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성공회 논란의 자리들 – 동성애 문제 논쟁에 대해 관구 게시판에서 나눈 논의

한국 성공회 관구 게시판에서 논란 끝에 쓴 글이다. 작년 가을 쯤엔가 세계성공회 논란에 대한 예상을 블로그에 올린 적이 있는데, 좀더 넓은 공간에서 나누려고 관구 게시판에 글을 올렸다가 갖은 봉변을 당했다. 블로그에는 아무런 반응을 안보이다가, 익명이 가능해서인지 게시판에는 벌떼처럼 몰려들었다. 태도 바른 반박도 있었으니, 아래는 그에 대한 해명을 겸해서 올린 글이다. 관구 게시판에 전개된 질문과 비판들을 다 여기에 옮길까 생각했으나, 번거롭기도 하고, 그 나마 긴 이 글을 읽는데도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아 생략했다. 다만, 여기서 그 비판과 질문들을 요약하면서 답했으니 그걸로 족하리라 본다.)

+ 주님의 평화

주낙현 신부입니다. 한국에 계신 모든 성공회 신자들 그리고 수도자들, 성직자들께 평화의 인사를 전합니다. 제가 이곳 게시판에 글을 올린 이후로 많은 분들이 여러가지 관심과 더불어 염려를 표현해 주셨습니다. 어떤 분은 격려도 해주셨습니다. 모든 관심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게시물 제목은 아마 “최근 세계성공회에 관련된 주낙현 신부의 게시물과 그 논란의 자리들”이라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만.)

당부의 말씀…

제 생각을 나누기 전에 여기서 잠깐 당부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제 글을 끝까지 읽지 않으시고, 그저 몇가지 주장으로 자신의 생각을 덧칠하려는 분이 있다면, 아래 내용을 읽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그것은 당사자 개인에게도 귀중한 시간을 낭비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자신과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신앙인으로서 바람직하지 않은 말을 내뱉음으로써 자신의 영을 추하게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고민스러운 내용과 글을 어렵게 나누고자 하는 처지에서 나온 글에 대한 이런 비방들은 그 주장을 정당하게 하기 보다는 교회 전반에 대한 혐오감을 일으킬 것이 분명합니다. 이런 태도는 교회에 도움이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서로 바쁜 처지에 어떤 정신적 노동과 수고를 강제할 생각도 없습니다.

익명성으로 가려진 공간에서는 신앙인이라면 스스로를 더욱더 삼가는 일이 덕이겠습니다. 솔직히 저만 무대의 스포트라이트을 받으면서 무대 밖의 어둠으로부터 화살을 맞는 느낌도 들었습니다. 스스로 제어할 수 없는 처지라면 오히려 실명을 밝히시고, 교회에서의 위치를 밝히면서 자신의 주장을 하는 것이 자신의 영을 건강하게 붙잡는 좋은 방법입니다. 이것은 논쟁을 하는 사람으로서의 요구가 아니라, 한 명의 사목자로서 몇몇 신앙인에게 드리는 권면입니다.

마지막으로, 몇몇 신자들이나 동료 성직자들께 부탁드립니다. 여러분의 생각으로 남을 윽박지르는 일을 삼가했으면 좋겠습니다. 저 자신이 글을 쓰면서 매우 엄격한 “자기 검열” 과정을 거치고 있습니다. 그것은 첫째로 기도요, 둘째로 제 자신에 대한 성찰이요, 세째로 신학 공부와 사목적인 경험을 통해서 여러분과 나누려는 하나의 열정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최소한 교회에 대한 책임있는 자로서 말을 하려고 합니다. 그것은 물론 성직을 통해서 교회 공동체가 제게 부여한 책임이고, 또 검증한 능력이기도 합니다. 여기에 잘못이 있다면 그에 상응한 절차로 제게 책임을 물으시면 됩니다. 그에 따라 저도 제 말에 책임을 지겠습니다.

다만, 한가지 제가 깊이 우려하는 것은 이러한 외부의 “윽박지름”이 우리 교회를 이끌어가야 할 분들 (신자, 성직자, 수도자 모두)에게 지나친 자기 검열을 무의식적으로 강요하리라는 점입니다. 이것은 크나큰 위험이자 손실입니다. 외부에서 강제된 이러한 검열은 결국 교회의 숨통을 죄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교회는 자기 듣기 좋은 말만 듣거나, 혹은 남들 듣기 좋은 말만 하는 친목 단체로 전락할 것입니다. 교회의 사제직과 예언자직의 균형을 위해서 신자들이 먼저 성직자들을 응원해 주십시오. 저는 최소한 이것이 다른 교회와는 달리 성공회가 우리 사회 속에서 살아있어야 할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여기까지만 읽으시고, 떠나실 분들은 제발 떠나시고, 나머지 역시 읽지 마시고, 여러분의 영의 건강에 도움이 되지 않는 말이나 행동을 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아래에 쓸 제 이야기가 그런 분들의 생각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할 것이며, 그럴 생각도 없습니다. 어쨌든 저도 이 글 이후에는 매우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이 관구 게시판에 다시 글을 올리지 않겠고, 제 블로그를 통해서만 말하겠습니다. 그리고 바라기는 컴퓨터 모니터에서 ‘스윽’하고 읽지 마시고, 전체를 헤아려 읽어주시든지 아니면 인쇄해서 읽으시기 바랍니다. 저도 다른 분들이 쓴 글을 따로 떼어내서 프린트해서 몇번이고 고쳐 읽었습니다.

