 대안적 기획은 한국이라는 맥락에 어떤 자극을 주며, 또 한계를 드러낼까?

아래에 데이빗 브라운이 쓴 주요 저작 두 권의 서장을 각각 옮겨 올렸다.

번역 후기: 짧은 경험이나마 여러 영국(신)학자들의 글을 읽고 번역했다. 그런데 대부분 읽기 어렵고 짜증 나도록 복잡한 구문을 구사한다. ‘너희는 이 경지를 모르지?’ 하는 것 같기도 하고, 너무나 조심스러운 장치를 여기저기 들여다 놓아 독서를 방해하는 일이 잦다. 한마디로, 글 품새가 어지럽다. 이러면 번역은 특히 괴로운 일이 된다. 오역은 분명히 내 탓이지만, 그 책임의 일부를 저자와 나눠야 덜 억울하겠다.

2 Responses to “전통의 회복: 오직 성서, 교도권을 넘어서”

  1. 민노씨 Says:

    얼핏 근대(모더니즘)에 관한 하버마스와 리오타르의 대립각이 연상되기도 합니다.

    “계몽이라는 미완의 프로젝트”(하버마스)를 역설한 하버마스와 “거대서사의 종말”을 이야기하는 리오타르는 우리에게도 ‘포스트 모더니즘’ 논쟁으로 ‘유행'(ㅡ.ㅡ;)했던 것 같은데요. 거시적 비전과 미시적인 감각들이 어떻게 ‘지금 여기’에서 실체성을 현재성을 획득할 수 있는지에 대한 대답을 그 논쟁은 대답해주지 않은 것 같아요. 적어도 시간이 꽤 흐른 뒤에 되돌아보면 그렇습니다(물론 제가 너무 공부가 부족해서 그럴수도 있겠지만요).

    언급하신 저자들의 ‘기획’이 ‘우리(나라)’라는 구체적 맥락을 만나 생겨날 수 있는 새로운 의미들에 대해 주신부님께서 미시적으로 풀어주시면 참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얼핏…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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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r. joo Reply:

    민노씨 / 흥미로운 비교와 논쟁을 소개하시네요. ‘전통’은 아마도 “거시적 비전과 미시적 감가들”의 구분을 넘어선 시각이 아닐까 싶어요. ‘역사 전편에 깃든 삶의 축적과 결’에 대한 조심스러운 접근이 ‘전통’의 의미아 닿아 있다고 봅니다. 그런데 민노씨는 제 능력 밖의 것을 늘 요구하시는군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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