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회 전례의 현실 I – 전례 행동들

올 1월 초에 이메일로 한국 성공회 전례의 현실과 의미들에 대해서 나눈 생각들의 토막을 좀더 넓게 나누고자 이제야 여기에 옮겨 본다. 메일을 주신 분의 허락을 받았으나, 이름을 밝히지 않는다. 첫번째 내용은 전례 상의 관습과 행동에 대한 다양한 질문과 그에 대한 내 생각을 거의 가감없이 그대로 옮긴 것이고, 두번째 내용은 메일 주신 분의 고민과 더불어서 전례의 의미와 기본에 관한 잡다한 생각을 적어 본 것이다. 두번째 글을 먼저 읽고, 첫번째 글로 돌아와 읽는 것도 좋겠다. 이 허튼 생각을 계기로 많은 분들이 소중한 경험과 통찰을 진전시켜 나갈 수 있기를 바란다. 이 자리를 빌어 소중한 질문을 주시고 생각을 나눠주신 분께 다시 한번 깊은 감사를 드린다.

+ 주님의 평화

** 교우님 안녕하세요? 여러가지 전례 행동 상의 고질적인 문제들을 지적해주셨습니다. 사실, 어떤 것이든 문제를 제기하고 열어 놓고 함께 생각하고 공부하면 쉽사리 풀릴 수 있는 문제일텐데 그런 이야기 자체가 안되는 것이 더 큰 문제이겠지요. 

우선, 질문하신 내용에 따라 제 생각을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Q: 질문, A: 답변)
 
Q 1
집전자와 전례봉사자가 행렬을 하고 제대 앞에 섰을 때, 행렬십자가, 향로, 촛대, 복음서 등 물건을 손에 든 봉사자는 제대에 절(목례)을 하지 않잖습니까? 그런데, 이 성당은 하는군요.

A 1
전례 봉사자들의 행동과 동작은 기본적으로 “상식”과 “자연스러움”을 기본으로 하면 된다고 봅니다. 십자가, 촛대, 복음서를 든 사람은 그 자세에서 예를 표하는 것이 어색하고 부자연스럽습니다. 게다가 촛불의 경우 위험하기도 하구요. 또한 이들은 한 개인의 전례 참여자라는 위치보다는 십자가, 촛불, 복음서 등과 같은 상징물들을 돋보이게 하는 것이 더 중요하기에, 그것이 움직일 필요는 없습니다. 향로도 그렇게 이해하면 되는데, 예를 표하기에 어색한 자세가 아니니 큰 문제는 없다고 봅니다.  다만 입당 시에 성물을 든 전례 봉사자들은 특별히 예를 표하는 행동을 않는다 정도로 정하면 혼란이 없겠지요. 

Q 2
매 주일 미사 때마다 초가 들어가는데, 성령축성기원 부분에서 복사가 초를 들고 제대 앞에 장궤하잖습니까? 성체, 성혈 거양 때, 마치 봉화불 치켜들듯 촛대를 올리네요. (저는 이런 예절은 듣도보도 못했습니다)

A 2
굳이 성찬기도때에 촛대가 제대 앞에 나와서 – 어떤 경우는 종과 함께 나오는 경우도 있는데 – 제대를 가로막는 행동이 자연스럽지도 않거니와 별로 의미있어 보이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성찬기도의 진행에 혼란을 주고, 어떤 특정한 순간 (축성 순간?)을 강조하는 행위로 보이는데, 이것은 성공회의 성찬례 이해와도 부합하지 않습니다. 특히 입당 순행 촛대는 기본적으로 “복음서” 혹은 “성서”라는 말씀의 빛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하기 때문에 이를 성찬기도에 들고 나와 사용하는 것도 그리 적절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각각의 독서 때에 촛대가 나와 양 옆으로 서는 것이 좋을 듯하고, 이 때 역시 치켜 들 필요없이, 성서를 비춘다는 정도에서 들면 될 것입니다. 사실 촛대 사용 등은 주위를 밝히기 위한 실용적 사용이 목적이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전례 행동에 의미를 과잉 부여했던 것을 알아야 합니다.
 