아래의 내용은 답변이 늦어진 저간에 대한 사정을 변명하고, 몇가지 진지한 물음에 대한 제 나름의 성찰과 답변을 담고 있습니다. 그 내용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 교회 분열과 글러벌 사우스의 책임
  • “고백적 교회”에 대한 교회사적 이해와 성공회 전통
  • 세계성공회의 대응 방식의 문제
  • 동성애와 여성성직과의 관계
  • 동성애 자체에 대한 몇가지 생각들

늦어진 답변에 대한 변명

글을 올리게 된 것과 제 응답이 늦어진 것에 대해서 몇가지 변명이 있어야겠습니다. 사실 게시판에 올린 글을 쓴 시점은 명시한대로 지난 10월 중순경이었는데, 말씀드린 바와 같이 급변하는 세계성공회의 상황 속에서 빛바랜 소식일 수도 있는 것을 다시 꺼내든 까닭이 있습니다.

그것은 게시판에 올라오는 몇몇 세계성공회 소식들이 전체적인 논의의 구조나 신학적인 성찰의 틀을 통해 제공되기보다는 몇가지 일방적인 주장들이 그대로 옮겨진 상황에 대한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현재 진행되고 있는 논의를 “동성애”라는 하나의 신학적 논쟁의 사안으로 국한시키게 되면, 전체적인 논의의 초점이 흐려지고 맙니다. 특별히 한국의 그리스도교와 같이 몇가지 교단 전통에 의해서 틀지워진 신앙 행태가 지배하는 상황 속에서는, 이런 개별 사안에 대한 논란이 그리 생산적인 논쟁이 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분명히 고질적인 정죄와 욕지거리가 될 것을 우려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생각의 지평을 좀더 큰 “하느님의 선교”라는 것으로 돌려보자는 하나의 작은 제안을 냈던 것입니다. 그 제안이 어리숙한 구석이 많았다면 분명히 제 탓입니다. 저도 이 기회를 통해 좀더 깊이 기도하고 돌아서 살펴보겠습니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점은, 이상하게도 이러한 논지의 전환을 자꾸 되돌리려는 분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제 이야기는 “동성애”라는 개별 사안에 대한 내용이 아니었고, 세계성공회의 미래에 대한 몇가지 예측과 이런 예측 가운데서 생겨나는 근본적인 질문들을 나누고자 했던 것입니다. 시나리오는 시나리오일 뿐이며, 저 역시 현재의 어떤 방향에 대해서도 만족하고 있지 않습니다. 특별히 이런 것들이 몇몇 그룹의 단결과 배척의 논리로 진행되는 것에 대한 우려가 컸습니다. 이런 처지에 언어의 문제로, 또한 여러가지 정보원이 부족한 가운데, 외국에서 공부하는 처지에서 이런 문제들에 대해서 정리하고 신자들이나 성직자들과 생각을 나눌 수 있는 것이 하나의 ‘책임’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개별 사안에 대해 아직 확정된 어떤 주장을 하지 않고 있는데도, 논의의 전 과정을 하나의 문제로 환원시켜서 그 기준으로 판단하려는 것은 매우 왜곡된 독해이고, 불순한 의도로 밖에 볼 수 없습니다.

응답이 늦어지게 된 가장 직접적인 이유는, 제가 공부했던 이곳 성공회 신학교(CDSP)에서 성직자 및 신자들 계속 교육 차원에서 열린 신학 콘퍼런스인 “에피파니 웨스트”가 진행되는 시점이었기 때문입니다. “성공회 정신의 새로운 비전 찾기”라는 주제로 열린 이 컨퍼런스에는 현재 논란이 되고 있는 세계성공회의 분열에 대한 여러 입장들과 경험을 듣고 생각해보는 기회를 마련하고 있었습니다. (추후에 여기에 대해 설명한 기회가 있었으면 합니다만…) 게다가 저 자신이 “선교와 식민주의”라는 이름으로 한 강의를 준비하고 진행하는 처지였기 때문에 바쁘기도 했고, 컨퍼런스 전체의 논의 과정을 통해서 논의를 더욱 깊이 하고 이를 나누었으면 하는 바람이었던 것이지요.

그러나 계속되는 몇가지 댓글이나 대응들을 보고 잠깐 동안 이러한 낙관적인 생각을 접기도 했습니다. “우리 성공회는 이 정도 논의도 할 수 없는 곳인가 보다”하는 생각부터 “그냥 묻어두고 가면 좋은데 괜히 부스럼을 키우나?” “별 관심도 없고, 우리와도 관계가 없는 일인텐데 불필요하게 주의를 돌릴 필요가 있을까?”에 이르는 어떤 실망감과 자괴감이었습니다. 하지만 과연 우리 교회가 이 주제를 이 정도로 밖에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그릇인가에 대한 새로운 물음도 들었습니다. 여러 생각이 교차한 가운데, 논란을 야기한 것에 대한 도의적인 책임을 지는 방법으로 답변을 해보자고 결심하고는, 진지한 덧글을 골라내어 읽고 생각하기를 거듭했습니다. 제가 먼저 올린 글의 논지 – 특별히 “하느님의 선교에 바라본 교회의 선교 사명”에 따른 관점에서 본 – 에는 별 변화된 생각이 없기 때문에, 몇가지 질문에 대해서만 선택적으로 답변하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이 자리를 빌어서 그 이해의 다름과 관계없이 좋은 문제 제기를 해 주신 분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관구 게시판에 각각 “진리”과 “분석”이라는 별명(으로 글을 올리시고 문제제기하신 분은 동일한 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아니라면 밝혀 주세요!). 특별한 명시가 없는 한 이 분이 제기한 문제에 대해서 답변하는 것입니다.)

