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 – 생명의 기쁨을 향한 산고
부활 성삼일 전례와 영성을 다뤄 나눈 글이 있었다. 몇몇이 고민 어린 조언과 물음을 전했다. 특히 ‘성 금요일’ 부분에서 십자가 사건의 ‘구속’에 대한 강조가 부족하지 않으냐는 신중한 아쉬움을 던지기도 했다. cf. 성 금요일: 정지된 시간
의도한 바였다. ‘지배 담론’으로 각인된 생각의 틀을 피해서, 그 사건과 의미를 오늘에 비추어 생각해 보자는 것이었다. 다만, 내 공부의 깊이가 얕으니 너무 무모한 일이었나 싶기는 하다. 해명처럼 트위터에 적은 짧은 말을 좀 더 풀어보고, ‘지배 담론’의 영향, 그리고 다른 전통의 이해를 간단히 옮겨 보겠다. (발뺌: 고민을 드러내고 같이 생각해 보자는 초대일 뿐, 짜임새 있는 주장은 아니다.)
1. “십자가=구속/대속”의 공식 (트위터)
“십자가=희생=구속”(Cross=Sacrifice=Atonement)은 오래된, 그래서 대중적인 신학적 공식이다. 그런데 이 공식은 성삼일 전체의 사건을 십자가의 ‘의미’에만 제한하는 경향이 있다. 십자가는 우선 무참한 폭력과 죽임의 사건이다. 이 사건에 정지하여 그 내막과 현실에 대면하지 않고 쉽게 구속을 위한 희생이라는 ‘의미’로 치환하면, 그야말로 ‘값싼 은혜’가 펼쳐진다.
십자가 사건을 현실 그대로 직시하는 동안에, 정작 그 ‘의미’를 찾는 해석학적 렌즈는 ‘죽음을 이긴 부활의 생명’이라는 사건 속에서 구성된다. 그제야 ‘구속’이 본뜻을 얻는다. 성삼일 전체 사건 속에서 십자가 사건을 봐야 하는 이유이다.
오래되고 널리 퍼져 깊이 새겨진 이해를 돌이키기가 쉽지 않다. 사람들에게 친숙하고 더욱 빨리 느끼게 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같은 ‘틀’ 안에 머물러 조금씩 바꾸려는 시도는 그 틀이 품고 있는 개인주의적 ‘구속’의 영성으로 되돌아갈 때가 허다하다. 같은 틀 안에서 그 틀을 넘어서기는 어렵다는 말이다.
2.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 – 적과의 동침?
통째로 이어진 하나의 사건을 토막 내 보면, 생각도 토막 나기 마련이다. 토막 난 생각에서 펼쳐진 교리는 그 분절의 골을 깊게 하고 상상력과 행동의 방향도 다르게 한다.
몇 년 전,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가 대단한 반향을 일으켰다. ‘수구’ 천주교인인 멜 깁슨이 만든 이 영화는 그 참혹한 리얼리즘이 또렷했지만, 그 리얼리즘은 ‘서방 교회’ 역사에서 구성된 특정 신학과 신앙을 포장하기 위한, 혹은 그에 집중토록 하기 위한 장치였을 뿐이다. 그래서 ‘나의 죄를 대신 지고 저렇게 참혹한 고통을 당하신 구속자 예수’를 보며 격렬하게 몸을 떠는 두려움과, ‘그가 없었다면 살점 뜯기는 폭력과 심판이 내게 있었을 것’이라는 안도감이 교차한다. 서방 교회의 혈육인 ‘보수적’ 천주교인들과 ‘복음주의적’ 개신교인들이 모두 이 영화를 집단 관람하고 감동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런 이유일까? 전례에서 보자면, 서방 교회는 오랫동안 성삼일(Triduum Sacrum)을 하나로 이어보지 못했거나, 어떤 연유에서든 ‘십자가=희생=구속’의 신학이 지배했다. 천주교에서도 최근에야 성삼일 전례가 회복됐다. 개신교 역시 이를 회복하려 하지만 쉽지 않다. 대체로 금요일 예배와 부활 주일 예배만 드린다. 성삼일 전례를 회복한 성공회도 그 지배 담론에 저항할 생각이나 의지를 별로 보이지 않는다.
