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성공회의 미래 – 몇가지 시나리오, 그리고…

세계성공회의 이야기는 시시각각 전혀 새로운 소식들로 갱신되고 있기 때문에, 어떤 시점을 두고 소식을 전할라 치면 금새 옛날 이야기가 되어 버리기 십상이다. 게다가 내내 반복되는 이야기들이어서 지치기 쉬운 뉴스가 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이 사태들의 진행을 놓치지 않되, 조금은 멀찍이 사태를 놓고 사태의 추이를 전망해보는 것이 오히려 나을런지도 모른다. “향후 몇년 동안에 세계 성공회 안에는 어떤 일이 벌어질까?” 하는 물음에 대한 시나리오를 예상해 보는 한편, 좀더 근본적인 질문을 두고 성찰해 보는 것이다.

시나리오는 대체로 세 가지로 압축될 수 있겠다.

1. 세계 성공회에 아무런 일도 생기지 않고 그냥 지나갈 수 있다. (정말 그럴 수 있을까?)

2. 미국과 캐나다를 포함한 모든 교회가 2008년 람베스 회의에 초대받고, 이에 반대하는 “글러벌 사우스” 교회들이 새로운 연합체를 만들 수 있다. (회의 초대의 권한은 ‘지금까지’ 캔터베리 대주교가 가지고 있다.)

3. [윈저 보고서]가 제안한 [성공회 계약]이라는 것을 만들어서, 여기에 조인하는 교회만이 세계성공회의 구성원이 된다. (이는 지금까지의 성공회의 전통과는 전혀 달리 장로교나 루터교처럼 어떤 [고백적 문서]에 의해 교회를 규정하는 길을 만들어 낸다.)

가장 가능성이 많은 경우는 역시 세번째 [성공회 계약]의 채택이다. 불행하게도,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마지막 시나리오가 현실화되면, 세계성공회의 혼란 양상은 더욱 복잡해 질 것인다. 그 관구 교회들 간의 관계 측면에서 그리고 지금까지의 전통과는 전혀 다른 길의 선택이라는 점에서…

문제는 이러한 예상 속에서 간과하기 쉬운 어떤 원칙에 관한 물음이 남아 있다. 그것은 내내 “교회의 존재 이유” 곧 “교회의 선교 사명”이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무엇이 교회를 일치하게 하고, 혹은 무엇이 교회를 존재하게 하고 지탱시키는가 하는 점이다. 그것에 대해서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과 부활은 무엇을 전하고 있느냐에 대한 물음이다.

이러한 근본적인 물음을 가지고, 각각 시나리오의 자세한 이야기를 나누고, 이런 현상들에 대해서 하느님 선교 시각에서 성공회의 존재 이유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 싶다.

1. 세계 성공회에 아무런 일도 생기지 않고 그냥 지나갈 수 있다.

이것은 현재 진행되고 있는 논쟁들에 대한 어떤 해결책이 제시되지 않은 채, 2008년에 있을 세계성공회 주교회의인 람베스회의에 모든 주교들과 관구장들이 초대받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동성애자 주교인 진 로빈슨 주교도 포함된다. 그리고 회의에서 논란만 벌이다가 그대로 헤어진다. 물론 어떤 결의안을 낼 수도 있겠지만, 실제로 람베스회의 결의안은 어떤 법적 구속력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캔터베리 대주교 역시 다른 교구에 우월한 법적 권위가 없기에, 이 갈등은 내내 그대로 존재하게 된다. 서로의 차이를 심각하게 확인하는 부정적인 면도 있겠지만, 이를 확인함으로써 새롭게 서로에게 다가설 방법에 대한 노력이 절실해 질 것이다. 사실 세계성공회가 지금까지 지탱해오는 전통적인 방법 가운데 하나였다. 그런데 이게 가능할까? 이 문제는 곧장 두번째 시나리오로 연결되어, 그 판이 전혀 달라질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2. 미국과 캐나다를 포함한 모든 교회가 2008년 람베스 회의에 초대받고, 이에 반대하는 “글러벌 사우스” 교회들이 새로운 연합체를 만들 수 있다.

위와 같이 모두 초대를 받아 참석한다면, 가장 먼저 이를 반대할 그룹들이 이른바 “글러벌 사우스” 교회들이다. 우선 미국과 캐나다 성공회의 동성애자 서품이나 동성애 커플의 축복을 철회하지 않은데다, 그 당사자 주교들과, 게다가 이를 지지하고 있는 “여성” 관구장 주교까지 참여하는 마당에 발을 담그고 싶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아직 여성 성직을 반대하면서 “여성 수좌 주교”의 치리를 받지 않겠노라는 미국의 몇몇 보수적 교구들과 주교들까지 있는 참이니 사태가 분열로 치닫기에 알맞을 것이다.