교회 분열과 글러벌 사우스의 헌장 개정

몇몇 관구와 교구들이 캔터베리 대주교와의 상통 관계에 대한 언급을 헌장에서 삭제한 것에 관련된 제 이해에 대한 비판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 이해는 무엇보다도 그런 행동의 시점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시도가 진행된 것은 캔터베리 대주교의 동성애에 대한 개인적인 신학적 이해와 더불어, 영국 의회가 영국 내 동성애자들, 그리고 그 커플들의 시민적 권리를 인정하는 안을 통과시키는 와중에서 나왔습니다. 지금까지 아무런 문제, 혹은 특별한 개정의 필요를 느낄 필요가 없는 마당에 나온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원래 있던 “캔터베리 대주교좌와의 상통 관계”를 삭제한 것은 분명하게 캔터베리 대주교에게 기존의 관계와는 다른 관계가 진행되라는 것을 암시하기에 충분합니다.

미국 성공회 안에서 이와 비슷한 일이 있었는데, 지금껏 여성사제직을 반대하고 있는 세 교구 가운데 하나인 산호아킨 교구가 미국성공회 소속임을 명시하는 내용을 교구 헌장에서 삭제하고 결국 교구 의회를 통해서 실제로 미국성공회를 탈퇴한 것과 맥이 같다고 할 것입니다. 물론 당사자 누구도 세계성공회, 특별히 캔터베리 대주교와의 상통을 단절할 의사가 없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왜 이런 시점에 이런 이야기가 나왔을까 하는 물음에 대한 제 이해는 이 그룹이 기본적으로 분열의 수순을 준비하고 있으며, 실제로 그 일을 실행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미국성공회를 세계성공회에서 축출하지 않으면 이 그룹들이 세계성공회를 나가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 아닙니까? 그때 당장 헌장이 문제가 될터인데 이를 이미 준비해 놓는 것이지요. 이런 이해는 매우 상식적인 이해이지, 님들이 말하는 것처럼 “흥미거리 위주의 보도에 의지한 것”이 아닙니다.

한국성공회의 헌장에 대한 질문입니다. 정확한 지적입니다. 그러나 한국성공회 헌장은 관구로 승격되면서 개정했습니다. 물론 기존에 있던 캔터베리 대주교와의 상통 – 그전까지는 한국 교회 자체가 캔터베리 대주교좌의 치리 아래 있었지만 – 언급을 삭제하고, 세계성공회와의 상통만을 언급했습니다. 이것은 관구 교회로서 출범하는 마당에 자기 독립성을 표현한 것으로 사료됩니니다. 그러나 캔터베리 대주교와의 상통으로 표현하지 않고 이 언급을 삭제한 것은 하나의 지나친 반응이 아니었나 하는 개인적인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고백적 교회”에 대한 교회사적 이해와 성공회 전통

[성공회 계약]이 어떤 형태가 될 지에 대해서 아직 분명하지 않다는 의견에 동감합니다. 우선 제 원래 글이 10월 중순에 씌여졌기에, 그 이후로 그 진행 과정에서 여러가지 일이 있었습니다. 이 과정 속에서 드러난 일 가운데 하나는, 이러한 성공회 계약 문서에 대한 이해가 성공회 내 보수 진영에서도 많이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실제로 영국성공회 내의 보수 그룹이 내놓은 [계약 문서]가 있었는데, 이에 대해서 영국성공회내 복음주의 계열의 좌장격인 더럼 교구의 톰 라이트 주교마저도 매우 비성서적이며, 성공회 전통과는 관계없는 매우 기괴한 문서라고 조목조목 비판한 바 있습니다.

문제는 ‘고백적 문서’ 혹은 ‘고백적 교회’와 관련된 것인데요. 성공회는 자신을 ‘고백적 교회’ 전통에 두지 않았다는 것이 제 이해입니다. 이때 ‘고백적 교회’라 함은 루터교나 장로교 일각이 만들어낸 세세한 교리적 사항에 대해서 언급한 문서로, 이에 대한 동의 여부를 두고 함께 할 수 있느냐 없느냐를 판단했던 배타적인 기준 설정에 따른 교회 전통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루터교가 만들어낸 교리 조약인 “협정서”(1580)이나 영국성공회 내 청교도(퓨리턴들)가 영국성공회와 의회를 장악한 후 만들어 낸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1646)과 같은 문서에 기반해서 세워지고 여전히 이에 따라 교단의 공식적 교리의 근거를 삼는 흐름을 말합니다.

그러니 이런 상황을 무시하고 우리가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의미의 고백, 신앙 고백을 덧붙여 용어를 일반화하면 오해의 여지가 생깁니다. 사전에 이런 설명을 하지 않아서 문제였다면, 제가 친절하지 않았던 것이 분명하나, 그 말의 맥락으로 보아서 성공회 신앙에 대한 기본적인 교육과 훈련을 받은 우리 성공회 신자들이라면 충분히 이해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어쨌든 이런 점에서 우리가 사용하는 – 특별히 람베스-시카고 4개 조항 – 에서 언급하는 신조(니케아신조, 사도신조)들은 “신조”라고 하는 것이지, 이를 “고백적 문서”의 범주에 포함시키지 않습니다. 영국성공회의 39개 신앙 조항 역시 ‘하나의 역사적인 문서’이지 이것을 두고 “고백적 문서”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영국성공회는 이 문서에 대한 서명을 강제한 적이 있었지만 이것이 광범위하게 확산되지도 않았고 이후에 폐지되었으며, 세계성공회 어느 관구 교회들도 이것을 성공회 신앙의 ‘고백 문서’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한국성공회는 이 문서의 ‘공식적’ 번역도 없습니다. 은퇴하신 정철범 주교님이 80년대 번역하신 적이 있고, 제 자신이 이를 고쳐 다시 번역해서 출판물에 실을 적이 있을 뿐입니다). 위에 언급한 ‘람베스-시카고 4개 조항’은 오히려 배타적인 교리 선언의 흐름과 정 반대되는 입장에서 ‘포괄적’인 교회 일치의 기준을 만들고자 했던 흐름에서 나온 것입니다. 또한 ‘고백적 교회’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듯이, 독일 나치 치하에서 “바르멘 신학 선언” 이후에 일어났던 “고백 교회” 운동과도 전혀 다른 맥락입니다. 일반적인 용어로 사용하는 고백과 제가 인용부호를 집어 넣어서 사용하는 ‘고백 문서’ 혹은 ‘고백적 교회’라고 부른 것도 그런 탓입니다.

