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관과 비관 사이
내용 없이 징징거리는 듯한 블로깅이 되어가고 있는 듯하다. 돌이켜야겠다. 한 주 전 쯤 교회 내에 있는 어떤 분의 긴 편지에 교회의 여러 일들에 대해 답장하면서, 결국에는 ‘잡감’에 대한 또다른 소회를 적는 것으로 마감하고 말았다.
올해 들어 잡감들이 더욱 밀려 옵니다. 블로그에도 적어 놓은 적이 있습니다… 그 잡스러운 생각들은 성직자들과의 관계, 교회의 문제, 그리고 성직 자체에 대한 고민 속에서 나옵니다. 남을 두고 비판하는 시점에서 나온 고민도 있고, 순전히 제 개인적인 고민에서 나온 것도 있습니다. 결국에는 잡감들 속에서 저는 스스로를 도마 위에 올려 놓기로 작정했습니다. 그리고 서로들 스스로의 도마를 마련해 보기를 권유하려고 미욱한 고민이나마 공개했던 것이지요. 이를 통해서 내 무의식에 흐르는 것들을 들춰서 어떤 너머를 지향하고 살아가보자는 심산입니다. 그런 일이 쉽지 않을 터입니다. 그런데 이 어떤 너머라는 초월을 종교인들 마저 대수로이 여기지 않는다면 누가 생각한단 말입니까? 신자 아닌, 성직자 아닌 사람들도 우리보다 더 깊이 보고, 식별하고 있는데, 우리 자신이 뒤틀린 자의식의 노예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이는 신자로서, 성직자로서 직무유기입니다.
우리 자신의 뒤틀린, 혹은 가려진 무의식을 함께 살펴야 한다고 봅니다. 그러니 이렇게 고약한 방식으로 공방을 주고 받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 공방이 감정을 상하게 한다고 여긴다면, 그냥 멈추는게 서로에게 이득입니다. 한편, 그렇게 쉬이 상하는 감정을 갖고 성직자 할 일은 아니라는게 제 최근의 결심입니다. 오해를 하더라도 창조적으로 하자는게 또 다른 결심입니다. 그런 창조적인 오해는 서로에 대한 궁금증을 되살려 서로를 먹이며 발전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가운데 복합감정에 사로잡혀 오해를 양산하는 무의식의 구조가 밝히 드러나서 그 어둠을 이겨낼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이 점에서 아직 저는 낙관주의자입니다. 그러니 이 시간에 이렇게 긴 답장을 쓰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여전히 저는 비관주의자입니다. 제 한계를 안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그 한계가 다른 이들과의 공명을 통해서 낙관을 비추지 못한다면, 아마도 저는 비관에 사로잡힐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그것대로 제게서 세상에 대한 쓸데없는 소망을 없애서 하늘에 대한 희망을 열어준다면, 그 비관도 나쁘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돌이키는 시점의 마지막 푸념이길 스스로 바란다.
May 16th, 2009 at 5:13 pm
“오해를 하더라도 창조적으로 하자는게 또 다른 결심입니다. 그런 창조적인 오해는 서로에 대한 궁금증을 되살려 서로를 먹이며 발전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몹시 공감합니다.
오해가 없다면 균열이 없다면 세상이 모두 잘 맞춰진 톱니바퀴들과 같다면 그게 반드시 좋을 것 같지만은 않습니다. 적절한 연상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저로선 종종 언급하곤 하는 미국 해체주의를 대표하는 예일학파의 해롤드 블룸이 떠오르네요. 그는 ‘영향의 불안’이라는 시론을 통해 상호 교감하는 관계 속에서의 (후배시인이 선배시인에게 갖는) ‘영향력에 대한 불안’이 ‘창조적인 오독’의 가능성을 높이고, 그런 불안과 긴장의 크기가 그 (후배시인에게) 창조의 근원적 에너지로 작용한다는 독특한 이론을 주창했는데요.