사태가 이렇게 되면, “글러벌 사우스” 교회들은 대체로 캔터베리 대주교와의 인연을 끊을 것이고, 아마도 새로운 성공회의 세계적인 연합체가 나오게 될 것이다. 이들은 실제로 이미 나온 몇몇 성명서들에서 이러한 행보를 흘리면서 캔터베리 대주교를 압박하고 있는 참이다. 회의의 초대 권한은 ‘지금까지’ 캔터베리 대주교가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교구 혹은 관구들은 헌장에서 캔터베리 대주교와의 상통 관계에 대한 언급을 이미 삭제하기도 했다. 수순을 밟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현재 개신교 최대 교단은 세계성공회의 규모와 위상은 큰 손상을 받게 된다. 거의 반토막이 나지 않을까 싶다. 이 대열에는 “글로벌 사우스”의 많은 교회들이 참여하겠지만, 남아공이나, 필리핀 교회 (성공회와 필리핀 독립교회) 등은 참여하지 않을 가능성도 많다. 또 그때 “글로벌 사우스” 안에서의 내분도 있을 것이다. 물론 미국성공회 내의 보수파 교구와 개별 교회들도 이 분열된 모임에 참여할 것이다. 참고로 아시아 교회에서 한국, 홍콩, 일본 성공회는 이 글러벌 사우스 모임에 참여하지 않고 있다.

3. [윈저 보고서]가 제안한 [성공회 계약]이라는 것을 만들어서, 여기에 조인하는 교회만이 세계성공회의 구성원이 된다. 그리고 미국성공회와 캐나다 성공회는 개별 관구 교회 혹은 교구들과 온전한 친교(full communion)를 유지하게 된다.

실제로 위의 두번째 경우가 아니라면 대체로 이 세번째의 경우로 가게 될텐데, 여기에 더욱 무게가 실리는 것은 분명하게 드러나는 몇 가지 이유때문이다. 우선 [윈저 보고서]는 [성공회 계약]을 작성하여 관구 교회들이 조인할 것을 제안했다. 이에 따라 캔터베리 대주교는 [성공회 계약] 작성위원회를 구성하고, 그 의장을 [글러벌 사우스]의 중심 인물 가운데 하나인 웨스트 인디(서인도) 성공회의 고메즈 대주교를 위원장으로 임명했다. [윈저 보고서]의 위원장이었던 이임즈 주교와는 신학적인 성향과 성공회 전통에 대한 이해가 전혀 딴판인 양반이다. 게다가 캔터베리 대주교는 람베스회의 초청 범위에 대해서 관구장 회의와 협의할 가능성이 많다. 실제로 이것은 캔터베리 대주교의 고유한 권한이지만, 현재 상황 속에서 캔터베리 대주교가 위 두 경우가 가져다 줄 위험 부담을 안고 초대할런지는 미지수이다.

[성공회 계약]은 그 내용과 관계없이 성공회 역사 상 매우 획기적인 사건으로 남게 될 것이고, 지금까지의 성공회의 교회에 대한 이해를 전면적으로 바꿀 것이다. 즉 세계성공회는 지금까지, 다른 개신교들(특히 장로교나 루터교)처럼 어떤 문서화된 “고백 선언”의 테두리로 교회의 정체와 교리의 영역을 정한 적이 없다. 영국 성공회의 39개 신앙 조항도 이러한 고백 문서에 해당한다고 할 수 없으며, 그 특수성은 당시 종교개혁의 상황과 영국이라는 지역적 상황에 국한된 것이지, 세계 성공회 전체와는 관련이 없었다. 성공회 일치, 나아가 다른 전통 교회와의 일치를 위해 제시한 “시카고-람베스 4개 조항”이라는 것도 교리를 설정하거나, 교회의 경계를 짓는 고백 문서는 아니다. 이런 점에서 이른 바 [성공회 계약]이라는 것은 오히려 장기적인 안목에서 볼 때 교회의 분열을 촉진시킬 것이며, 성공회 자체의 배타성을 강화시킬 것이다.