그러나 현재 [성공회 계약] 문서를 만들고자 하는 것은 성공회가 가져왔던 이러한 ‘포괄적’ 접근이 아니라, 위에서 언급한 ‘배타적’ 접근 방법을 취하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성공회 전통과 부합하지 않고 오히려 “고백적 교회”이 연장선 상에 있다고 했던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제 “하느님의 선교의 빛에서 본 교회의 선교 사명”과 관련된 비판에서, “진리”님께서는 스스로 한 말의 꼬리를 무는 결론을 내고 있습니다. 자세히 읽어보면, 앞에서 하신 말씀을 뒤에서 그대로 다시 부정하고 있으니, 어떤 말이 진의인지 파악할 도리가 없습니다. 게다가 세계성공회의 분열과 관련해서 다시 기구적 일치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면서, “가장 적절한 분리 방법”으로서 [성공회 계약]을 들고 있습니다. 이 말은 결국 글로벌 사우스나 [성공회 계약]이 세계성공회의 분열을 가속화할 것이라는 제 생각을 인정하는 것이 아닙니까?

무엇보다도, “진리”님은 서구의 성공회들이 전통적인 교리를 깡그리 무시한다고 했는데, 이것은 지나친 일반화요 단순화입니다. 성공회가 4차 공의회까지 인정한다는 것에도 논란이 있는 부분이고, 앞서 람베스-4개조항은 그저 “니케아 신조”와 “사도신경”만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교리에 대하여 “예수의 신성과 원죄를 부정한다”고 판단하고 있는데, 이것은 자신의 특정한 신앙적 혹은 신학적 기준에 의한 일반화일 뿐입니다. 즉 신성과 원죄에 대한 가르침 등에 대한 새로운 연구와 해석이 있다는 것을 그저 부정적으로만 바라보고 있습니다. “원죄”에 대한 가르침은 사실 동방교회와 서방교회마저도 다른 게 아닙니까? 또, 같은 용어를 사용한다고 하더라도 이해하는 방식은 천양지차인 경우가 많습니다. 어쨌든 그 다음의 말에서도 내내 불필요한 연결이 계속 이어집니다. ‘진리’님과는 달리, 저는 어느 누가, 어떤 교회가 “성서를 오류 투성이의 책”이라고 보는지 알 수가 없거니와, 최소한 제가 지금까지 만난 성공회 성직자들, 학자들, 신자들에게서는 그렇개 주장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습니다.

교회의 선교와 일치와 관련된 문제에 대해서는 이미 제 블로그에 캔터베리 대주교님이 작년 로마 방문을 앞두고 인터뷰한 내용을 실은 바 있습니다. 제가 말하는 선교와 일치의 관계에 대해서는 최소한 그 인터뷰에 있는 캔터베리 대주교님의 이해와 같은 선상에 있을 뿐입니다.

세계성공회의 대응 방식의 문제

독립된 댓글로 ‘분석’님이 제기하신 교회 분열에 대한 이야기는 매우 중요한 문제제기를 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주장은 우선 동성애 찬반을 떠나서 “교회가 하나되기 위해 성사에 대한 일반적 동의가 필요하다”는 주장과, 동성애 지지자들의 이론이 성공회가 중요시했던 성서-전통-이성의 관계를 통한 신학 방식에 어긋난 근거로 자기 주장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이런 점에서 미국성공회는 성공회를 떠났다고 주장합니다. 여러가지 파생되는 문제들을 매우 분명하게 지적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매우 중요한 문제인 것만큼 오해가 많은 이야기들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자칫 이야기의 길을 놓치는 경우가 많이 생겨납니다.

첫째로, 성사에 대한 합의를 통해서 교회가 하나된다라는 말은 매우 새롭고 중요한 주장으로 들립니다. 실제로 어떤 맥락에서 캔터베리 대주교님이 성사를 근거로 해서 일반적 동의를 언급했다고 하시는 지 알 수 없습니다만, 여기서 여성 성직을 예로 든 것을 보아, 성공회가 전통적으로 이야기해 온 일곱가지 교회의 성사에 대한 것으로 우선 생각해 보겠습니다.

여성성직이 기본적으로 신품성사와 관련된 것이라면, 이 문제는 아직 성공회가 전혀 일치를 찾지 못하고 있는 문제입니다. 앞서 미국성공회에서 교구 차원에서 미국성공회를 떠나겠다고 결의한 산호아킨 교구의 경우, 여성 성직이 비성서적일 뿐만 아니라, 전통에서도 근거를 찾을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이미 미국성공회 관구 차원에서 이를 통과시킨지 오래됐고, 여성 성직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관구 헌장에 위배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몇몇 교구들은 자신들의 주장을 굽히지 않으며, 오히려 관구 내의 헌장 사항을 걸고 캔터베리 대주교에서 해석을 맡겨서, 이를 미국성공회에 권고하라고 함으로써, 관구의 자율적 권위를 침해할 만한 중대한 주장들을 하고 있습니다.

