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생자를 바라보는 청명한 상상력

(註: 지난 9월 25일 오전 지하철 이수역(총신대입구역) 사고와 관련하여 페이스북에 짧은 글을 올렸다. 갑작스러운 사고 소식에 놀라던 차에, 언론의 보도와 인터넷에 올라오는 무명의 댓글들을 보며 매우 큰 충격을 받았다. 그래서 단숨에 글을 적었다. 며칠 후 유가족과 함께 그분의 화장예식을 집례한 뒤, 슬픈 마음을 담아 간단히 적어 올렸다. 슬로우뉴스의 편집장인 민노씨가 이 글을 보고 슬로우뉴스에 올리자고 제안하자, 잠시 망설인 끝에 그러자고 했다. 개인의 잡감을 적는 페이스북의 글이 우리 사회에서 신뢰받는 드문 인터넷 매체에 적절하지 않겠다는 생각도 잠시 했지만, 엉성한 글에서나마 진심 어린 호소를 읽어내리라 기대했기 때문이다. 기록을 위해 그 글을 이곳에도 옮긴다.)

지하철 이수역의 로사 할머니

지하철 이수역 사고의 희생자는 저희 성공회 주교좌성당의 80대 여성 교우이신 ‘로사’님입니다. 목요일 아침에 성당에서 있을 성서 공부 모임에 참여하려다가 변을 당하셨습니다. 마음이 너무 아프고 슬퍼서 숨을 고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분노를 삭일 수 없어서 고인과 가족께 결례라 생각하면서도 한마디 적습니다.

희생자를 바라보는 우리 사회의 시선

SNS 등에서 고인을 향한 애도의 염을 표하는 분들이 있기도 하고, 사이사이 스스로 인간이기를 포기한 듯한 댓글도 보입니다. 차마 옮길 수 없는 무례하고 잔인한 말들입니다. 이 잔인성은 어디서 나왔을까요? 그런 말을 내뱉는 사람을 탓하고 싶지 않습니다. 사고 후 빨리 기관차를 출발하라고 말했다는 사람도 비난하고 싶지 않습니다. 익명의 말들이니 그냥 덮고 싶습니다.

그러나 CBS 김현정 뉴스쇼 인터뷰에서 서울메트로 홍보실 차장이 뱉은 발언과 이어가는 대화는 우리 사회의 병폐, 특히 책임을 진 사람들의 책임 전가와 안전사고의 희생자를 바라보는 우리 사회의 시선이 고스란히 배어있습니다. 홍보실 차장과 앵커의 대화는 이렇습니다.

김현정: 그러니까 어제 오전 9시 50분쯤 총신대입구역 승강장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상황이 벌어진 겁니까?

김광흠(서울메트로 홍보실 차장): 그때 총신대입구역에서 열차가 출발하려고 하는데 80대 할머니 한 분이 뒤늦게 열차에 타려고 하셨어요. 그래서 전동차 문은 닫히고, 전동차 문이 닫히니까 할머니가 급한 마음에 전동차 문에 지팡이를 끼워 놓으신 거죠. 그리고 그렇게 가까이 있으니까 스크린도어, 요즘 안전문이라 얘기하는데요. 스크린도어는 안 닫힌 상태였고, 지팡이는 전동차 문 사이에 껴 있었는데 그것이 얇다 보니까 전동차 문이 닫힌 걸로 인식이 됐었고요. 그래서 차장이 열차를 출발시키는 바람에 발생한 사망사고입니다.

김현정: 할머니가 지팡이를 놓으셨으면 되는데 잡고 계셨군요.

김광흠: 예. 지팡이를 잡고 계시는 바람에 안타까운 사고가 벌어졌습니다.

책임 기관의 책임을 조금이라도 덜어보려는 언론 플레이가 훤히 드러납니다. 그 차장의 발언대로라면, “지하철을 타려고 했으니까 사고가 난 겁니다. 지하철을 타지 않았으면 안타까운 사고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라는 말이나 다름없습니다. ‘세월호에 탔으니까 죽은 것이다, 수학여행 제주도로 안 갔으면 사고 났을 리 없다’는 말과 같습니다.