주신부님의 말씀을 들으니 그런 관계에 속한 사람들, 의미들 교감하는 관계들 속에서 오해를 하더라도 좀더 치열하게, 좀더 상호 침투하여 말씀처럼, “서로에 대한 궁금증을 되살려 서로를 먹이며 발전”할 수 있다면 좋겠네요. 요즘은 너무 경직된 사고들이 너무 많아 보여서 좀 아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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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 joo Reply:
May 18th, 2009 at 2:53 pm
민노씨 / 새삼 민노씨의 날카롭고 섬세한 읽기를 느낍니다. 언급하신 문학비평가의 이론은 아니지만, 본래 편지의 말미였던 이 부분은 어느 ‘후배’ 한 분과의 대화 속에서 나왔습니다. 민노씨의 언급처럼, 제 글을 오독해서라도 “그 (후배..에게) 창조의 근원적 에너지로 작용”하면 좋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걸 막는 요소들이 참 즐비해요. 우리 문화의 나이차이, 선후배, 교계 질서 등에서 비틀려 나오는 억압성이 대화를 가로막고 있는데다, 그 억압성을 넘겠다고 하면서도 실은 그 앞에서 주춤거리는 일들이 많이 일어납니다. 아직 이런 주춤거림을 넘어설 방법을 못찾겠어요. 다만 이런 처지에서 스스로 외롭지 않도록, 혹은 외롭게 내버려 두지 않도록 하는 일이 출발이겠다는 생각입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어느 위대한 사색가를 오해(!)하는 것인지 모르겠으나(그의 “입장”이라는 개념이 모호하므로), “입장의 동일함”보다는 새로운 삶에 대한 지향의 동일함 혹은 나눔에서 비롯하는, 좀더 넓은 의미의 연대(solidarity)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파편화된 외로움(solitariness)에서 비롯된 왜곡된 욕망을 넘어서는 방법이 아니겠느냐 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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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y 20th, 2009 at 8:24 pm
“우리 자신의 뒤틀린, 혹은 가려진 무의식을 함께 살펴야 한다고 봅니다. 그러니 이렇게 고약한 방식으로 공방을 주고 받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 공방이 감정을 상하게 한다고 여긴다면, 그냥 멈추는게 서로에게 이득입니다.”
주신부님 처음으로 오늘 주신부님 블로그에 들어왔고 몇자적겠습니다.
공방이 공명으로 승화될 수 있는 방법 중에 하나는 어떠한 특정한 견해에 사로잡힌 “나”를 발견할 때 이루어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소위 지식인들이 이러한 연습이 힘든 이유중에 하나는 이러한 나에 대한 분석에 있어서 여러가지 설명과 합리화를 갖다대는 심한 버릇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모든 지식에는 감정이 수반될 수밖에 없는데 “나”에 대한 분석에 있어서 상대방에 대한 싫고 좋은 감정 혹은 내자신의 컴플렉스로 인한 내자신에 대한 열등감과 우월감에 대한 분석이 가장 근본적인 분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을 생략하고 옳고 그름이나 장단점을 분석하니 끊없는 기준에 대한 설정에 대한 필요성과 이 기준을 뒷받침해줄 수많은 지식이 필요해 공방은 절대 공명이 될 수 없을 것입니다. 물론 기준설정도 하지 않고 마구 지식으로 뒤덮는 경우도 허다하죠.
째즈에서 임프로바이재이션은 연습없이 되는 줄로 생각하기 쉽지만 보통 연주자는 이 임프로바이재이션을 위해 끊임없이 개인 연습해야 된다고 합니다. 마친가지로 공명이라는 것을 위해 끊임없는 개인적으로 연습을 해야 되겠는데 이것이 바로 이것이 내 자신에 대한 성찰이라고 생각됩니다. 나이가 아주 어린 아이들이 노는 것을 유심히 관찰하면 깨달을 수 있는 것은 그들은 상호작용의 시간이 굉장히 짧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 들수록 언어가 발달이 되고 상대방에 대한 의식이 강해지면서 상호작용의 시간이 길어지는데, 이로인해 타인에 대한 의식이 강해짐으로 에너지의 소모가 늘어나기도 합니다. 소위 어른이 된다는 것은 공명에서 공방으로 바뀌는 과정이라고 생각됩니다. 저는 이런 의미에서 진정한 자기성찰적 개인주의만이 공방을 공명으로 승화 시킬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물론 이때 아이들의 공명과 어른들의 공명의 차이는 존재할 것입니다.