Q 3
성서 독서를 할 때, 성서나 미사 전례 성서를 펴서 읽는 게 아니라, 그 날 독서 부분만 프린트해서 표지에 끼워 읽고 있습니다. 복음서 봉독 때도 마찬가지인데 (성공회에서 즐겨 하는, 제대 앞 중앙에 나와 봉사자가 복음서를 받쳐 들고 읽는 방법), 저는 말씀의 전례의 핵심인 성서 봉독의 존엄성이라는 측면에서, 성서 또는 미사 전례 성서에서 읽어야 하는 것으로 배웠습니다. 이렇게 읽어도 되는 건지요?

A 3
교회의 처지에 따라서, 전례 독서용 성서가 없다면, 어쩔 수 없다는 생각입니다. 이를 마련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복음서를 읽을 때도 성서를 사용하지 않는다면 이는 매우 유감입니다.  실제로 주일 성찬례 독서용 복음서를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나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신약성서만 든 큰 성서로 대용할 수도 있겠습니다. 복음서를 “제대 앞 중앙”이라고 표현한 상황이 눈에 잘 들어오지 않습니다만, 신자들 가운데 가서 복음서를 읽는 전통은 정교회의 “베마”라는 성서 독서대의 전통에서 나왔습니다. 이에 비추어 보았을 때, 이는 제대 앞 중앙이기도 하지만, 실은 신자들 가운데라고 하는 것이 더 맞을 듯합니다. 그러니 복음서 독서자(부제 혹은 사제)가 회중의 한 가운데 나아가고, 모든 회중들은 복음서를 향해서 자세를 돌리는 것이 바람직하겠지요.
 
Q 4
신부님께서도 잘 아시겠습니다만, 대한성공회 안에서는 독서자의 훈련이 전혀 되어 있지 않고, 전혀 무관심합니다. 성서 독서를 할 때, 성서의 장절을 말해도 상관 없습니까? 저는 천주교 쪽에서 전례를 배운지라 (천주교 전례학과 성공회 전례학이 이런 부분까지 차이가 날 이유는 없을 겁니다만), 성서의 장절은 하느님의 말씀에 속하지 않으므로 (사람의 편의상 매겨 놓은 눈금일 뿐이죠), 말할 필요가 없다고 알고 있습니다. 다만 “창세기의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로의 로마서 말씀입니다” 하는게 좋다고 알고 있는데요.

A 4
독서자의 훈련은 분명히 그 교회의 문제입니다. 성직자의 전례에 대한 관심도 문제이고, 또한 그 차례를 맡게된 독사자의 책임도 큽니다. 오래된 독서 습관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현행 개정 기도서는 장절을 말하지 않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개정기도서의 지시만 따라도 될텐데요. 
 
Q 5
미사 때 대형 스크린에 파워포인트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교단 게시판에서도 말씀드렸듯이, 독서 때는, 하느님께 권한을 받아 말씀을 선포하는 독서자를 경건히 응시하고 듣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A 5
성공회처럼 그리 크지 않은 성당에서 프로젝트를 사용할 필요가 있는지 의아해 합니다. 전례 전체의 집중성을 분산시키는 이러한 일들이 아마도 “한국 개신교”의 매우 비전례적 전통에서 들어왔다는 것 자체가 모순인데요. 자기 예배 혹은 전례의 특성에 맞도록 그 맥락과 전반적인 일관성을 고려해야 한다고 봅니다. 게다가 전례 공간을 어떻게 만들어 내고 있는지를 살펴 볼 일입니다. 사실 프로젝트를 사용하는 것은 도움이 될 수도 있습니다. 시각에 문제가 있는 분들이나, 초신자들을 위해 필요한 안내를 주기 위해서 사용할 수 있다고 봅니다만, 이는 매우 제한적인 적용이 가능하리라 봅니다.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독서에만 경청하는 것을 선호합니다만, 굳이 성서의 내용을 펼쳐 읽는 것도 괜찮다고 봅니다. 그러나 그런 수고까지 덜어주기 위해서, 프로젝트를 이용하여 결과적으로 시선까지 돌리게 하는 배치는 과잉 서비스인데다, 그리 바람직하지도 않다고 봅니다. 
 