3. 교부들의 다양한 생각 – 구속과 회복 사이
구속 혹은 대속에 대한 신학적 이해가 근거 없다는 말이 아니다. 최근에는 다른 해석이 나오기도 하지만, 구약의 희생제사가 대체로 이 유형이었고, 유대교 전통에 뿌리를 둔 초기 그리스도인들도 여기서 아주 자유롭지 못했다. 교회는 오랫동안 그 연결점과 근거를 사도 바울로의 로마서 3장 25-26절에서 찾았다. 그러나 이 구절의 앞뒤 맥락, 즉 창조 때 인간이 가졌던 영광스러운 본성의 회복, 그리고 하느님이 주도하시어 인간을 의롭다고 여기겠다는 구원 의지의 맥락 속에서 보아야 한다.
초기 교부들이 이에 관하여 다양한 견해를 제시했고, 무엇보다도 하느님을 모상으로 한 인간 본성의 회복을 십자가의 ‘들어 올림’ 사건에 비추어 보았다(cf. 이레네우스, 아타나시우스). 서방 신학을 대표하는 구속/대속 신학은 교회의 대분열이라는 격동기를 살던 캔터베리의 성 안셀름(1033-1109)에 이르러서야 더욱 굳어지고 퍼졌다. 이 지점에서 하느님은 자기 아들을 죽여서라도 채무 관계를 논리적으로 청산하는 냉혈한으로 채색된 것은 아닐까?
4. 다른 이야기, 다른 전통
그렇다면 이 지배적인 서방 교회 신학의 곁과 뒤에서는 어떤 생각이 흐르고 있었을까? 여기에는 다만, 중세 여성 신비가가 바라보는 십자가 환영과, 정교회 전통의 생각을 들어 옮겨 놓는다.
십자가: 산고를 겪는 ‘어머니-예수’
중세 여성 신비가 Marguerite d’Oingt(ca. 1240-1310)가 십자가에 보내는 시선은 여성의 몸과 삶에 대한 성찰과 일치한다. 십자가에 달리신 분은 해산의 고통을 겪는 여성이다.
그대는 내 어머니가 아닌가요? 아니, 어머니보다 더 크신 분… 오 사랑스러운 예수 그리스도, 주님, 일찍이 이런 아이를 낳은 산고의 어머니를 보셨으니, 이제 출산의 시간이 주님께 찾아와, 십자가라는 고통의 자리에 누우셨으니, 주님은 거기서 움직일 수도, 돌아누울 수도, 사지를 펼 수도 없었습니다. 그처럼 거대한 고통이라면 누구나 몸부림칠 텐데도… 주님의 혈관이 터져 나와 그 하루에 세계를 낳으셨습니다.
(Pagina meditationum)
예수께서는 고별사에서 당신의 고뇌를 이렇게 말한 바 있었다. “여자가 해산할 즈음에는 걱정이 태산 같다. 진통을 겪어야 할 때가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를 낳으면 사람 하나가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기쁨에 그 진통을 잊어버리게 된다”(요한 16:21).
십자가에 달린 예수의 울부짖음인 “엘리, 엘리 라마 사박타니”는 시편 22편에서 따온 말이다. 이 시편이 ‘산파이신 하느님’을 노래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예수의 이 외침은 죽음과 생명이 교차하는 지점이다.
희생과 성찬례 – 알렉산더 슈메만
[희생에 관한] 서방 교회의 신학적 관점은 그에 대한 두려움, 혹은 너무 쉬운 낙관론을 담고 있다. 이점이 우리 동방 정교회 전통의 영성 분위기와는 다르다. 이런 [대속적 희생 같은] 용어들로 동방 교회의 경험을 표현하기는 어렵다. 미사에 깃든 희생, 즉 ‘부서진 몸과 흘린 피’에 대한 전통 전체를 보자. 동방 정교회에서 우리는 빵과 포도주를 창조를 상징하는 것으로 본다. 포도주는 그것이 피같이 보이기 때문이 아니라, 피는 생명이기 때문에 성찬례의 선물이다. 포도주는 인간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어떤 것이다. 그러므로 성찬례 초입에서 하느님께 봉헌을 들어 올릴 때, 우리는 십자가와 그 고난에 아직 도달하지는 못했다. 우리는 다만 생명에 참여하게 되는 상황으로 기쁘게 회복된 것이다. 빵과 포도주는 내 몸과 내 피가 된다. 이것이 근본적이다. 그 행복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 희생의 삶과 생명에 참여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저 포기할 뿐만 아니라, 위로 올라간다. 그 올라가는 가능성에는 끝이 없다.
(Sacrifice and Worship)
May 11th, 2011 at 1:49 am
[…] 신학은 중세를 거치면서 그리스도의 죽음과 희생을 ‘대속’(atonement)으로 보면서, 죽음 자체에 집착했던 것일까? 카라바지오는 이제 성찬례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