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응시하며 노래하기
신학은 사람들이 누리는 일상의 삶을 응시하게 하여 자신의 삶을 스스로 노래하도록 돕는 일일는지 모른다. 신학하기(doing theology)의 주체는 신학자가 아니다. 신학하기는 인간의 삶 속에서 벌어지는 하느님 사건에 대한 증언이 서로 소통하도록 돕는 최소한의, 그리고 부분적인 행위이다. 이런 점에서라면 많은 신학한다는 이들은 여전히 헛발질하고 있는지 모른다. 이런 소통을 자극하고 돕지 않는 한.
어떤 편만한 과잉 욕구가 교회 안에, 사람들 안에, 그리고 어떤 논의에도 자리잡고 있다. 무리하게 일반화하자면, 힘과 지배에 대한 욕구다. 그러나 내가 더 잘 알고 있다고, 내가 더 확실하다, 내가 더 순수하다, 내가 더 자유롭다, 내가 더 진실하다는 생각은 종종 자기 정당화의 덫을 놓는다. 위로부터 작동하는 계몽하고 지도하려는 권위주의는, 아래로부터 치받는 반성없는 과잉 비판 혹은 무책임한 비판과 짝을 이룬다. 말들은 그렇지 않아도, 어느 쪽이든 삶에 대한 깊은 응시와 책임이 부족한 경우가 태반이다. 이미 계몽과 비판은 과잉이다. 계몽과 비판의 언어 뒤에 자기 안에 또아리 튼 욕망을 감추는 게 습속이 되면 더이상 정직해 질 수 없다. 결국 자신을 배반할 것이다. 본색을 드러내고 깊이 대화할 일이다. 그게 서로를 망치지 않는 길이다.
마땅히 여기에도 삶에 대한 따뜻한 응시가 바탕이어야 하겠다. 그래야 노래하며 춤출 수 있다.
아래 노래를 듣고 보며 든 짧은 생각.
그 참에 영화 [베를린 천사의 시]의 여러 장면이 겹쳤다. 물론 이 노래도.
Existentialism on Prom Night
…
There are moments when,
When I know it and
The world revolves around us,
And we’re keeping it,
Keeping it all going,
This delicate balance,
Vulnerable all knowing,
…
Sing like you think no one’s listening,
You would kill for this,
Just a little bit,
Just a little bit,
You would, you would…
Sing me something soft,
Sad and delicate,
Or loud and out of key,
Sing me anything,
we’re glad for what we’ve got,
Done with what we’ve lost
Our whole lives laid out right in front of us,
…
April 15th, 2008 at 4:10 pm
“계몽과 비판의 언어 뒤에 자기 안에 또아리 튼 욕망을 감추는 게 습속이 되면 더이상 정직해 질 수 없다. 결국 자신을 배반할 것이다. 본색을 드러내고 깊이 대화할 일이다. 그게 서로를 망치지 않는 길이다.
마땅히 여기에도 삶에 대한 따뜻한 응시가 바탕이어야 하겠다. 그래야 노래하며 춤출 수 있다.”
깊은 울림을 줍니다…
[Reply]
April 18th, 2008 at 9:23 am
민노씨 / 지난 10년을 도돌이시키려는 세력의 준동을 참담한 마음으로 지켜보는 한편, 속절없이 무너지는 사람들의 마음 밑바닥에 자리잡은게 무엇인가 생각해 보고 있습니다. 특히 이른바 ‘비판적’ ‘지식인들,’ 혹은 ‘비판적 세대'(386)에 대해서 말이죠. 거기서 ‘욕망’이라는 다소 종교적인 – 심리학적인 면 이전에 – 개념으로 생각하는 것이고요. 386 세대 안에 존재하는 운동 경험 공유에 자리한 끼리 끼리 정서를 보면서, 이것이 서로에 대한 성찰을 다시 막는 어떤 ‘침묵의 카르텔’로 작용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미칩니다. 아마 제가 속한 동네의 이야기에 한정되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만.
[Rep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