Q 6
오늘 성탄 대축일 미사 때, 행렬십자가 – 촛대 – 향 순서로 들어오더군요. 향이 선두에 서야 되는 것 아닌지요?

A 6
한국성공회에서 오랜동안 고쳐지지 않고 있는 관행입니다. 일견 이해할 수 있는 바는 한국성공회에서는 입당 순행 시에 향을 피워 입당하지 않기 때문이라고도 변명할 수 있습니다만, 순서가 어색한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니 입당 시에 향을 피워서 좌우 혹은 앞뒤로 흔들면서 십자가 앞에 오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봅니다.
 
Q 7
시편(화답송) 말미에, 영광송을 붙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마무리짓는 의미로서의 영광송이 들어올 자리가 아니라고 배웠습니다. (하워드 갤리, [성공회 예전 안내서], 1998, 선교교육원)

A 7
이것 역시 여러 관행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습니다. 제가 이해하는 바로는, 시편 말미에 ‘글로리아 파트리’를 붙이는 것은 수도원 성무일도의 시편 읽기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입니다. 한국성공회에는 사실 평신도들에 의해 진행되는 성무일도(아침기도와 저녁기도)가 널리 퍼져 있다가(이것도 수도원식으로 드리는 방법이었겠지요), 지난 몇 십년 사이에 급격히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이런 전통에서 시편 말미에 늘 “글로리아 파트리”를 넣게 된 것이라 보는 것이지요. 성무일도의 시편 읽기와 성찬례에서 시편 읽기의 차별성을 위해서라도 이를 붙이지 않는 것도 괜찮고, 전통적으로 있었던 “절기별 선후렴구’를 붙이는 것도 좋지만, 내내 문제는 관행과 이를 고치려하지 않는 문제, 그리고 성서 독서에서 시편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의 부재들이 이런 관심을 허튼 생각으로 몰아붙이게 하는 것 같습니다.
 
Q 8
성체, 성혈 거양 때 향 복사는 세 번씩 세 차례 분향하지 않나요? 두어번 하고 말더군요.

A 8
분향의 횟수에 대해서는 설들이 많거니와 다들 자기만의 이유가 있으니, 몇번이 맞다고 확답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게다가 집전자에 따라서 하도 동작을 빠르게 해서 세차례를 할 정도의 시간적인 여유가 없었던 것이 한 관행의 이유가 된 것인지도 모르구요. 어차피 제대 앞에서 성체 거양 시에 분향하는 행동 자체가 벽을 마주한 제대의 위치 선상에서 나왔다고 보기 때문에, 회중을 마주하는 제대로 위치가 변경된 상황에서 굳이 제대 앞을 가로막고 분향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그저 제대 한쪽에 서서 향로를 흔들면서 향을 피우면 그만이라는 생각입니다.
 
Q 9
신자들이 영성체하고 나서 다시 제대에 목례를 하는데요, 이미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모셨으므로 제대에 절할 필요가 없다고 알고 있습니다. 전례와 신심 생활에서의 예절은 마음을 담되, 번잡하지 않고 간결한 것이 좋겠으므로… (사실, 현행 대한성공회의 전례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개혁된 전례와, 그 이전 시대의 관습들이 어지럽게 혼재된 인상을 다분히 받습니다.)

A 9
아마도 이런 혼란은 제대 앞에 나갈 때마나, 혹은 제대를 지나칠 때마다 예를 표하는 관행에서 나왔다고 이해하는 것이 빠르다고 봅니다. 굳이 제 2차 바티칸 전례 개혁에 빗댈 필요가 없다고 봅니다. 다만 추천하기로는, 영성체를 하러 자리를 떠나서 통로 앞에 나왔을 때, 제대를 향해서 목례 한뒤, 영성체하고 조용히 제자리로 돌아오면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Q 10
이것은 성공회기도서 자체에 관한 의문인데요, 봉헌례 때 주례 사제가 헌금을 대상으로 기도를 하고 십자성호를 긋습니다. 그러나 봉헌례에서의 중심이 되는 예물은 빵과 물과 포도주가 아닌지요? 봉헌례가 성찬의 전례의 준비 과정이요, 인간의 노동을 하느님께서 주님의 몸과 피로 축성하신다는 신비와 은총이라는 측면에서도 그러하다고 봅니다만..

