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의 창

산란한 마음의 창은 어디를 향해 열려 있는가? 기도는 늘 매개(medium)를 바라는 것이겠으나, 창(窓)은, 그 한자의 말마따나 좀더 분명한 성사(sacrament)의 이미지일 것이다. 창은 바람이 들고 나는 것, 닫힘과 열림, 보호와 투시, 그리고 무엇보다 어떤 너머를 향한 응시를 드러낼 것이다. 여전히 우리는 창 안쪽에 머물러 있지만, 그 나만의 세상 너머를 창을 통해서 본다. 그것이 유일하게 자신을 넘어서는 일이다. 이렇다면 기도는 ‘나’를 넘어서도록 매개하는 것이어야 한다.

기도와 창에 관한 이 잡념이 어울리는 통에, 오래도록 남아 있던 말들, 그러나 서로 상관없을 듯한 말들이 함께, 어디서 쑥하고 드민다.

뮤지컬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에서 기억하는, 마리아와 원장 수녀님의 대화 가운데 한토막.

하느님께서는 문을 하나 닫으시더라도, 어딘가에 창 하나를 열어 두신단다.

조앤 치티스터 수녀님은 기도와 창을 이렇게 연결하신다.

탈무드에 나온 말이에요. ‘창 없는 방에서는 기도하지 말라.’ 다시 말해 마음 속에 세상을 담아 두지 않고서는 기도하지 말라는 말이지요. 영성 생활의 목적은 우리를 현실에서 구출하는게 아닙니다. 그 목적은 그 현실을 우리가 함께 창조할 수 있도록 하는데 있어요.

하느님은 나를 어느 열린 창으로 이끄실까? 그 창 너머로 무엇을 응시하고, 다른 이들과 함께 창조하며 살게 하실까?

5 Responses to “기도의 창”

  1. 민노씨 Says:

    치티스터 수녀님의 말씀은 비단 종교에만 한정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모든 예술, 모든 소망이나 바람들은 “현실 속에서 우리가 함께 창조”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다만 지금 이 세계는 점점 더 세상과 나와의 일체감을 허물어 뜨리고, 세상과 나를 이어주는 미디어(특히나 엔터테인먼트 콘텐츠와 연계된 미디어)는 그런 현실과 분리된 환상을 강조함으써, 일탈적 판타지를 구조화함으로써, 궁극적으론 세상과 나의 분리에 기여하는 것 같습니다. 안타까운 일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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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r. joo Reply:

    민노씨 / 생각을 확장시켜주시는 민노씨 덕을 많이 봅니다. 그렇지요. 무언가를 매개하는 일은 아름답고 거룩한 일이라 생각합니다. 이를 통해서 변화와 창조가 일어나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그런데 요즘 매개체들은 추하고 저속합니다. 그 까닭은 진실한 매개의 노력과 그 형태가 삿된 욕망들의 장난 속에 머물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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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민노씨 Says:

    추.
    과문한 독자로서의 바람을 적어본다면.. ^ ^;
    주신부님께서야 성직자로서 너무도 일상적인 용어들일 ‘성사’ 등의 용어들은, 저와 같은 ‘비아메디아’의 비종교인(?) 독자들에게는 때론 글의 문맥에 장애가 되는 용어라는 생각도 듭니다.

    바라건대, 좀더 일상적인 언어로 풀어주시거나, 혹은 그 용어에 대한 설명을 부연해주시면 좋지 않을는지요? 물론 대단히 귀찮은 일이겠다는 생각도 들고, 또 독자들이 적극적으로 사전이라도 찾아보면 쉽게 해결될 문제이기도 합니다만… 그저 한번쯤 생각해주십사 하는 취지로 가볍게 건의드려봅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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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r. joo Reply:

    민노씨 / “추”에 대한 변명… 그리 해보겠습니다. 생겨 먹은게 친절하지 못한 탓에, 그래야지 하면서도 잘 안됩니다. 한편으론, 신자인 독자들을 기대했기 때문일텐데, 그런 와중에 비신자인 분들을 배려하지 못했습니다. 실제로는 비신자 독자가 더 많은 것 같아요. 어쨌든 노력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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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minoci's me2DAY Says:

    민노씨의 느낌…

    ‘창 없는 방에서는 기도하지 말라.’ 다시 말해 마음 속에 세상을 담아 두지 않고서는 기도하지 말라는 말이지요. 영성 생활의 목적은 [….] 현실을 우리가 함께 창조할 수 있도록 하는데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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