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되고 완전한 기쁨
몇 년 전 아씨시의 프란시스 성인의 초기 문헌을 읽는 수업을 들었다. 가르치시던 수사님(Br. William Short, OFM)의 탁월한 강의와 해석 때문에 성인의 삶과 가르침이 더욱 생생하게 다가 왔었다. 그러나 성인이 너무 컸고, 내게 그 삶이 너무 무거웠기 때문일까? 가까이 두고 그 글들을 기도 삼아 읽었으나, 차츰 찾는 일이 잦아들었다. 성인의 단순하도록 생생한 삶을 내 거울에 비추기가 버거워서였노라 하면서, 비추고 돌아보는 일을 게을리 했다.
이 즈음에, 당시 페이퍼의 주제로 삼았던 성인의 글과 이야기를 다시 떠올라 옮긴다. 다시 읽어보니, 늘 내 마음에 웅크리고 앉아 얼음송곳으로 내 발꿈치를 콕콕 찌르던 그 말씀, 평생 피하지 못할, 그 말씀, 그대로였다.
같은 이 [레오 형제]에게 같은 곳에서 일어난 일이다. 어느 날 성 마리아 성당에서, 복되신 프란시스는 레오 형제를 불러 이렇게 말했다. “레오 형제, 기록해 두세요.” 레오 형제는 대답했다. “보세요, 준비 됐어요.” 프란시스는 말했다. “참된 기쁨이 무엇인지 기록하세요.”
“한 소식 전달자가 와서 말하기를, 파리 대학의 모든 교수들이 우리 수도회에 입회했다고 합시다. 그러나 이것은 참된 기쁨이 아니라고 기록해 두세요. 또는 산 너머 모든 고위 성직자들과 대주교들과 주교들이, 프랑스의 왕과 영국의 왕과 더불어 우리 수도회에 입회했다고 합시다. 그러나 이것은 참된 기쁨이 아니라 기록해 두세요.
또 나의 형제들이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가서 그 모두를 신앙으로 개종시켰다고 하고, 또 내가 하느님에게서 큰 은총을 받아 병든 이들을 고쳐 주고 많은 기적을 행한다고 합시다. 그러나 나는 형제에게 말합니다. 이런 것들은 참된 기쁨을 이루지 못합니다.”
“그러면 참된 기쁨은 무엇일까요?”
“나는 페루지아에서 돌아오는 동안 한 밤 중 여기에 도착합니다. 겨울이어서 진창이 되고 하도 추워서 내 수도복 끝자락이 얼어 붙었고, 그 얼음이 내 발을 하도 때려서 상처를 내고 거기서는 피가 흘러 나옵니다. 흙투성이에 얼음덩이가 되다시피 한 내가 어느 문에 다가가서 한동안 문을 두드리고 사람을 부르자, 한 형제가 나와서 묻습니다. ‘당신, 누구요?’ 나는 ‘프란시스 형제입니다’ 하고 대답합니다.
그는 ‘꺼져 버려! 지금은 어슬렁 거릴 시간이 아니야, 넌 못들어 와!’ 하고 말합니다. 내가 계속 애걸하자, 그는 다시 ‘꺼져 버려! 무식하고 멍청한 놈아! 다시는 오지 말거라! 여기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으니, 너 같은 녀석은 필요 없어!’ 하고 말합니다. 나는 문에 서서 다시 애걸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으로 오늘 밤만 쉬게 해 주세요.’ 그러자 그는 대답합니다. ‘그럴 수 없으니, 십자가 수도원에 가서나 알아 봐.’
“나는 형제에게 말합니다. 만일 이러한 처지에도 내가 인내를 갖고 마음의 평정을 잃지 않는다면, 바로 여기에 참된 기쁨이 있습니다. 더불어 참된 덕과 내 영혼의 구원이 있습니다.”
in Francis of Assisi: The Saint: Early Documents, Vol. 1 (New City Press, 2002), 166f.
September 1st, 2008 at 12:16 am
이런 경우에 항상 떠오르는 김현의 지적이 있는데요.
“스스로 정당하다고 생각하지 않으면 싸울 수 없고, 스스로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면 희생할 수 없다..”
그런데 말씀하신 ‘참된 기쁨’을 얻을 수 있는 황금의 마음을 가진 사람은 진정 얼마나 될는지… 솔직히 좀 의문입니다. 그리고 그 황금의 마음을 가진 이는 “스스로 잘못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인내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고귀하기 때문에 인내하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들고 말이죠. 그렇게 되면 그 욕지거리를 하는 자는 영영 비루하고, 함께 상대할 수 없는, 대화할 수 없는 존재로 떨어지는 것은 아닌가… 그런 생각도 들고….