현재 세계성공회 전체 관구의 과반수가 조금 넘는 교회가 여성성직서품을 시행하고 있고, 나머지는 여전히 논의 중이거나 반대하고 있습니다. 또한 그 이유때문에 이미 관구별 성공회에서 이탈해 나간 사례가 있습니다. 미국뿐만 아니라 영국에서도 수백명의 남성 성직자들과 신자들이 영국성공회를 떠나서 천주교로 들어갔습니다. 이 문제는 님이 말씀하시는 것처럼 “서로 차이점을 인정하기로 하고 일단락”된 것이 아닙니다. 최소한 호주의 시드니 교구나 싱가폴 교구, 나이지라아 성공회의 입장에서 보면 여성성직을 허용한 한국성공회는 성서의 가르침을 위배하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매우 흥미롭게도 “동성애 논쟁으로 교회가 분열되지 않는다”고 하신 “분석”님의 주장은 매우 급진적으로 들립니다. 그런데 갑자기 여기서 다시 “교회의 뜻”을 언급하는 것을 보면, 기본적으로 전체 교회의 합의에 근거하지 않으면 어떤 유효한 성사도 불가능하다는, 다시 말해서 성사에 대한 합의가 없이는 교회의 일치가 가능하지 않다는 말이 됩니다. 동성애가 분열의 근거가 아니라면, 성사 자체가 문제일텐데, 어떻게 해서 캔터베리 대주교님을 비롯한 다른 관구 혹은 교구의 주교님들이 여성 성직을 인정하고 실시하면서 이런 말씀을 하시는지 (혹은 하셨다고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앞서 언급한 캔터베리 대주교님의 로마 방문 직전 인터뷰에서 확인한 바로는, 이것이 하나의 어려움을 될지 몰라도 이것을 무시하고 갈 수 있는 문제는 아니라고 못박았습니다. 다시 그분의 말씀을 들어보면 이렇습니다.

“영국 성공회가 여성 사제 서품을 결의했을 때, 수많은 일들이 진행되고 있었다고 봅니다. 그러나 여성 사제 서품은 우리가 그것이 유용하다고 생각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옳은 일이라고 생각했기에 결정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단지 남성에게만 있다고 생각할 때 잃어버리거나 희미해져버리는, ‘모든 세례받은 이들의 몸’을 드러내고 대변하는 사제직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내 신학적인 견해는 이런 확신에 근거합니다: 세례받은 여성이나 남성은 모두 같은 방식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관게를 맺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 결의를 한 것은 이런 인식이 가져다 줄 가치가 어떤 것인지를 알고 그것이 옳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며, 그것이 얼마나 어려울 것인지에 대해서는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럼 이런 어려움때문에 이것 그만 두어야 하느냐? 그렇지 않다고 봅니다. 이미 영국 성공회 안에서는 이에 대한 충분하고 깊은 신학적 논의가 마련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아, 천주교를 아프게 하려고 한 건 아니었어’ 하면서 돌아가는 것도 잘못이요, 또 그런게 천주교에 위로도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것은 “교회의 뜻”인데요, 이 때 교회가 누구를 말하는 것인가요? 성공회처럼 독립적인 관구를 이야기하는 것인가요? 아니면 교구 차원, 혹은 지역 교회 차원을 말하는 것인가요? 아니면 매우 최근에 부상하여 맹위를 떨치고 있는 “관구장 회의”를 말하는 것인가요? 아마도 그것은 세계성공회 전체를 일반적으로 말하는 것으로 들리는데, 실지로 여기서 그런 “성사의 일치”를 찾아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 이 논리대로라면 우선 여성 성직 자체만으로도 우리 성공회는 갈라서야 마땅한 교회인 것이지요. (여기서 “분석”님은 여성성직과 동성애 문제를 같은 맥락에서 이야기하시다가, 다른 댓글에서는 다시 이를 분리시켜서 말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어리둥절합니다만, 그 문제는 다시 뒤에 언급하겠습니다.)

둘째로, 이러한 신학적 논쟁, 특히 동성애에 관련된 논쟁을 다룰 때, 성공회 신학의 방법을 적절하게 사용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분석”님은 매우 성서-전통-이성의 관계를 통한 성공회 신학의 방법에 대해 명시하셨습니다. 매우 중요한 지적입니다. 그러나 “분석”님이 그것을 사용하는 방법은 전혀 그렇게 들리지 않습니다. 같은 용어는 사용하지만 그 말들의 관계나 용어 사용이 적절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또한 그리스도교 윤리가 이에 “근거한 조직신학에 바탕을 두는 것”이라고 말씀하시는데, 이 말은 성공회가 어떤 확정된 “조직신학”의 내용을 갖고 있는 것으로 들립니다.

