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가지 불찰
어떤 권위에 대해서 자신들이 하면 진정한 “도전”이요, 정당한 “비판”이고, 자신들이 도전받거나 비판받으면, 금세 그걸 “교만”이요, “건방떠는 일”이며, 젊은 녀석이 “가르치려 든다”고 뒷담화하는 이들이 있다. 이들이 다른 사람도 아니고 비판적/진보적 학자라 자처하거나 교수라는 자리에 있는 이들이라면 더욱 서글퍼진다. 그러나 이들을 나름의 학자적 기준에 맞추어 대하고, 대화한답시고 덤벼들었던 불찰이 크다.
의견은 다르더라도 어떤 정서적 유대감 안에서 말을 하면, 쓴소리도 달게 느껴지고, 선배된 입장에서는 그런 말을 내뱉는 사람이 가히 귀엽게 느껴지고, 자랑스러워지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유대감이 없거나, 그걸 눈치채지 못하는 사람들은 비판의 발설자에 대해서 두 가지 상반된 느낌을 갖는다. 비판의 대상이 어른들이면, 젊은이들은 그걸 들으며 통쾌해 하며, 동시에 “저 자식, 어른들한테 되게 막하는 건방진 놈”이라는 느낌을 보탠다. 물론 여기에는 젊은이 특유의 질시가 움직이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정서적 유대감이 전혀 다른 집단이 섞여있다는 것을 알았으면서도, 이를 면밀히 분별하지 않고, “재롱떠느라 대들었던” 불찰이 크다.
근거와 논리보다는 정서와 감정의 작용이 의사소통에서 더욱 직접적이고 더 큰 영향력이 있다는게 통설이다. 그래서 감정을 건드리는 감각적 “말”보다는, 같은 내용이라도 “글”로 쓰면 받아들이는 태도가 달라지는 것 같다. 그러나 이렇게 감각적 총화인 “말”의 감정 자극적 요소를 미리 세심히 살피지 않고, “요이~ 땡”하고, “이번 시간만은 근거와 논리를 갖고 이야기하는 게임입니다” 하고만 선언하고, 청중도 그렇게 듣고 대화하리라, 믿었던 불찰이 크다.
어떤 사람이 흘리는 “아우라”(aura)는 “도통함”이 아니면, “의뭉함”이다. 겉모양은 비슷해도 속은 전혀 다르다. 그 속에 따라 전혀 다르게 취급해야 한다. 또 그렇게 다룰 줄 알면, 도통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모르고, 사람들 저마다 얽혀 있는 복잡한 우월감과 열등감을 상향 평준화하여, 일괄 평등 처리하는 것이 깜냥에 평등주의 원칙의 적용이라고 판단했던 불찰이 크다.
이런 모든 일에서 보듯이, 내 안에 이런 미욱한 것들이 널려 있음을 알면서도, 이게 용기겠거니 하고 무시했던 불찰이 더더욱 크다.
그런데, 이런 불찰들을 피하려면 아내에게 검열받고 귀 기울이는게 좋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