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성애와 성공회의 일치

한국 성공회 홈페이지 게시판에 올려져 있는 몇몇 세계성공회 소식을 접하고서 쓴 마음이 들어 긴 댓글을 달았다 (댓글이라야 소개된 기사에 대한 정정에 불과하지만, 어쨌든 그 댓글의 일부를 여기 밑에도 옮겨 놓는다). 미국에 오기 전까지 관구 홈페이지를 제작해서 운영하던 바였고, 한동안 한국성공회 신문에 세계성공회 관련 기사를 제공했었기에, 다른 분들이 올리는 소식에 귀가 가는 것은 당연하다. 예감했던 대로 작금 세계성공회의 기사는 모두 동성애 관련된 세계성공회의 일치 문제이다.

벌써 지난 이야기지만, 현재 진행형이기도 한 이야기이므로 배경을 되살려 보자면 이렇다. 2003년 미국성공회 관구 의회는 동부의 작은 교구인 뉴햄프셔에서 주교로 선출된 진 로빈슨 신부의 주교 인준을 통과시켜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그 까닭은 그가 처음으로 스스로를 동성애자로 공개한 주교 후보자였고, 파트너와 함께 살고 있었던 탓이었다. 공교롭게 그 자리에 방문객으로 참석한 차였고, 그 여파가 커서 연일 진행 과정을 취재하듯이 했고, 그 내용을 개인적인 성찰을 곁들어 서울 교구장 주교님께 긴 편지를 드리기도 했다.

물론 한국의 일반 언론이나 교계 언론에서도 이를 빠지지 않고 다루었다. 당시 기사로만 보면 특별히 문제 삼을 것 없는 것이었지만, 그 여파는 한국성공회 관구 홈페이지를 온갖 저주와 욕설과 정죄로 물들게 했다. 정통적 신앙인이라고 자처하는 근본주의자들의 욕지거리였다. 몇몇 중요하고 심도 있는 댓글들이 이어지긴 했지만, 성공회는 자체로 동성애 종교, 혹은 게이 종교로 낙인 찍히는 중이었다. 그 참에 이곳 학교에서 가르치시는 교수 신부님의 글을 번역해서 한국의 신부님들께 돌리기도 했고, 또 다른 신부님의 글과 자료로 이 문제를 신중하게 접근할 수 있도록 돕고자 했다. 급박한 우리네 관심사가 아니었거나, 신부님들이 속으로만 깊이 삭이시느라 그랬는지 특별한 반응을 접한 적이 없었다.

한국 성공회 신문의 세계성공회 기사를 내내 쓰고 있던 차여서, 이와 관련한 소식을 몇 차례 올렸다. 그리고 로완 윌리암스 캔터베리 대주교는 람베스 특별 위원회를 조직해서 동성애와 관련된 논란 속에서 “세계성공회의 공동체의 일치”를 어떻게 지켜내며 강화할 것인지를 연구하게 했다. 그 결과 이른바 [윈저 보고서]가 나왔다. [윈저 보고서]에 대한 기사를 끝으로 세계성공회 기사 송고를 그만 두었다. [윈저 보고서]와 캔터베리 대주교의 말씀대로, 이것을 어떤 대화와 숙고의 시작으로 보아야 하겠기에 다른 기사를 제공하는 것이 자칫 빈 논란을 증폭시킬까 하는 우려 때문이었다. 다만 지금은 닫아버린 질문과 답변란에서 몇차례 이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이후 이와 관련된 캔터베리 대주교님의 대림절 사목 서신을 성공회 신문에 소개했다. 다행히 [윈저 보고서]는 우리 말로 번역되어 이미 우리 신부님들이 모두 읽으셨으리라 생각한다.