지금까지 진행 상황으로 보아서, [성공회 계약]이 미국 성공회나 캐나다 성공회가 인정하고 서명할 만큼 너그러운 것이 될리 없을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뉴질랜드, 호주, 남아공 성공회 등이 여기에 서명할 지도 불확실하며 영국 성공회 마저도 이를 두고 큰 내홍을 겪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서명파 교회와 그렇지 않은 교회의 분열은 어떤 식으로든지 자명한 일이 될 것이다.

[성공회 계약]은 성공회 전통 상 유례가 없는 매우 ‘개신교적’ 현상인데다가, 이것이 줄 장기적인 파급 효과는 더욱 암담할 수 있다. 이 내용에서 동성애뿐만 아니라, 여성 성직, 게다가 여성 주교직에까지도 문제를 제기하게 된다면 걷잡을 수 없는 혼란이 성공회 안에서 일어난다. (나는 현재 동성애 문제와 여성 성직의 문제를 다른 사안으로 볼 수 없다고 생각한다). “글로벌 사우스” 교회들 대부분은 여성 성직을 인정하지 않는다. 영국 자체도 여성 주교직으로 내분이 심하다. 다른 일로도 영국 성공회는 그야말로 곤란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 이미 영국 의회는 동성애의 시민적 결합을 용인하는 의안을 통과시켰다. 국교는 의회의 결정을 따라야 한다. 그럼 영국 성공회는 이러한 [성공회 계약]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할 것인가?

미국과 캐나다 성공회는 [성공회 계약]에 따라서 세계성공회 안에서 제외될 수 있다. 하지만 이 계약에 서명한 많은 관구와 교구들은 여전히 미국과 캐나다 성공회와 “온전한 상통” 관계를 유지하게 될 것이다. 아마 최소한 한국, 홍콩, 일본과 같은 아시아 성공회는 계약에 서명하되, 미국, 캐나다 성공회와 단절하지는 않을 것이다.

성공회 역사 상 이런 분열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내내 국지적인 수준이었다. 이런 식으로 [계약] 혹은 어떤 고백 문서에 의한 분열이 분명하게 되면, 다시 봉합되는 일은 쉽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이 시점으로부터 우리는 성공회의 전통과 그 신앙적 실천을 전혀 다른 각도록 보게 될 것이다. 아마도 장로교나 루터교를 가지고 성공회를 해석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이제 다시 근본적인 질문으로 돌아간다. 왜 교회가 존재하는가? 이러한 존재 이유 안에서 교회의 일치는 어떤 의미가 있는가? 그리고 왜 분열되면 안되는가? 저마다 자기 사정이 있을 것이다. [윈저 보고서]의 최대 약점은 실제로는 상당히 기구적인 의미의 “일치”에만 중점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허구적이다. 성공회가 늘 주장하던 “다양성 속의 일치”라는 말 자체가 이미 기구적 일치를 넘어서고 있는 말이다. 게다가 기구적인 일치에만 집중하게 되면, 역설적으로 성공회 자체의 태생을 부정하게 된다. 종교개혁 당시 영국 교회는 영국민들의 교회가 되기 위해서 이러한 허구적인 일치, 나아가 권력 지배적인 일치를 깨뜨리고 한발짝 나갔다.

그렇다면 실제로 근본적인 질문은 교회가 존재하는 이유, 그리고 교회의 선교 사명이 된다. 분명 이 선교 사명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과 부활이라는 사건 속에서 조명될 것이다. 저마다 이를 해석하는 방법이 또 다르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일치는 바로 그 선교의 내용에 해석의 방법을 누구 하나가 독점하고 있지 않으며, 서로에게 귀기울이고 배우기 위한 방법으로 존재한다. 또한 여기에는 어떤 독점적인 해석의 방법이 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하느님의 포괄적인 선교에 매우 치명적인 해악이 될 수 있다는 걱정이 자리하고 있다. 일치는 그래서 이 선교 사명을 함께 나누고 함께 걷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어떤 확정된 듯이 보이는 교리 – 실은 모두 역사적인 산물이지만 – 를 수호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하느님의 선교를 그 테두리 안에 가둘 수도 없다. 이러한 일치, 특히 교리적인 합의에 근거한 기구적 일치가 이 교회의 존재 이유와 하느님의 선교라는 전망을 왜소화한다면, 그것은 지킬 필요가 없는 일치이기도 하다. 그 존재 이유을 이미 상실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종교개혁은 오늘 이 순간에 무엇을 말하는가?

