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담이 된 중도, 비아 메디아?

대학 시절 아침마다 당대의 칼럼니스트 이영희나 정운영을 신문에서 먼저 찾았다면, 꼽아 읽는 실명 기자의 글은 역시 문화면의 고종석이었다. 유인물과 대자보의 격한 글들에 지칠 어간에, 문학을 다루면서 그 문학만큼이나 울림있는 비평의 글들을 생산해 내는 그 기자는 매주 읽는 하나의 작은 문학이었다. 정운영이 가고 이영희가 완전한 은퇴를 선언한 신문의 칼럼은 쓸쓸하게 보일 법하다. 그러나 고종석은 이들을 이어 새로운 시대와 소통하려는 새로운 칼럼리스트로 자리를 새롭게 다져왔다.

고종석 이야기를 하려는 건 아니고, 그가 최근에 쓴 “중도라는 농담”이라는 칼럼 때문에 떠올린 과거였다. “중도”(비아 메디아)를 표방한 이 블로그의 문패도 그렇거니와, 성공회의 전통을 이런 상투적인 말로 표현하다가 “뜨겁지도 차지도 않은 것”이라고, 게다가 그 역사적인 전통과는 관계없이 그저 “사이비” 혹은 “이단”이라고 불리고 마는 우리나라 교회 현실에서 자못 다시 생각하게 하는 바가 많은 글이다.

그는 중도를 이렇게 푼다.

“중도는 그것을 실천함으로써 지양하고자 하는 대립물의 차이가 벌어져 있을수록 뜻이 크다. 명도(明度)를 잣대로 삼은 ‘검정과 하양 사이의 중도’라든가, 색상환(色相環)의 자리를 기준으로 삼은 ‘초록과 빨강 사이의 중도’ 같은 것 말이다. 실상 이런 맥락의 중도는 인류사회의 윤리적 정치적 이상을 함축한다.

평등지상주의와 자유지상주의 사이의 중도, 민족허무주의와 민족지상주의 사이의 중도, 무정부주의와 경찰국가 사이의 중도, 성장제일주의와 분배제일주의 사이의 중도 따위가 그 예다. 이런 중도는, 극단주의자들의 ‘선명노선’보다 덜 매력적으로 보이게 마련이지만, 한 공동체의 쏠림을 막아 균형을 잡아주는 ‘덕(德)의 길’이라 할 만하다.”

이 덕의 길이 “농담”으로 전락한 사연은 대선을 앞둔 정치판이 앞다퉈 자기에게 전혀 어울리지도 않는 이런 중도라는 덕의 이미지를 덧입고 화사하게 보이려는 태도 때문이다. 한번도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던 중도가 이런 대접을 받는 일이 좋을 법하나 그렇지 못한 것은 거기에 진정성, 혹은 그에 합당한 행동거지가 보이지 않는 탓이다.

이런 지적을 교회에 빗대어 되돌아 보면, “중도”라는 말을 그 뜻에 맞게 책임있게 써야겠다는 생각이다. 성공회의 “중도” “중용”이야 사실 교회 역사적으로 로마 가톨릭과 급진적인 개신교의 갈등을 피하는 길의 선택이었다. 사실 이런 정치적 선택이 불필요한 대결보다는 화해와 일치에 초점을 둔 교회 전통을 세우게 했을 것이다. 리차드 후커(Richard Hooker)와 이후 존 헨리 뉴먼(John Henry Newman)을 통해서 성공회의 신학적 성향으로 자리매김한 이 덕목이 현재 세계성공회에서 고종석이 비평하는 정치적 화장술을 넘어서고 있는지는 회의적이다. 복음주의 성공회 신학자로 많은 독자를 거느리고 있는 알리스터 맥그래스(Alister McGrath)는 이 중도를 로마 가톨릭과 개신교의 사잇길이 아니라, 이제는 자유주의와 근본주의의 사잇길로서 복음주의라고 새롭게 규정해야 한다고도 주장한다. 그러나 이런 와중에도 여전히 놓치고 있는 것은 예수님이 걸으신 길, 그리고 그분이 함께 걸은 사람들에 대한 관심이 아닐까?

이 말의 교회사적 기원과 더불어, 이 말이 근거한, 그리하여 이 말의 의미를 키워나갈 복음적 의미의 중도에 대해서는 별로 생각한 바가 없는 듯하다. 언젠가 허튼 글에서 이 중도를 예수님이 걸으신 “경계 선상의 길”이라고 부르기로 했거니와, 어느 쪽에서도 환영받지 못하고 내쳐진 이들을 위한 공간, 그리고 그들과 함께 걸어가는 길로서 중도를 다시 돌아보자는 것이다. 이 길은 매우 위험스럽고도 단호한 길이기도 하겠다. 예수님은 자신을 시기하여 벼랑으로 밀쳐 떨어뜨리려는 이들을 단호히 제치고 그들 “한가운데를 지나서 자기의 갈 길을 가셨다” (루가 4:30). 여러 논란과 위기를 겪고 있는 성공회는 이런 예수님의 “한가운데 길”을 단호히 걸어가야 할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오늘날 그런 “한가운데 길”은 어떤 모습을 가질 것인가?

고종석의 마지막 말은 우리나라 정치 뿐만 아니라, 세계성공회의 논란에도 일침이 될만 하겠다.

“지금 근육을 움찔거리는 중도는 민낯(요즘 말로 ‘쌩얼’) 우익노선과 화장한 우익노선 사이의 중도다. 이들의 싸움이 소란스럽다 해서 이런 동질적 분파 사이의 중도에 ‘균형 한국’의 미래를 걸 수는 없다. 이름값을 하는 중도는 이 치우친 중도보다 훨씬 왼쪽으로 뻗어있을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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