참으로 어렵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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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ptember 1st, 2008 at 1:42 am
신부님께서 올려주시는 글을 잘 읽고 있습니다.
추신: 2008년 람베스 회의 소식을 성공회신문에서 읽다가, 신부님께서 개회미사를 도우셨다는 이야기를 읽고 반가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람베스회의 참석과 인터넷 보도를 하시느라 정말 고생하셨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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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ptember 2nd, 2008 at 7:09 am
김바우로 / 오랜 만입니다. 저도 바우로님의 블로그 잘 보고 있습니다. 어렵고 고민스러운 처지에서도 꿋꿋하게 버티시고 힘내시기 바랍니다. 좋은 일이 곧 올 겁니다. 그리고 격려 고마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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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ptember 2nd, 2008 at 7:45 am
민노씨 / “황금의 마음”이라는 표현이 참 좋군요. 이름처럼 “황금 입술”로 칭송받는 분이 있긴 했는데요(St. Chrysostom). 이제부터는 민노씨를 따라 프란시스 성인을 그렇게 불렀으면 합니다.
희귀하기 때문에 성인인 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그러니 범부가 그런 마음 다 따라잡을 수 없는 일이라 생각해요. 게다가 그는 스스로 잘못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인내하는 것도 아니고, 스스로 고귀하기 때문에 인내하는 것도 아니라고 봅니다. 그러니 자신을 환대하지 않는 사람을 비루하게 할 일도 없습니다.
다만 쉽게 마음 상하지 않도록,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도록 자신을 수련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저도 민노씨와 같은 의문때문에 그럼 “어떻게 그 평정을 얻을 수 있느냐?”는 물음을 이어 갑니다(갔습니다). 그리고 성인이 매 시간 수련으로 삼았던 수난의 성무일도(the Office of the Passion)에 마음을 두게 되었습니다.
그 수련에서는, 앞에 민노씨가 인용한 김현의 “…으면”이라는 조건문을 넘어서는 지경으로 나아가라고 말을 건넵니다. 아직 건네는 말만 듣고 있을 뿐이어서 문제이긴 합니다만.
“대화”를 중시하자고 한 사람으로서, 민노씨가 지적한 부분을 다시 생각했습니다. 거룩한 체하며, 혹은 도통한 체하여 대화를 막아버리는 일이 횡행합니다. 그 나름의 경지라고 여기는 것을 나무랄 일은 아니나, 당최 대화가 진전되지 못합니다. 결국 통하지 않으니 그 “도통”은 거짓이라 생각합니다.
도를 깨달아 오늘 저녁 죽어도 좋을 사람이 그깟 추위에 못이겨 한밤중에 남을 귀찮게 하는 것도 군자답지 못한 일입니다. 그러나 성인은 자신의 심란한 처지 그대로 드러내 보이며 그 사람에게 환대를 요청했습니다. 그 환대의 요청과 수락이 대화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것은 그 둘을 풍요롭게 할 가능성을 갖고 있습니다. 이를 저버린 사람은 그 기회를 잃습니다. 그러나 성인은 화내지 않고 다른 문을 두드리겠지요. 그 평정은 다른 기회의 시공간을 마련해 줍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사람이 부활한 예수를 만난 이야기가 떠오르는군요. 그들이 길에서 만난 낯선 사람을 저녁에 초대하고 함께 음식을 나누고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들의 가슴이 뜨거워졌습니다 (루가 24:13-35).
말이 길어졌네요. 도에서 먼 탓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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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ptember 2nd, 2008 at 12:56 pm
귀한 말씀 잘 들었습니다. : )
특히나 ‘도통’에 관한 말씀은 정말 공감하지 않을 수 없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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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ptember 4th, 2008 at 11:11 pm
어느 박쥐같은 은사주의자 경찰청장의 천주교 세례명이 프란치스코(우리 성공회에선 프란시스.)라는 언론 보도를 보고 너무나 너무나 씁쓸했더랬습니다.
지금 프란시스 성인께서는 천상에서 얼마나 억울해 하실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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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ptember 11th, 2008 at 12:10 pm
혜이안 / 오랜만이군요. 🙂
이름뿐만 아니라 무엇이든지 남용되는 시대라는 생각입니다. 이름 값 하면서 살아야한다고 다짐하며 반면교사로 삼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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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ptember 12th, 2008 at 4:03 pm
[…] 것인지, 아니면 그 말을 하는 사람을 가엾게 여기는 것인지 알 수 없는 ‘도통’한 태도를 취하는데 익숙해지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