잠시 에둘러서 가자면, 현재 조직신학이라고 불리는 신학의 한 분과는 교리학 혹은 교의학이라 불리거나(혹은 불렸거나), 이후 철학적 신학이나 조직신학으로 고쳐부른 역사가 있고, 최근에는 이를 “구성신학” (Constructive theology)이라고 불러야 한다는 주장까지 다채롭습니다. 문제는 이것이 “신학”인 이상 확정된 듯이 보이는 교리를 그저 반복하거나 재확인하는 것을 넘어서서, 이에 깃든 성서적 근거와 역사, 그리고 현대의 사고 방식 속에서 재조명하고 새로운 언어로 풀어내는 방법이라는데 있습니다. 이런 규정에서야 말로 “조직신학”은 성서-전통-이성의 관계에 근거한 하나의 신학이 되겠지요. 문제는 또 다른 데 있습니다. 도대체 어떤 기독교 윤리학자가 기독교 윤리가 “조직신학”에 근거한다는 말에 동의할지 의심스럽습니다.

“분석”님의 말 자체로 돌아가면 이렇습니다. 동성애 지지자들의 이론들이 “의학적 이론, 심리학적 이론, 사회학적 이론, 그리고 자신들의 경험”에 기대고 있을 뿐이지, 위의 “조직신학”에 기대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위의 다양한 학문들이 밝혀내는 것은 기본적으로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전통과 이성의 내용이 되지 않을까요? 이것을 무시하고 어떤 전통과 이성을 말할 수 있을지 의문스럽습니다. 이러한 문제들을 어떤 사안의 성서적 이해와 대립시키는 것은 앞서 말한 성공회의 신학 방법인 성서-전통-이성의 관계를 제대로 보고 있는지 의심스럽게 합니다.

이와 관련해서 한마디만 하고자 합니다. 최소한 그리스도교 신앙에서는 신앙이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이러한 인간의 이성적 사고의 지평을 넘어서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즉 인간의 이성을 포용하면서 넘어서는 것이지 이것을 부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지 않다면, 신앙은 내내 계몽주의자들이 비판했던 것과 같이 인간 이성의 한계 내에 존재하는 열등한 하나의 주장에 불과한 것이 됩니다. 이런 점에서 신앙 그리고 이것을 다루는 신학적 성찰은 반-이성, 반-논리가 아니라, 초-이성, 초-논리의 세계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이것이 성공회가 이성을 이해하는 방식입니다. 언젠가 저는 이런 점들때문에 성공회가 말하는 “이성”이란 계몽주의 혹은 근대주의에서 이해하는 “이성”으로 혼동될까봐, 아예 ‘신비적 이성’이라고 불러야 한다고도 말한 적이 있습니다. 물론 이 역시 이러한 광의의 “신비적 이성”의 한 부분인 근대적 이성의 결과, 현대적 학문의 결과들을 포괄하는 것이겠지요. (“성공회 신앙 이해의 역사적 문제들” [전례와 사목] 성공회 출판부)

다음으로, 영국 성공회 요크 대주교님의 입을 빌어 하신 말씀은 전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어떤 성서적 근거를 들지 못했다는 주장이 정말 센타무 주교님의 주장이라면, 저는 주교로서 그분의 신학적 독서 – 특히 성서신학 – 의 범위를 의심할 수 밖에 없습니다. “설득”의 문제라면 또 다릅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어느 누구도 성서를 근거로 이런 문제를 설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여성성직문제를 두고 우리는 현재 세계성공회 안에서 설득하고 있나요?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더 나아가 우리는 성공회 성직 자체의 유효성을 천주교에 설득하고 있나요? 설득당할 생각이 없는 사람에게는 “설득”이라는 단어가 아예 그들의 사전에는 없습니다.

성서가 그렇다면, 전통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전통을 들고 있는 것인지 몰라도, 성서와 전통을 이야기할 때의 “전통”이란 앞서 말한대로 구성적이며, 창조적인 것이지, 과거로부터 물려받은 고정된 것이 아닙니다. 게다가 성공회가 이해하는 전통은 삶의 결이 그러하듯이, 역사적 삶들의 축적으로서 수많은 결들이 엉켜있는 삶의 경험으로 봅니다. 성공회는 이러한 전통들 안에서 잊혀진 것들을 새로 발견하여 배우고, 이를 다시 적용함으로서 전통을 이어가고 세워나갑니다. 이런 복합성들을 단박에 풀어헤져서 한타래의 실로 엮어낼 수 있다는 주장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게 특별히 영국성공회 내에 끈질지게 살아남았던 청교도주의입니다. 최소한 성공회는 이러한 청교도주의의 전통을 배격하거니와, 저는 개인적으로 모든 성공회의 해악이 여기서 나온다고 봅니다. 많은 이들은 또한 한국 개신교의 뿌리가 좀더 완고한 형태의 미국식 청교도주의라는 것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한편, 성공회가 낳은 근대의 위대한 그리스도교 신앙 변증가인 C.S.루이스는 성서적 근거와 전통의 근거를 들어 여성 성직을 반대했습니다. 물론 돌아가신 양반이긴 합니다만, 그분의 논리대로라면 그분이 지금의 여성성직, 나아가 여성 주교직에 대한 현재의 성서와 전통 이해를 통해서 설득당할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동성애와 여성성직과의 관계

이미 앞서 ‘분석’님의 전개한 이야기의 앞뒤가 좀 어수선한 것을 지적한 바 있거니와, 그 다음 댓글에서는 사안을 더욱 더 명확하게 하기 위해서 아예 “여성 성직”은 죄와 관련된 사항이 아니어서 견딜만 한 것이고, “동성애”는 성서가 직접적으로 죄로 규정하고 있으니 전혀 타협이 있을 수 없는 상황이라고 말합니다. 결국 성서가 죄로 규정했느냐 아니냐는 것으로 모든 것을 판결하면 된다는 것이지요. 이런 주장에 저 또한 익숙합니다. 좀 더 나은 주장을 하시라고 도움을 드리자면, 여성의 문제와는 달리 성서가 동성애 문제를 긍정적으로 다룬 적이 없으니 판은 이미 끝난 것이라고 덧붙여야 할 것입니다. 사정이 이렇게 간단하다면 우선 우리가 할 일은 어서빨리 성서를 찾아 “죄의 목록”을 만들고 이를 각 교회 게시판마다 붙여 놓는 일이겠습니다. 특별히 이런 일을 할때는 몇가지 ‘동성애적 행위’를 죄로 규정한 맥락 근처에 열거되는 다른 여러 죄목들을 빠짐없이 기록해야 할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상론하지 않겠습니다만, 이렇게면 되면 이야기가 매우 쉬어집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럴 수 없다는데 있습니다.