A 10
봉헌례의 예물은 빵(떡)과 포도주에만 한정된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드릴 수 있는 모든 것을 봉헌하는 것이지요. 요즘 세상에는 대체로 봉헌은 헌금으로 대치되고 말기에 “돈”을 두고 십자성호를 긋는 것이 이상하게 보입니다. 게다가 개정기도서는 이를 두고 “봉헌기도”라고 밝혀 놓고 있는데, 이는 전반적인 성찬례의 진행에 동떨어진 듯이 보입니다. 이것이 어떻게 해서 우리 기도서에 들어왔는지는 살펴볼 일입니다. 게다가 여기에 십자성호를 긋는 것은 ‘십자성호’의 남발로도 보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봉헌하는 이들의 마음에 대한 축복의 의미를 담게된 어떤 사목적인 이유에서 여기에 들어왔다고 추정합니다. 그런 점에서 이를 가차없이 없애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지요. 기도서 개정에 대한 아쉬움이기도 합니다만…
 
Q 11
영성체 때, 복사는 어떻게 해야 됩니까? 제가 출석하고 있는 성당을 비롯하여, 대한성공회 내의 대다수의 성당들이, 영성체 순서에서 복사가 그냥 자기 자리에 앉아 있습니다. 복사란 본래 시종직이 아닙니까? 주례 사제의 옆에 서서 전례를 돕는 봉사직인데, 그러한 의미가 대한성공회의 미사 전례 중에는 거의 퇴색되어 있지 않느냐는 생각입니다. 물론, 복사 서는 정해진 규정이 있는 것도 아니고, 개별 지역 및 본당마다 전례도 다를 것입니다만, 지금까지 교회 내에서 보편적으로 행해져 온 관습과 전통이 있는데, 대한성공회 안에서는 그러한 전례적 관습과 전통을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습니다.

A 11
우선, “시종직”이라는 표현은 그리 썩 좋은 표현은 아니고, 다만 “전례 봉사자”들이라고 하면 충분하리라 봅니다. 어떤 복사를 말하는지가 분명하지 않습니다만,  집전자를 돕는 복사를 말하신다면, 되도록 그가 제대 앞의 모든 집전 동작에서 집전자를 도울 수 있어야 하리라 봅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건 집전자의 선택이긴 합니다만, 그렇게 되면 자연스러운 집전 동작을 마련하기가 쉽지 않을텐데요. 성직자들의 이해와 의견이 제각각이고, 상황도 제각각이라 어떤 것이 옳다고 말씀드리긴 어렵습니다. 다만 이런 경우에는 앞서 말씀드린대로 ‘상식’과 ‘자연스러움’을 따르면 된다고 봅니다.

Q 12
오전 9시 미사에서, 미사통상문의 기도들, 즉 자비송, 대영광송 (둘 다 기원송가로 묶여 있습니다만), 신앙고백, 거룩하시도다, 하느님의 어린 양을 모조리 빼 버리시고 미사를 드리시더군요. 물론, 성공회기도서의 루브릭에는 몇몇 기도들은 빼도 된다고 지시하고 있습니다만, 저는 미사통상문의 이 기도들은 예배의 흐름의 핵심 뼈대라고 생각합니다만…

A 12
성찬례 전체 구조에서 지적하신 것들은 사람에 따라서 부수적인 것으로 보일 수도 있고, 필수적인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고 봅니다. 또한 그런 내용들이 역사적으로 성찬례의 구조에 부가된 것이라고 할 때 더욱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평일이 아닌 주일 미사인 경우에는 되도록 성찬례의 전체적인 구조와 내용을 따르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봅니다. 게다가 “거룩하시다”는 성찬기도와 일체된 내용인데 어떻게 뺄 수 있는지 의아합니다. ‘하느님의 어린양’의 경우 이른바 ‘fraction hymn’의 일종이니 다른 걸로 대치해도 좋고, 생략할 수 있다고 봅니다. 
 