‘지팡이’는 사고 원인이 아닙니다

사고의 정확한 구성이 어떻든, 이런 이야기를 멀리서 듣는 안타까운 마음에서는 ‘그 지팡이를 놓으셨다면…’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고 원인과 관련이 없습니다. 그러니 책임 기관을 대표해서 나온 사람이 할 말은 전혀 아닙니다. 다시 말하거니와, 이는 언론 플레이일 뿐입니다.

밝히거니와, 희생당하신 분은 80세 초의 여성이시고 신체장애가 있으셔서 거동이 매우 느리신 분입니다. 지팡이는 그분의 수족과 같이 함께 움직였습니다. 거동이 느릴 뿐, 다른 이의 도움을 받지 않으시고 독립하여 홀로 사셨던 분입니다. 그분의 판단력에 별 의심이 없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그 연세에 비해 흔치 않은 고등교육을 받으셨으며 매사에 삶과 행동과 판단이 사려 깊고 정확하신 분입니다.

사고의 원인은 명백합니다. 지하철 안전 운영 규정에 어긋나는 지하철 운행이 있었기에 사고가 났습니다. 이 책임을 경감하려는 발언은 그저 한 인간의 생명에 무례할 뿐만 아니라 잔인합니다. 자신들의 책임을 인정하는 듯하면서 슬그머니 개인도 알아서 조심해야 한다는 식으로 물타기 하는 일이 비일비재한 사회는 무례하고 잔인한 사회입니다. 이런 사회에서는 책임을 제대로 물을 수 없고, 문제점이 개선될 여지가 적어집니다. 비슷한 사고가 계속해서 일어나는 이유입니다.

책임 전가는 생명 자체에 잔인한 생각을 품게 합니다

분명한 책임, 특히 공적이고 우선적인 책임을 회피하며, 희생당하거나 피해를 본 개인에게 어떤 작은 원인이라도 전가하려는 행위는 곧바로 한 인간, 아니 생명에 대한 잔인한 사고를 품게 합니다. 어떤 안전 사고 등에 관하여 ‘그 사람도 잘못했네.’ ‘참 운이 없네’ 하는 등의 말을 입은 물론이려니와 생각에도 담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 말을 담는 순간, 우리는 공적 기관이 책임을 회피하려는 잔인성에 무의식적으로 동참하게 됩니다. 결국, 우리 개인도 그 잔인성의 희생자가 될 일이 뻔한 일인데도 말입니다.

이 지상에 한 생명이 왔다가 떠나는 일은 그 어떤 상황에서라도 고귀하고 장엄한 일입니다. 그 장엄한 생명의 생멸을 손쉽게 바라보면, 자기의 손익계산과 편의대로 바라보면, 우리 삶이 비천해집니다. 비천하고 잔인한 나락에 이 사회와 우리 생각, 우리 자신을 내맡기지 말아야 합니다. 간곡한 호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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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lliam Blake, Pity, c. 1795)

생명과 죽음에서 존엄을 지우는 ‘오염된 상상력’

로사 교우님의 장례가 있었고 저는 화장예식을 인도하며 한줌의 재가 된 고인을 모셔야 했습니다. 하얀 재가 된 몸에서 타지 않은, 어린이 주먹 만한 세 개의 큰 쇳덩어리가 여러 나사와 함께 나왔습니다. 척추 수술을 하신 흔적이 고스란히 남았습니다. 느릿한 걸음의 신체장애를 보여주는 증거였습니다. 그분은 서둘수도 없었고 억지를 쓰며 문을 열려는 분도 아니었습니다.

한 세대를 귀하게 살았던 드문 여성 지성인이요, 사랑스러운 어머니가 공적 기관의 안전 불감증과 무책임으로 희생되었지만, 생명을 향한 고귀한 마음이 희미해진 사회의 ‘오염된 상상력’ 안에서 허투루 보도되고 그려지는 모습이 안타깝기만 합니다. 이 사회를 향한 안타까움입니다. 다시 말하거니와, 귀한 생명을 앗긴 일을 자신의 편의와 오도된 입방아의 소재로 삼아선 안 됩니다.

죽음을 비웃는 오염된 상상력을 거둬내고, 죽음에서 생명의 신비와 깊이를 바라보는 청명한 상상력이 일어났으면 합니다. 로사 교우님의 재 앞에서 다짐하며 드린 기도입니다. 그분의 죽음이 이 사회를 향해 던지는 호소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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