우선 우리가 가진 고정관념에 따른 “동성애”의 기본 상이 왜곡되어 있거나 매우 제한적이라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동성애”하면 떠오르는 것은 “게이-바”의 여장 남자이거나, TV에 자주 등장하는 성전환수술자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이들의 ‘이상한 행위’에만 관심할 뿐, 이들의 ‘존재’에 대한 관심은 없습니다. 게다가 동성애자들을 전혀 만난 적도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처지에 성서의 몇가지 언급들(세어보면 신구약 6-7번의 언급)은 이런 생각을 매우 강고하게 합니다.

그러나 성서는 인간의 성정체성으로서 “동성애”와, 이와는 전혀 달리 행해질 수 있는 “동성 간의 성적 행위”를 구분하지 않고 있습니다. 오히려 “행위”에 대한 경험 안에서 이를 정죄하고 있습니다. 많은 성서학자들은 성서에서 죄라고 규정하는 “동성 간의 성적 행위”가 현대에 생각하는 성정체성에서 말하는 동성애와 그에 따른 동성애자 간 성관계와는 다르다고 말합니다. 특별히 성서에서 언급하는 것들 대부분은 동성에 대한 강제적인 성적 폭력이라든가, 종교 의례에 이용된 아동 혹은 성인 동성 간의 성적 착취를 암시한다는 해석이 더욱 대두되고 있습니다. 게다가 앞서 언급한 대로, 많은 의학적 연구들이나 사회학적 연구들은 동성애가 성정체성과 그에 따른 행동들이지, 어떤 불타는 욕망에 따른 일탈 행위가 아니라고 입을 모으고 있습니다. 이것은 고쳐질 수 있는 의학적 심리학적 질병이라는 규정이 이미 60년대에 폐기되었는데도, 여전히 여러 종교들은 이것을 질병으로 여기는데 주저하지 않습니다.

스스로를 복음주의자로 지칭하는 이들 가운데도 이에 대한 의견의 폭이 매우 넓고 다양합니다. 앞서 논란이 되는 성서 구절들에서도 매우 전향적인 해석을 합니다. 이른바 복음주의자들 사이에서도 해석과 판단이 구구하지만, 동성애라는 성 정체성 자체를 고쳐질 수 있는 질병으로 보는 사고를 적용하지 않는 분들이 많습니다. (이 구절들에 대한 상론은 매우 지리한 과정을 겪을 터이고, 아직 논쟁 중이며, 여러분들은 이미 다른 책들을 통해서 접할 수 있으리라 보아서 여기서는 생략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성애는 창조 이야기에서 비춰 본 남녀 간의 관계에 볼 때, 성관계는 이성 간에만 허락된 것이며, 동성애를 천성으로 인정하더라도 동성 간 행위 자체를 성서적으로 금지하거나 죄로 규정하고 있는 것이므로, 그리스도교 안에서는 이를 허용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자연스레 서로 다른 이해의 간극이 발생합니다. 동성애를 천성으로 인정한다면 그에 따른 행위도 천성에 부합하는 것이니 문제될 것이 없다는 주장이 있는 것이지요. (이 문단은 실수로 언급한 몇 사람의 이름을 삭제하고 고쳤습니다.)

여성 성직과 동성애 문제를 관련시키는 것도 이런 논의를 전제한 상황에서 나옵니다. 여성과 남성이 하느님께서 만들어주신 “성”이라면, 동성애도 그런 “성”이겠다는 것입니다. 여성이 독립된 성으로서 남성과도 어떤 차별도 없고, 교회의 성직이 남녀의 차이와 관계없이 주어질 수 있는 것이라면 (여기에는 앞서 언급한대로 의견이 불일치가 있습니다. 특별히 성서가 지시하는 것을 해석하는 문제에서 분명한 차이가 존재합니다.), 동성애자도 그것이 독립적인 성정체성인 이상 성직을 불허할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논리의 근처에 붙어 있는 복잡한 논쟁을 무시하는 바가 아닙니다만, 최소한 이것이 여성성직과 동성애자 성직 문제가 연결될 수 밖에 없는 논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즉 이것은 다시 성서를 어떻게 해석해서 어디까지 적용할까 하는 문제를 낳습니다.

이제 “분석”님이 저를 반박한 내용으로 돌아갑니다. 여성 성직은 교회에서 합의해준 바의 역사가 있고, 이에 대한 논쟁이 덜 심각하고, 논쟁의 차이점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순서를 거꾸로 해서 말씀드립니다. 마지막에 언급하신 논쟁의 차이점과 관련된 내용은 이미 앞서 말한 바 있으므로 재론하지 않겠습니다. 오히려 ‘분석’님이나 이에 반대한 그룹이 동성애 문제에 성서-전통-이성의 신학적 방법을 적용하지 않는다는 것이 드러납니다.