성공회가 지금까지 이러한 선교 사명에 충실했는지에 대해서는 서로 다른 평가가 교차한다. 때로는 너무 자기 조직의 보위에만 집중했고, 때로는 예언자적인 교회로서의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 참을 수 없는 정치적 수구주의의 대변인이기도 했고, 반대로 새로운 사회의 거울이 되고자 혁명적인 주장을 도입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내홍 속에서도 서로에게 등지지 않고, 최소한 함께 말씀을 듣고, 함께 하나의 떡과 잔을 마시며, 우리가 종내에 하나가 될 수 있으리라는 희망 속에서 교회를 지켜왔다. 그것은 우리 자신을 위해서, 우리 자신의 주장을 위해서 예배하고 신앙을 지킨 것이 아니라, 하느님 앞에서 동등하게 서서, 하느님께 예배드리는 삶을 지켜 왔기 때문이다. 이러한 예배의 경험 속에서, 쉽게 판단하고 정죄하기 보다는 서로에게 귀기울여서 지혜와 용기를 서로에게서 얻고자 했던 것이 최소한 성공회의 힘이었다. 이것이 이 분열과 파국적인 대결의 시기, 종내 누군가를 짓눌러 서보려는 승리주의의 시기에 대한 경종으로 성공회가 존재하는 작은 이유이기도 하다.

세상의 산재한 문제들을 두고, 필요한 곳에 손을 펼치는 것이 “하느님의 백성이 해야 할 일”(레이투르기아:전례)일텐데, 분명 이 논쟁 속에서 성공회는 이미 많은 것을 잃고 있다.

4 Responses to “세계 성공회의 미래 – 몇가지 시나리오, 그리고…”

  1. via media 주낙현 신부의 성공회 이야기 » Blog Archive » 세계 성공회의 논란의 자리들 - 관구게시판에서 Says:

    […] 성공회 관구 게시판에서 논란 끝에 쓴 글이다. 작년 가을 쯤엔가 세계성공회 논란에 대한 예상을 블로그에 올린 적이 있는데, 좀더 넓은 공간에서 나누려고 관구 […]

  2. via media 주낙현 신부의 성공회 이야기 » Blog Archive » 캔터베리 대주교, 성령 강림, 람베스 회의 Says:

    […] 여름에 열린다. 이 회의가 이미 벌어지는 교회의 분열을 멈출 수 있을까? 성공회 계약(the Anglican Covenant)은 그 분열의 치유책이 될까? 인간의 성(Human Sexuality)을 둘러싼 논쟁이, […]

  3. 민노씨 Says:

    아, 이 글을 읽으니 ‘성공회 계약’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되네요.

    “[윈저 보고서]가 제안한 [성공회 계약]이라는 것을 만들어서, 여기에 조인하는 교회만이 세계성공회의 구성원이 된다. 그리고 미국성공회와 캐나다 성공회는 개별 관구 교회 혹은 교구들과 온전한 친교(full communion)를 유지하게 된다.”

    “[윈저 보고서]의 최대 약점은 실제로는 상당히 기구적인 의미의 “일치”에만 중점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허구적이다. 성공회가 늘 주장하던 “다양성 속의 일치”라는 말 자체가 이미 기구적 일치를 넘어서고 있는 말이다. 게다가 기구적인 일치에만 집중하게 되면, 역설적으로 성공회 자체의 태생을 부정하게 된다. 종교개혁 당시 영국 교회는 영국민들의 교회가 되기 위해서 이러한 허구적인 일치, 나아가 권력 지배적인 일치를 깨뜨리고 한발짝 나갔다.”

    “일치는 바로 그 선교의 내용에 해석의 방법을 누구 하나가 독점하고 있지 않으며, 서로에게 귀기울이고 배우기 위한 방법으로 존재한다. 또한 여기에는 어떤 독점적인 해석의 방법이 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하느님의 포괄적인 선교에 매우 치명적인 해악이 될 수 있다는 걱정이 자리하고 있다. 일치는 그래서 이 선교 사명을 함께 나누고 함께 걷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어떤 확정된 듯이 보이는 교리 – 실은 모두 역사적인 산물이지만 – 를 수호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하느님의 선교를 그 테두리 안에 가둘 수도 없다.”

    이런 구절들이 인상적입니다…

    [Reply]

  4. via media 주낙현 신부의 성공회 이야기 » Blog Archive » 사순절에 받은 편지 하나 Says:

    […] 맞추어 똑바로 살라는 죽비로 들어야겠다. 서툴게 관구 홈페이지에 올린 글로 생겨난 논란을 옆에서 보고 안타까워 했노라고 위로도 전했다. 그러나 […]

Leave a Rep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