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작은 교회에 참여하는 일
소수자인 교회, 작은 교회는 교단일 수도 있고, 개별 교회일 수도 있다. 한국의 도저한 개신교의 개 교회 중심주의 때문에 교회(church)는 개별 회중 공동체(congregation)로 이해되는 면이 강하다. 그러나 본래 교회는 지역을 아우르는 개별 회중 공동체의 연합(교단에 따라, 교구, 노회, 연회)이든지, 교단을 가리키는 것이다. 어쨌든 작은 교단, 혹은 작은 교회에 참여하여 그 소수자들의 몸부림을 도와야 한다. 비판의 사회적 책임은 행동이다. 그 행동이 다양할지라도 이 소수자 원칙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처지가 작다고 소수라고 해서 그들이 모두 ‘소수자에 대한 관심과 참여’라는 실현한다고 볼 수 없다. 한국의 많은 작은 교단/교회들은 여전히 큰 교회를 욕망한다. 많은 이들이 (초) 대형 교회 부설 교회 성장 연구소의 세미나에 참여하여 ‘성장 비법’을 전수받으려 한다. 그동안 그 성장 연구소는 대형 교회의 지배적 논리를 퍼뜨리려 강화하며, 그 운영비의 일부마저 가난한 작은 교회에서 ‘삥뜯기’를 한다. 그러나 작은 교회들은 ‘삥’만 뜯기지 성공하는 사례를 마련하지 못한다. 논리와 처지가 맞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이 많은 작은 교회의 처지이고 편만한 욕망이다.
그러니 소수자의 처지에서 그 원칙을 지향하는 교단/교회가 바로 우리가 선택해야 할 ‘작은 교회’이다. 이런 교회를 의식적으로 찾아야 한다. 바르게 살아보려는 작은 교회들이 너무나 힘겹게 분투하고 있다. 이들을 일으켜 세워야 한다. 그 작은 목소리들이 들리게 해야 한다. 이 공동체들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그 삶과 가치를 나누며 발전시키고, 확대해야 한다.
이 주장에는 모순도 있고 역설도 있다. 작은 교회를 찾아가 그 힘을 키워야 한다는 것이 큰 교회의 지배적인 힘에 대한 비판과 모순될 수도 있다. 물론 그 가능성이 크지 않지만, 유혹은 늘 경계해야 한다. 그런데 이런 작은 교회들의 분투를 수수방관하는 동안 그런 가치의 목소리와 삶의 경험들은 점점 사라져서, 큰 교회의 지배력을 더욱 확대된다. 역설적인 경험이다.
인정한다. 여러 점에서 그 작은 교회들이 기대에 못 미친다. 여기에는 나름 한계와 변명이 공존한다. 작은 교회 고유의 작동 원리(다이내믹)를 구축하지 못한 사목자/목회자, 그리고 그 구성원들의 한계이기도 하다. 한편, 그 고유한 작동 원리는 많은 이들의 참여와 시행착오의 축적으로 가능하다. 그런데 여전히 교회를 찾는 이들은 다 만들어 놓은 떡을 쥐려 한다. 그 마음 모르는 바 아니나, 비판적인 신앙인들이 취할 자세는 아니다. 앞서 말한 모순과 역설을 넘으려면, 비판적인 신앙인들은 그 작은 교회 ‘안에서/통하여’ 그 비판을 실험하고 행동해야 한다. 교회 아닌 다른 곳에서 그 실험장을 찾았다면 할 말이 없다. 거기에 충실한 것도 좋겠다. 그러나 비판적인 신앙인들이라면, 교회를 여러 비판적인 사고와 삶의 경계를 넘나들며 그 비판적인 가치와 경험을 나누고 실험하는 공동의 시공간으로 만들 필요가 있다.
어느 경제학자는 ‘작은 것이 아름답다’고 했던가? 그러나 그 경제학의 주장이 낭만적인 회상이 되어버린 이 도저한 큰 것들의 절대 자본주의 시대에, 특히 한국 사회에서 ‘작은 것은 부끄럽다’가 더 맞는 말이 되었다.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다만, 우선 머리로는 이 지배적인 고정관념을 거부하고, 몸의 참여로 그것을 이겨내는 수밖에 없다. 너무 주관적이지 않느냐고? 그렇다. 신앙은 그런 주관적 결단을 시작으로 한다. 그게 허점이라면 허점이겠지만, 또한 마지막 힘이기도 하다.
June 16th, 2015 at 2:56 am
신부님, 현재 제가 있는 교회도 작은 교회입니다. 또, 그 특성상 한정된 소수자들만이 참여하는 교회입니다. 글을 보고, 어쩌면 제가 있는 교회에서 참여인원을 늘리겠다는 생각은 교회가 같는 참의미와 congregation 이란 단어를 완벽하게 잘못이해한 것이라고 알 수 있었습니다. 당장 곁에 있는 사람들과 하느님께서 초대하신 삶의 축제를 commune 하지 못하지 못하면서 또 인원 수만 늘려간다는 것은 삶의 축제의 의미 또한 이해하지 못한것이고 오히려 그 가치를 폄하하는 모습으로도 보여집니다.
제 곁에도 교회를 통해 만난 소중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때론 그들이 너무도 못나 보이고 또 그런 생각을 하는 제 자신도 못나 보입니다. 마치 교회에는 못난이들만 있는 것도 같다는 생각도 합니다. 게다가 그 숫자도 적습니다.
그론 생각을하다, 지난 주일에, 작은 겨자씨의 비유에 대한 설교를 들었습니다. 티끌만한 겨자씨가 자라나서 푸른나무가 되었습니다. 그런 겨자씨를 보면, 어쩌면 보잘것없이 작은 저도, 그리고 옆에 친구들도 형제들도 누군가에게 푸르를 수 있고 또 그것을 나눌 수 있게 살아가는것, 그것을 통해 삶의 축제에 함께 참여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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