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례력 연재] 신비, 신앙과 이성 사이 – 토마스 아퀴나스 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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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 – 신앙과 이성 사이 – 토마스 아퀴나스 축일1

주낙현 요셉 신부 (서울주교좌성당 – 전례학 ・ 성공회 신학)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1225-1274)은 그리스도교, 특히 서방교회 최고의 신학자로 꼽힌다. 그가 남긴 <신학대전>(Summa Theologiae) 은 당시 그리스도교에 큰 도전이자 집대성이었으며, 이후로도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 교회는 그를 ‘천사와 같이 위대한 학자’로 불렀다. 그가 세상을 떠난 3월 7일이 축일이었으나 사순절기인 탓에 그의 위대한 생애를 적절히 기념할 수 없었다. 1969년 천주교의 전례력 개정에서는 그의 유해를 프랑스 툴루즈 자코뱅 성당으로 옮긴 600주년을 기념하여 축일을 1월 28일로 옮겼고, 성공회도 이날을 따른다.

토마스 성인은 이탈리아 아퀴노 지방의 귀족 가문에 태어났다. 부모의 강요로 당시 출세가 보장된 베네딕트 수도회에 입회했으나 곧 ‘탈출’하여, 새롭게 등장한 설교 수도회인 도미니코회에 몸을 담았다. 이 수도회는 겸손과 절제와 가난의 삶으로 그리스도교 신앙의 진리를 깊이 연구하고 정리하여 사람들에게 쉽게 전파하는 일에 힘썼다.

오늘처럼 13세기 교회도 혼란스러웠다. 교회 권력자들은 관습과 교리에 기대어 자신의 입지를 변명하기 일쑤였다. 새로운 영성을 주장하는 이들도 사적인 종교체험을 부풀려 전통과 신학을 내치고 지성을 거부했다. 성찰하는 지식과 연구에 소홀하면 교회의 기초는 무너진다. 부패와 타락이 스며들고, 근거와 논리가 몹시 부족한 주장이 깨달음인 양 판을 친다. 토마스 성인의 의지는 뚜렷했다. 신앙인은 성서의 말씀과 교회의 가르침을 자신이 처한 상황 속에 맞게 새로운 언어와 논리로 끈질기게 묻고 대답해야 한다.

토마스는 고위 성직자나 신학자와 논쟁하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이런 성인을 시기하고 질투한 사람도 많았다. 처세술도 모르고 ‘무식한 황소’처럼 덤비는 ‘젊은 급진파’라고 핀잔했다. 그의 주장은 너무 ‘급진적’이라는 명목으로 여러 번 교회의 제재를 받았다. 그러나 스승 알베르토는 토마스의 성실함과 총명함이 교회를 구할 것이라며 변호하고 응원했다. 이러한 보호와 가르침 속에서 성인은 하루도 쉬지 않고 연구하며 글을 썼다.

성인의 관심은 신앙과 이성의 조화였다. 신앙의 은총은 자연 세계와 인간 이성에 대한 거부가 아니라, 자연과 이성의 완성이었다. 신앙과 이성이 서로 도울 때라야 오히려 둘이 건강하게 제대로 선다. 그는 시대의 질문을 궁리하고 시대 학문과 대화했다. 당시 떠오르던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이용하여 그리스도교의 진리를 소통하려고 애썼다. 그 결실이 <신학대전>이다.

위대한 성인 학자는 신비 앞에 겸손했다. 어느 날 신비 체험을 한 뒤 그는 붓을 놓고 글을 멈추었다. 그의 제자가 옆에서 물었다. “선생님, 왜 글을 쓰지 않고 멈추십니까?” “이제는 글을 쓸 수 없다. 내가 지금까지 쓴 모든 것이 다 지푸라기와 같구나.” 성인은 자신과 시대의 한계를 분명히 식별하고 손을 놓을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 후로 그는 글을 쓰지 않았다. 3개월 후, 교회 공의회에 참가하는 여행길에서 세상의 죽음을 맞이했다. 그의 나이 마흔아홉이었다.

후대의 역사가는 토마스 성인이 경험한 또 다른 신비 체험을 전했다. 절필 선언 후 자신의 저작을 모두 ‘지푸라기’ 같다고 말하던 성인에게 예수께서 나타나 위로하셨다. “토마스, 너는 나에 관해서 정말 잘 썼다. 너에게 어떤 보상을 줘야 할까?” 성인이 대답했다.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직 주님만 있으면 됩니다.”

  1. 성공회 신문 2018년 1월 27일 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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