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속 어둠: 보수와 진보 사이

자기 성찰 없이는 한발짝도 못 나간다. 어떤 사태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을 돌아보기 위해서도 개입과 거리두기가 동시에 필요하다. 특히 신앙적인 반성은 자기 내면의 어둠을 직시하는 일이다. 공부나 논리나 체험이나 연륜이 딸려서 걸려 넘어지는게 아니다. 사회든 교회든 간에, 개혁 혹은 변화를 외치고 이를 끌고 가는 동인의 내막을 정직하게 들여다 볼 일이다. 그 짐짓 심각한 의논과 표정과 “으싸, 으싸”하는 움직임 안에서 알게 모르게 자신의 어둠을 덮어버린다면, 그건 변화가 아니라 곧 재앙이 될 수도 있다.

김치수는 탁월하게 그 식별의 기준을 제공한다.

마음 깊숙한 곳에서는 보수주의가 자리 잡고 있는데도 진보주의자인 척할 때는, 사소한 것에 과격해지고, 본질적인 것에는 무관심해진다.

[via 김현 via 민노씨]

덧붙임: 돌아보니 이미 한 말이로구나. 다른 맥락에 언급한 것인데, 이 자리가 더 어울리겠다.

좋은 진보와 나쁜 보수라는 틀은 식상할 뿐만 아니라 바르지도 않다. 그건 경험해 봐서 다들 안다. 게다가 좀더 들여다 보면 “좋다-나쁘다”는 가치의 형용사를 자신있게 붙일만한 인간이 많지 않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신앙 전통에 기대어 인간을 종교적으로 폄하하자는 건가? 아니다. 이건 평등의 원리에 대한 종교적 인식이고 표현이다. 각설하고, 좀더 느슨하게 “태도”로 표현하는게 더 수월하고 살갗에도 더 가깝겠다. 다시 말해 “열려 있느냐? 닫혀 있느냐?”는 것이다. 혼자 살지 않는 바에야 소통하고 관계해야 할 터, “열림”과 “닫힘”을 좀더 도드라지게 문제 삼아야 한다고 본다. “닫힌 진보”(실은 진보로 자처하는)보다 “열린 보수”(실은 사람이 다 보수적이 아닌가?)에 더 미래가 있다.

이를 이어 가자면 “자기반성과 성찰”의 여부가 그 밑에 있다. 성찰(reflection)과 자기애(narcissism)는 한끝 차이다. 성찰없는 비판은 비난, 공격, 중상이다. 이런 사람들이 대체로 목소리 크고 좋은 말들을 한껏 쓸어다 동원하는 바람에 다른 성실한 비판마저 도매금으로 넘어가기 일쑤다. 종교적인 성찰은 이런 말뿐인 공허한 수사학적 비판들에 인간의 하릴없는 어떤 속내 혹은 욕망이 작용하는가, 혹은 왜 거기에 쉽게 굴복하고 마는가를 들여다 보려고 한다. 그런 점에서 신앙 혹은 종교는 어떤 맹목적인 확신이나 광신의 상태와 쉽게 바꿔 쓸 수 있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절대(자) 혹은 무한(자) 앞에 서서 한 유한한 인간이 절대(자) 혹은 무한(자)인 척하려는 욕망을 끊임없이 비춰보고(반성)하고 딴지(비판)를 걸어보는 마음가짐이요 행동이다.

http://viamedia.or.kr/2008/02/05/177/

3 Responses to “마음 속 어둠: 보수와 진보 사이”

  1. 혜이안 Says:

    저희 동네 국회의원은 옛날에 열심히 사노맹 하시다가 결국 한나라당 의원이 되어 지금 뉴타운 때문에 동네 아줌마들한테 열심히 욕드시고 계신답니다.
    제가 다니던 검정고시 학원과 입시학원의 강사님들도 태반이 그랬었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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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fr. joo Says:

    혜이안 / 수구당 혹은 뉴라이트로 들어간 이들, 그리고 이른바 학원 자본가가 된 이들의 중심에 386에 있다는 것. 이것은 중요하고 심각한 연구 주제라고 생각합니다. 단순한 분석 기사 정도로는 안되고 여러 연구서들이 나와야 할 것 같아요.

    [Reply]

  3. via media 주낙현 신부의 성공회 이야기 » Blog Archive » 제도 종교와 영성이 충돌할 때 Says:

    […] 버틀러 배스(Diana Bulter Bass)의 글을 소개한다. (한국에서 강연했을 때, 이분을 몇 번 소개한 적이 있었는데, 기억하시는지들 모르겠다.). 내 생각과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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