Q 13
주일 예배에서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경 대신 사도신경을 바치는데, 주일 및 대축일에는 전자를 더 권장하지 않는지요? 우리나라 천주교 역시 그렇게 권장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본당들의 상황에서는 사도신경이 일반적인데, 일종의 편리성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만…

A 13
위의 질문과 더불어서, 신경의 문제는 각 교회가 선택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신경을 외우거나 읽을 때, 하지 아니함도 보다 못하게, 즉 너무 빨리 읽는다든지, 도대체 따라할 수 없는 곡조로 노래한다든지 하는 것은 썩 좋지 않다고 봅니다. 개인적인 의견입니다만, 신경을 노래로 하는 것도 적절하지 않다고 봅니다. 가능하면 천천히 일치된 음성으로 또박또박 읽는 것이 좋다고 봅니다. 사도신경은 역사적인 기원이 명확하지 않은 신경이나 이미 널리 인정되고 있는 것이니 니케아 신경을 대신해서 읽는 것도 가능하다고 봅니다. 다만 신경이 설교 다음에 올 때에, 설교의 내용을 충분히 성찰할 시간도 주지 않는채 조급증처럼 빨리 와서 설교의 내용을 흐뜨러트리는 관행이 먼저 조정되어야 하리라 생각합니다. 
 
Q 14
성탄 자정 미사 전의 구유 경배 예절은 반드시 지정된 것은 아닌가요? 빠져 버리니 아주 섭섭했습니다.

A 14
아직 이를 하나의 전통으로 지키는 교회도 있습니다만, 지정된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성탄 미사와 같은 미사를 누가 어떻게, 특별히 교인들과의 대화 속에서 준비하느냐 하는 것이겠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Q 15
대화를 진행하다가 미사보 쓰는 것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졌습니다. 과연 미사보가 전례의 영역에서 다룰 수 있는 차원인지요? 전례신학자들 및 [전례헌장] 등 현대 천주교의 전례 지침들은 다만 회중들은 경건하고 단정한 복장을 하기만을 권고할 뿐입니다.

A 15
저는 개인적으로 여성들이 미사보를 쓰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실제로 이것이 성서에 근거를 둔 성차별적인 요소를 담고 있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어떤 행위의 전통과 의미는 시간이 지나면서 변경되거니와, 이것이 말씀하신대로 “개인의 신심에서 비롯한” 것이라고 보기에, 개인의 판단에 맡길 뿐이지요. 

Q 16
이런 이야기를 주고 받았습니다. “개별 본당마다 전례를 비롯한 전통이 다를 수 있는데, 교우님처럼 지나치게 따질 필요가 있습니까?” 저는 여기에 “물론, 그 말씀은 옳습니다만, 교회 안에서 보편적으로 행해져 온 전례적 전통과 예절 및 그 의미는 충실히 알고 행해야 되지 않나요? 하신 말씀처럼 따지자면, 신학의 중요한 하위 분과인 전례학은 용도폐기되어야 합니다”

A 16
“보편적”이라는 말에는 여러가지 뜻이 있습니다. 부정적인 면도 있고, 긍정적인 면도 있는 것이지요. 교회의 역사는 이런 보편성이라는 이름 아래서 억압을 자행하기도 했고, 또 “자율성”이라는 이름 아래에서도 분열을 서슴치 않았습니다. 다만 그 의미들이 오늘 이 자리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우리가 행하는 전례 속에서 우리의 신앙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에 대해서 좀더 신중히 생각해야 한다고 봅니다. 전례학이 신학의 하위 분과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오히려 모든 신학의 총체가 아닐까요? 그래서 전례가 중요한 것이 아닐까요? 신학이 전례를 만드는가? 전례가 신학을 만드는가? 최소한 전례적 전통의 교회는 이른바 “lex orandi, lex credendi” (기도의 법이 곧 신앙의 법)이라는 경구를 통해서 전례와 신앙(신학)의 관계를 보고 있으니까요.
 