그 전후에 많은 일들이 계속 진행되었다. 세계성공회 관구장 회의를 비롯하여, 미국성공회 내의 분열 조짐과 몇몇 교회들의 성공회 탈퇴, 나이지리아 아키놀라 대주교의 미국성공회를 향한 맹렬한 비난, 성공회 내 보수파들을 중심으로 한 “글로벌 사우스”의 결성, 영국 의회의 동성애자의 시민적 결합 인정에 따른 영국 성공회의 미온적 반응, 그리고 이에 대한 나이지리아 대주교의 영국 성공회 비판과 캔터베리 대주교와의 관련을 나이지라 성공회 교회 헌장에서 삭제한 일 등… 그리고 가까이는 이러한 격렬한 논쟁 가운데 내가 머물고 있는 캘리포니아 교구 (샌프란시스코 베이 지역)의 주교 선출 위원회는 7명의 주교 후보자를 발표했다. 그 가운데 3명이 동성애자여서 또 다른 동성애자 주교의 선출 가능성을 맞고 있다.

쉽지 않은 논란이요, 신학적, 신앙적 문제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인간의 삶 자체에 대한 문제이기도 하다. 이곳 신학교의 성직 후보자 가운데 적지 않은 이들이 동성애자이거나 동성애 관계에 살고 있고, 우리 가족도 신학교 아파트에서 이들과 이웃하며 살고 있다. 신학적 대화뿐만 아니라, 그들의 삶과 신앙적 고민과, 또한 사목자로서의 비전에 대해서도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으며, 여전히 그러고 있다. 최소한 이 문제에 대해서 나는 이들과 대화를 중지하지 않으면서, 그들의 삶과 더불어 식별하고자 한다. 그들의 깊은 신앙과 성실한 삶, 하느님을 향한 깊은 사랑과 교회 공동체에 대한 소명과 헌신을 옆에서 목격하고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복잡한 정황과 대화의 진행, 그리고 삶의 경험들을 고려하는 가운데 이 문제들이 언급되었으면 좋겠다. 몇몇 선정적인 어투가 우리의 관심을 낚을 수도 있겠고, 해석 상의 아전인수가 우리를 명백해 보이는 결론으로 인도할 것 처럼 보이지만, 말 그대로 낚이거나 “의도된 오해”에 놀아나는 일이기 쉽다.

아래의 글은 한국 성공회 게시판에 이미 붙여놓았으나, 이전에 실었던 소식들과의 연관 속에서 이 사태를 이해했으면 하는 바람으로 이런 상황 설명과 다시 싣는다. 최근 영국성공회 더럼 교구 톰 라이트 주교님의 신문 기고글과 역시 영국 엑스터 교구의 마이클 랭그리쉬 주교님이 미국성공회 주교회의에서 행한 연설에 대해서 한국 성공회 관구 홈페이지에 소개 기사가 나와서 몇 가지를 바로 잡으려고 붙인 댓글이다.