두번째로 언급하신, 심각성의 차이가 큰 것은 이 두 문제를 바라보는 시각이 차이인 것이고, 이것은 역시 앞서 말한 내용에서 서로 다른 논리들을 소개하면서 이미 설명한 바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한가지 문제만이 남습니다. 여성 성직 논란에서도 경험한 바와 같이 합의를 기다리면 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여성 성직은 세계성공회 전체의 합의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이 지점에서 “교회의 뜻”에 따라 행해졌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직 “교회의 뜻’에 따라 행해지지 않은 곳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무엇을 “교회의 뜻”으로 이해하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영국’ 성공회가 1993년에 여성성직을 통과시켰을 때, 이를 반대하는 분들이 이것을 “교회의 뜻”으로 여길지는 불분명합니다. 여성 주교 논의를 가지고 다시 내홍을 치르고 있는 ‘영국’ 성공회의 결론을 두고 어떤 것을 “교회의 뜻”으로 여길지 궁금합니다.

저는 ‘분석’님이 말씀하신 마지막 말씀에 동의합니다 – “결국, 이 문제는 결론에 대한 차이만이 문제가 아니라, 신학을 하는 방법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에서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다시 말하면 성서와 전통의 권위에 대한 이해에서 차이가 있다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어떤 점에서 현재 세계성공회의 위기는 동성애 문제가 전혀 아닙니다. 어떤 이들은 이것이 성서축자주의자와 성서에 대한 역사 비평적 해석의 차이에서 비롯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너무나 단순한 비교입니다. 제가 보기에 어느 누구도 성서축자주의를 고수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실제로는 성서에 대한 ‘선택적’ 축자주의를 선호하는 것이지요. 이런 선택적 축자주의를 넘어서는 방법이 바로 성공회가 발전시켰던 성서-전통-이성의 관계 방법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그것이 고통스럽지만 대화의 형태를 가지고 진행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우리는 이미 너무 많은 분열을 거듭해 왔습니다. 그런 와중에도 한 울타리를 지켜왔던 것이 성공회 전통이라고 봅니다. 물론 이에 대한 이해마저도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이 드러나고 있지만, 아직까지는 이 방법으로 가자고 저는 말합니다. 다시 이 지점에서 “성령님께서 뭐라고 하시는 지를 따라야 한다”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저도 전적으로 동의하고 여전히 성령님의 인도를 따르고자 합니다. 문제는 이런 말들 뒤에는 자신의 신학적 생각의 하나를 성령님의 이름으로 덧씌워서 그것이야말로 성령님이 말하는 것으로 여기는 의식 혹은 무의식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인간이기에, 그리고 분열된 세계, 분열된 교회 전통 안에서 살고 있기에 내내 진리의 파편만을 서로 쥐고 있을 뿐입니다. 그 파편을 진리 자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갈라지기보다는 서로 함께 모여 기도하고 대화해야 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성공회는 교리적인 논쟁이 가망 없는 일이라는 것을 알고 “예배의 삶”을 그토록 강조했던 것이기도 합니다. 예배는 서로 다른 이들이 함께 모여 기도하고 대화하는 시공간입니다.

참 긴 글이 되어버렸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댓글에 대답하지 않고, 이런 식으로 글을 쓴 것은 앞서 말한대로 전체적으로 읽고 생각하기 위한 것입니다. 읽는 이들을 위한 배려가 참 인색하다는 것도 인정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러나 다시 한번 부탁드립니다만, 이 글이 어떤 논쟁에서 누구를 편들고 말고 하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생각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런 문제가 없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현실은 현실입니다. 저는 현실을 좀더 지난한 대화와 신학적 성찰 속에서 생각하는 길을 찾자고 제안한 것에 불과합니다. 여기서 제 자신이 미숙한 것을 것을 스스로 통감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미숙하니 좀더 심화하고 발전시켜야 할 일이지, 윽박질러 멈출 일은 아니라고 봅니다.

여기까지 따라오신 분들의 관심에 다시한번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본의 아니게 적절하지 못한 언사들이 있어 여러분에게 상처를 주었다면 너그러이 용서해주십시오. 제가 부덕한 탓입니다.

다만, 이 자리에서 뜬금없이 한마디 부탁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 신부님들에 대해서 우리 신자들이 응원해주시고, 기도해주시라는 것입니다. 그분들이 여러분들의 신앙을 옹호해주는 말씀과 사목 뿐만 아니라, 여러분의 신앙에 도전하는 말씀도 할 수 있도록 기도하고 응원해 주십시오. 하느님의 영에 힘입어 거침없이 신이 나야 우리 신부님들의 잠재된 큰 능력이 드러나리라 생각합니다. 이런 도전과 고민 속에서 우리 신자들과 성직자들이 이루는 우리 교회는 큰 그릇이 될 것입니다. 우리 교회를 큰 그릇으로 만들어 주십시오. 그러니 여러분과 성직자 자신들이 하느님께서 던져 주시는 도전들에 늘 열려 있도록 해달라고 기도해주십시오. 제 자신의 가장 큰 기도 제목도 바로 그것입니다. 제 생각에 따라 판단하지 않고 하느님의 뜻에 열려있기를 간절히 거듭 기도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의 생각과 성찰도 이런 과정 속에서 제 나름대로 분투하고 듣기를 거듭하며 생각한 것들의 파편일 뿐입니다. 그 미숙함을 애틋하게 보시되, 정죄하지는 마시고, 함께 하느님의 길을 걸어가도록 기도해주십시오.

주님의 크신 사랑과 은총 안에서

주낙현 신부 합장

Leave a Rep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