Q 17
전례주의자라고 평가받으시는 신부님들도 꽤 봤고, 전례를 중시한다고 자부하는 분들 역시 주위에 많습니다만, 저의 오해인지, 대한성공회 내의 일반적인 인식은, 전례를 단순한 형식과 예법 정도로 여기는 듯 합니다. (‘전례정신’이 부재하다면 지나친 말씀이겠습니까?) 이러한 정도의 인식이 깔린 위에서, 나름대로 미사 전례를 활기차게 만들어보기 위해 복음주의 개신교회들의 요소들을 별 검증과 고민 없이 흡수하지 않느냐는 생각이 듭니다.

A 17
전례에 대한 강조와 “의식주의”(ritualism)는 분명히 다르지요. 사실 저도 성공회가 전례적인 교회라고 하면서 전례에 대한 이해 없이 관습과 외적 행동거지에서만 그럴 듯하게 보일 뿐이라는 비판적인 견해에 동의합니다. 그것이 제가 전례학을 공부하게 된 이유이기도 하고요. 이런 전례에 대한 잘못된 혹은 얕은 인식에서 두 극단이 생깁니다. 전례를 보수해야 할 어떤 외형적 자산으로 보는 극단이 있는가 하면, 전례를 교회 성장의 걸림돌 – 최소한 한국 성공회 안에서는 – 로 보는 극단이지요. 둘다 전례에 대한 편견에서 비롯된 것이라 봅니다. 

Q 18
어느 성당 성당 2006년 사목지침서에 이렇게 적어 놓았더군요. “새 신자들의 부담과 거부감을 줄이기 위해,” “고교회에서 복음주의(저교회) 개신교적 예배로” “타 교파 개신교회들의 예배 수시 탐방.” 이것은 모순이라고 생각합니다. 전례 예절을 단지 관습 정도로 여겨 오고 깊은 연구가 뒤따르지 않은 지금까지의 상황을 ‘고교회’라 규정하고, 복음주의적 저교회 예배 모델로 고쳐나가겠다니요? 어떤 명확한 기준이 없는 채로 아예 비전례성을 표방하고 있는 개신교파들의 예배 요소들을 받아들인다? 전례적 전통과 현대 전례신학의 개혁적, 현대적 흐름을 충분히 수용하면서, 그러면서도 젊고 활기찬 취향의 요소들도 받아들이는 미사 전례를 만드는 일이 대한성공회에서는 안 되는 겁니까? 아예 그런 의식 자체가 없어 보입니다. (교회위원 어르신들께서 비록 신앙 생활을 오래 하셨지만, 신학과 전례라는 전문 영역에 있어서는 비전문가들입니다. 전문 영역에 대하여 교회의 장로님(!)들께서 전문위원회를 만들어 이끌고 있는 실정인데, 성공회의 평신도 민주적 장점이 모든 분야에서 능사는 아니잖습니까?)

A 18
지적하신 말씀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앞서 말한대로 이는 하나의 극단과 편견을 드러낼 뿐이지요. 게다가 “고교회 전통”을 현재 실행되는 어떤 모양으로 거칠게 일반화하고, “저교회”를 복음주의적, 그리고 개신교적 예배로 지칭한다는 것이 얕은 분석을 드러내는 우리 신학의 서글픈 현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현실에 대한 책임은 우선 저처럼 공부하는 사람에게 있겠고, 성직자들에게, 그런 다음 평신도들에게도 있다고 봅니다. 깊은 책임감을 느낍니다.

Q 19
대한성공회가 선교 초기에 선교사들이 물려 준 신앙 생활의 관습은 물려받았겠습니다만, 그것을 심화시키고 의미를 연구해 가는 일에는 좋은 평가를 하기 어렵겠습니다. 저 스스로 강변하려는 의도는 없습니다만, 적어도 저는 전례주의자, 율법주의자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형식, 즉 공시성과 통시성을 가지는 기호체계는 의미와 마음을 담는 그릇일진대, 향을 몇 번 치고 행렬의 순서가 어떻게 된다, 전례 동작과 예절의 통일, 교통 정리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획일성 내지 율법주의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교회 내의 예절의 형식들이 혼란하고 정확하지 않다는 것은, 그 예절의 형식들이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지도 정확하게 교육되지 않았다는 뜻일테니까요.