원문 링크 1: Why Dr Williams must stand firm By Tom Wright
원문 링크 2: The Speech delivered to the Epicopal House of Bishops by Michael Langrish
1.
다만 몇 가지 짚고 넘어갈 부분이 있어서, “공동체”라는 필명으로 올리는 기사에 대해서 말씀을 드립니다. “공동체”님은 최근 세계성공회에서 논란이 되는 “동성애 주교의 인준과 서품” 그리고 “동성애 관계의 축복”문제로 야기된 세계성공회의 분열 문제에 관련하여 영국 성공회 두 분의 주교님의 말씀과 글에 대해서 기사 형식으로 게시판에 올리셨습니다. 그러나 이 게시물들은 “공동체”님의 자의적인 선택에 따라 원래 글의 사실과 의도를 왜곡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간단한 예로, 게시물 제목의 부적절함 혹은 잘못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영국 성공회 더럼 교구의 톰 라이트 주교님은, 게시물에서 인용부호로 처리된 “미국 주교들은 람베스 회의에 초대되지 말아야” 라는 말을 한 적이 없습니다. 읽기에 따라서 그런 “해석”은 가능할는지 몰라도, 인용 처리될 말은 아닙니다. 다만 톰 라이트 주교님은 재작년 말에 나온 [윈저 보고서]의 권유 사항 가운데 하나로 진 로빈슨 주교님의 축성에 참여한 “주교들이 세계성공회 안에서 대표로서의 신분을 철회해야 할 것을 고민하길 바란다”는 내용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그런 다음 톰 라이트 주교님은, 이 문제를 둘러싼 당사자들의 태도에서 살펴본 “논리”나 이를 처리하려고 지금까지 벌여온 “과정”의 기준으로 살펴보건대, 다음 번 람베스 회의가 모든 주교들을 “조건 없이 초대”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기가 어렵지 않겠는가 하는 의구심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런 다음 라이트 주교님은 이 “논리”와 “과정”의 경험에서 보자면, 역시 윈저 보고서]에서 아프리카 및 동남아시아의 보수적인 주교들에 대해서도 요구한 내용을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즉 아프리카 및 동남 아시아의 보수적인 주교들이 성공회의 교구 자치권을 훼손하면서 주교를 세우거나 교회를 세워 치리하는 것을 철회해야 할 것을 상기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나이지리아의 아키놀라 대주교의 최근 성명서나, 이런 입장에서 나온 최근 이러한 주교들에 의한 부적절한 성직 서품 등은 세계성공회를 분열시키려는 “의도적인 오해”에서 나온 처신이라고 비판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톰 라이트 주교님은 현재 세계성공회에서 논란이 되는 문제를 [윈저 보고서]의 권고를 따라 캔터베리 대주교에게 힘을 실어 처리할 수 있도록 촉구하는 것이며, 이 말은 “논리”와 “과정”의 기준에서 보건대, 미국/캐나다 성공회의 주교들과 마찬가지로, 아프리카/동남아시아 성공회의 주교들에게 “조건 없는 초대”를 적용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또한 이러한 말이 “공동체”님의 말씀처럼 “미국성공회에 대한 공격”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공격”과 현실적인 난점에 따른 캔터베리 대주교님의 결단을 “촉구”하는 것이 같을 수는 없습니다.

2.
며칠 전에 “공동체”님께서 올리신 영국성공회 엑스터 교구 마이클 랭그리쉬 주교님의 연설과 관련된 게시물도 비슷한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여러 신문들이 미국성공회 주교회의에서 행한 랭그리쉬 주교님의 연설을 두고 “경고”라는 표현을 써서 보도했지만, 우리 말에서 느끼는 어떤 위압적인 의미와는 사뭇 다르다는 느낌입니다. “우려”라는 표현이 실제로 두 교회의 대등한 관계에서도 맞고, 이 문제를 안고 씨름하고 있는 동료 주교들에 대한 언사로서도 맞는 표현이겠습니다.

게다가 “공동체”님이 인용하신 내용은 물론 세계성공회의 분열이라는 어떤 위협적인 결과를 예상할 때 핵심적인 말이긴 하지만, 이 분의 전체 연설의 요지를 담아내고 있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세계성공회의 분열에 대해서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지만, 이것은 지난 2003년 이후로 전혀 새로운 일이 아닙니다. 최근 캔터베리 대주교님의 영국 가디언지와의 인터뷰에서도 언론은 “세계성공회 분열 경고”로 제목을 뽑았지만, 캔터베리 대주교님의 관심은 이러한 치명적인 분열을 막기 위해 지속적인 대화와 인내가 필요하다는 것을 더욱 힘주어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점에서 랭그리쉬 주교님의 말씀은 그 긴 내용만큼이나 매우 복잡하고 사려 깊은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즉 미국 교회가 자주 인용하는 “상황”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과 주장이 자칫 상대주의적 가치로 전락하여 어떤 것도 해결하지 못하는 취약할 것일 수도 있다는 지적과 더불어, 이러한 인식과 주장, 그리고 행동의 여파가 역시 다른 “상황”에 놓여 있는 이들에게 끼치는 맥락도 살펴야 한다는 주문이 선행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미국성공회가 [윈저 보고서]의 요구대로 미국성공회가 ‘유감’을 표명한 것이 실제로 ‘이 일은 유감이지만… 나로서도 이유가 있었다’는 정도가 아니라, 하나의 ‘회개’로 논의될 만한 강력한 것이어야 하며, 이는 어떤 정죄나 공포감의 분위기에서가 아니라 치유와 사랑이라는 의미에서 진행되는 것이어야 한다고 피력했습니다.

3.
아울러 랭그리스 주교님은 세계성공회의 분열과 관련된 가장 큰 문제 두 가지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 하나는 1998년 람베스 회의에서 내 놓은 인간의 성에 대한 결의안 1조10항, 다시 말해 동성애자 간의 결합은 성서에 비추어 인정할 수 없으나, 교회의 완전한 구성원으로서 이들에 대한 사목적 배려와 환대, 그리고 이들을 향한 비이성적인 공포와 차별을 비판한다는 주장에 대해서 다양한 의견이 존재하는 사실, 그리고 이 인간의 성문제는 이 결의안보다 훨씬 더 복잡하다는 사실입니다. 그 두 번째는 [윈저 보고서]의 권고가 어느 쪽도 만족시키지 못하지는 처지이지만, 세계 성공회의 친교와 공동체성을 강화해야 하는 이상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공동체”님께서 인용하시는 세계성공회의 분열 문제와 관련된 내용이 나옵니다. 이를 다시 옮겨 보면,

“내가 보기에, 미국 성공회가 처리해야 할 있는 가장 중요한 도전 가운데 하나는 람베스 결의안1항 10조와 관련하여 다양한 의견을 용인하면서도, 윈저 보고서가 말하는 좀더 강력하고 가능한 세계 성공회의 공동체성의 비전을 만드는데 확고한 신념을 가진 분들이 여러분 중에 얼마나 있느냐는 것입니다. 내가 보기에, 이 문제는 미국성공회가 세계성공회에서 퇴출을 당하느냐 혹은 자진 탈퇴할 것이냐 하는 문제 – 이것은 별 도움이 안되는 질문입니다만 – 보다 더욱 중요한 질문입니다. 분명히 하건대, 어느 누구도 다른 관구나 교구에게 나가라 마라를 강요할 수 없습니다. 세계성공회는 그러한 교회가 아닙니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어느 교구나 관구도 자신들이 원하는 방식대로 성공회에 남아 있겠다고 주장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약속이 있어야 합니다. 공동체의 생활에서 함께 나눌 수 있는 비전이 없는 공동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 적어도 내가 이해하고 있는 윈저 보고서입니다.

내가 알고 있는 세계성공회의 다른 지역 교회들의 말을 들어보면서 생각하는 것은 이렇습니다. 또다시 동성애 관계에 있는 사람을 성품하거나, 동성애 관계의 축복을 인가하거나, 윈저 보고서를 적극적으로 따르지 않겠다는 의도를 드러내는 것은 현재 있는 그대로의 세계 성공회, 혹은 윈저 리포트가 특별히 A장과 B장에 분명하게 규정한 비전의 세계 성공회와 함께 하지 않겠노라는 선언으로 읽힐 것입니다. 이 말과 함께 나는 이번 주교회의를 통해서 전반적으로 세계 성공회 안에서의 공동 생활에 대한 열망과 이 문제와 연관된 다른 사람들과 지속적으로 관련을 갖겠다는 의지를 들었습니다.”

4.
여기서 랭그리쉬 주교님은 톰 라이트 주교님과 마찬가지로 [윈저 보고서]에 충실할 것을 촉구하면서, [윈저 보고서]가 세계 성공회를 가름하는 중요한 기준이 될 것이라는 것을 명시하고, 아울러 이 전망을 깨뜨리는 이들은 미국성공회이든 아니면 다른 나라 성공회이든 교회 분열의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고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랭그리쉬 주교님은 미국성공회 주교회의가 자신의 우려와는 달리 공동체에 대한 열망을 확인하는 자리였다고 덧붙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외교적 수사일까요?