A 19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Q 20
위의 질문들 가운데, 주일 미사 전례의 예절들, 특히 복사 예절들에 오류 내지 부적당한 것들이 있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출석하는 성당의 관습을 따라 복사를 서야 됩니까? (저는 그렇게 하기가 정말 내키지 않습니다.) 물론, 어찌 되었건 하느님께 봉사하는 것이 더 좋겠고, 신부님 및 다른 복사들이랑 얘기해서 잘못된 점은 고쳐나가면 될 거라고 합니다만, 평신도인 제가 주제넘게 신부님께 이런 문제의 말씀을 꺼내기 참 어렵네요.

A 20
문제를 느낀다면 그런 문제를 계속해서 이야기를 하고, 공론화하는 과정이 필요하리라 봅니다. 다만 여기에는 지혜가 필요할텐데요. 신부님께 문의하면서 “부드럽게” 제안을 하는 지혜가 필요하겠지요. 전례에 대한 계획과 교육을 담당하는 “전례위원회”를 만들어도 좋겠고, 이에 대해 관심을 많은 이들과 함께 스터디 그룹을 운영하는 것도 좋겠지요. 이를 통해서 “타교파 개신교 예배 수시 탐방” 같은 것도 해서 의견을 나누되, 굳이 “개신교 예배”만 고집하지 말고, 천주교나, 루터교, 정교회 등 생각과 경험을 넓혀야 겠지요. 왜 “개신교  예배”로 한정짓는지 알 수 없군요. 한국의 개신교 예배는 기본적으로 미국 개신교라는 기원과, 그 안에서도 매우 전투적이고 배타적인 선교를 담당했던 몇몇 그룹들을 모태로 하고 있는 아주 협소한 이해의 산물일텐데요. 전례의 측면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요.

좋은 질문으로 생각과 고민을 나눠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선 생각나는대로 저도 답변을 시도해보았습니다. 저도 이 문제들로 인해 여러가지 고민하고 있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몇가지 프로젝트를 준비중입니다만, 그 통로를 만들어나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쉬운 대목입니다. 준비 중인 프로젝트를 가지고 다시 한번 연락드리지요. 새해에도 신앙이 깊어지고, 교회에 대한 사랑이 더욱 커지기를 바랍니다.

주낙현 신부 합장

(2007년 1월 1일)

3 Responses to “성공회 전례의 현실 I – 전례 행동들”

  1. via media 주낙현 신부의 성공회 이야기 » Blog Archive » 성사와 성사성 - 제임스 화이트, 성공회 전통 Says:

    […] 양상이다. 화이트가 지적한 세가지 장애물을 빗대어 우리 교회(최소한 한국성공회의 전례 현실)를 성찰해 볼 […]

  2. 초얼 Says:

    위의 질문을 하신 분께서는 아마도 짐작컨대 천주교 교우신가 봅니다. 근데 왜 남의 전례가 이상하다고 뭐라 하시는 건지.(-_-) 교회의 일치도 중요하지만 고유의 전례가 따로 있는 것일텐데요. 같은 천주교인이지만 솔직히 이해가 안 되네요.

    [Reply]

  3. fr. joo Says:

    초얼 / 상호 존중에 대한 언급이라고 생각하고 고마움을 전합니다. 오해가 없길 바라서 몇가지 밝힙니다.

    앞서 적은 대로, 이 글은 사적인 이메일 교환의 일부를, 허락을 얻어 옮긴 것입니다. 질문을 주신 분은, 개신교 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했고, 천주교 쪽에서도 교리 교육을 받았으며, 특별히 전례에 대한 관심을 가진 분이고, 성공회 신자가 된 분입니다.

    어떤 사안에 대해서 궁금증을 갖는 것은 어떤 식으로든 타당합니다. 그리고 그 질문 혹은 비판 또한 굳이 천주교의 시각에서만 제시된 것도 아닙니다. 제기된 성공회 전례에 대한 몇가지 비판점들은 매우 적절하다고 생각하고, 전례 행동에 대한 이해를 풍요롭게 할 것이라 여겨 이곳에 옮긴 것입니다.

    [Rep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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