실제로, 긴 연설문 속에서 랭그리쉬 주교님은 쉬운 결정이 만들어지지는 않을 것이며, 람베스 회의를 전체적으로 준비하는 과정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아울러 교회사의 경험 가운데서 예언자적인 행동 때문에 불가피하게 갈라졌던 일들을 언급하면서, 당면 과제가 이러한 예언자적 행동과 더불어 세계성공회의 공동체를 어떻게 유지하느냐 하는 이중적 문제인 것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5.
어떤 점에서 보면 톰 라이트 주교님의 글과 마이클 랭그리쉬 주교님의 연설은 로완 윌리암스캔터베리 대주교님의 기존 견해와 크게 다를 바 없어 보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동성애 문제에 관하여 미국성공회를 정죄하는 글이거나, “경고”하는 것으로도 읽히지 않습니다. (물론 사람마다 다 달리 읽을 수 있겠습니다만). 결과적으로는 아무런 소득이 없지만, 이 논의 과정 속에서 좀더 서로에 대해서, 그 처지들에 대해서 깊은 이해와 대화로 초대하는 것으로 들립니다.

물론 저는 몇 가지 점에서 라이트 주교님과 랭그리쉬 주교님에게 동의하지 않습니다. 특별히 라이트 주교님께서 람베스 회의에 대한 “조건 없는 초대”를 비판하는 부분은, 세계성공회의 형성과 람베스 회의가 시작된 역사적 동기와 발전에 비추어서도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세계성공회는 지금까지 한번도 어떤 일치된 의견과 정책을 마련한 적이 없으며, 람베스 회의는 그런 가운데서도 상호 이해의 증진, 그리고 복음적 가치를 통해서 서로 연대할 수 있는 상호 의존적인 연대의 틀을 만들기 위한 것이지, 생각이 다르다고 누구를 배제하거나 제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랭그리쉬 주교님의 고민은 매우 복잡합니다만, 미국/캐나다 성공회와 구별하여 세계 성공회의 나머지 교회들과 너무 손쉽게 대척점을 만들고 있다는 느낌입니다. 미국 내에서뿐만 아니라 각 나라 성공회, 관구마다 교구마다, 그리고 교회마다, 신자마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서로 다른 신학적 성찰과 의견을 가지고 있으며, 이것들을 염두 하지 않고서 각 관구나 교구의 ‘탈퇴’로 비쳐지네 아니네 하며 쉽게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랭그리쉬 주교님께서 그 연설 말미에 던져주신 성찰의 과제들이 더욱 마음에 와 닿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을 온전히 유지하기 위한 주교직의 역할에 대한 강조와 더불어, 랭그리쉬 주교님은 야곱이 천사와 씨름한 내용을 소개하면서, 하느님을 대면하기 위한 우리의 씨름은 계속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것이 결국 야곱의 몸이 부수어서 영원한 불구로 만들었을지라도 말입니다. 랭그리쉬 주교님은 미국성공회 주교회의에서 카트리나 재해에 대한 교회의 대응과 재건 활동에 대해서 소개한 던컨 그레이 주교님의 말씀을 다시 소개하면서 그의 연설을 맺습니다. “ ‘우리는 (카트리나 재해를 통해서) 부서짐에 대해서 새로운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집과 벽들이 모두 부서져 내려앉더라도, 하느님의 은총은 다시 모두를 붙여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세계 성공회의 상황과 그 미래에 대한 희망 속에서 나는 이 말씀에 ‘아멘’으로 대답하고 싶습니다.”

세계성공회 소식을 약 4년여 동안 올리면서, 많은 배움이 있었거니와 많은 도전도 있었습니다. 전혀 다른 생각과 현실, 그리고 교회의 활동이 혼란스럽게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 도전들을 숙고하고, 그 안에서 얻은 문제와 깨달음을 가지고 분투하는 동안 내 자신이 변화되는 것 또한 느꼈고 이를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누군가가 말했듯이 신앙은 고통을 없애주는 것이 아니라, 신앙은 고통을 견디며 함께 살아가는 길이라고 했습니다. 현재 당면하고 있는 세계성공회의 문제에도 이런 신앙의 시각은 유효하다고 생각합니다.

One Response to “동성애와 성공회의 일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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