저는 우리가 의도적으로 의식하기를 피하는 행위를 무의식이라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소위 우리가 의식하고 있는 “나”라는 것은 수많은 이념과 신념과 이에 수반하는 감정의 다발일 것입니다. 이 다발이 공고해지는 것을 우리는 지식인이 된다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사실 뒤틀려진 의식이라는 것은 없고 이러한 겹겹히 싸인 다발이 통합이 되지 않을 때 일어나는 균열의식으로 일어나는 감정도 있고요. 그리고 이 다발이 공격이 공격당할 때 일어나는 감정이 저는 뒤틀린 의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무의식의 탐구는 지금 분석주체의 “나”를 이루고 있는 수많은 다발들에 대한 관찰을 의미할 것입니다. 자아성찰이전에 이 과정이 선행되어야 되는 이유는 이 수많은 다발들의 집적체인 나를 가지고 내면을 성찰한다는 것은 모순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근대과학이 범한 오류인 주체와 객체의 오류를 이러한 내적 성찰에서조차도 범할 수 있다고 봅니다. 지식과 어떠한 기준으로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발견에 대한 흥미를 가지고 관찰을 시도하고자 하는 “나” 자신에 대한 관찰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태도가 학문과 배움의 근본적인 태도이어야 된다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그래서 분석과 관찰은 내 자신에 대한 디컨스트럭트를 반드시 병행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디컨스트럭트는 해체를 위한 해체가 아니라 공방이 공명이 될 수 있도록 하기위한 하나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기 성찰적인 디컨스트럭트는 이미 리컨스트럭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일단 공방의 단계는 이미 남에게 상처를 주고 받는 단계이라고 생각합니다(저는 언어적 공방에 있어서 정도의 차이는 중요하다고 보지 않습니다). 문제는 공방이 문제가 아니라 공방이 끝났을 때 이것을 집에서까지 끌고 들어와 잊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내 생각 뒷편에서는 “두고보자 이세끼”라는 무식한 생각이 여러가지 현란한 지식으로 뒤바껴 나중에 때가 되어 한방먹이기도 하고 이것이 물리적인 보복을 낳기도 하죠. 사실상 공명의 단계는 나도 나를 모르는 단계일 것입니다. “오른손이 한일을 왼손이 모르는 단계”로 희미하게, 부정확하게 느끼는 단계라고 생각합니다. 저같은 범인들은 아무리 자아성찰을 할지라도 공방의 단계의 머무는데, 이것까지는 좋은데, 문제는 공방이 전혀 공명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공방이 끝난후 자신의 감정에 대한 합리화기제가 너무 빠르게 진행되기 때문입니다. 소위 지식인들에 있어서 이것은 아주 공교하기에 자신이 자신을 속이게 되기까지 하여 젼혀 자신에 대한 컨트롤이 안되 수많은 과오를 저지르기도 하죠(이것은 역사가 증명하고 있죠). 상처가 있다는 것은 컴플렉스(수많은 내가 철석같이 믿고 있는 지식과 이념들의 다발)를 건드렸다는 것이고 아직도 나와 이 컴플렉스가 밀착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죠. 그러므로 상처를 받을 때 이 상처를 여러가지 현란한 지식으로 합리화함과 동시에(이것을 막기란 거의 불가능하다고 생각됩니다) 이 상처를 통해서 내가 무슨 컴플렉스를 가지고 있는가를 깨닫는다면 상처는 사실상 공명으로 가는 길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깨달음은 나와 컴플랙스를 분리시키는 기본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선과 위빠가 의도하는 것중에 하나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상처를 주고 받는 것을 두려워한다면 영원히 공명으로 가는 길이 차단될 것입니다(상처를 주고 받는 것을 피하는 것이 “두려움”인지 아니면 “배려”인지도 깊이 분석해야 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연대”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주신부님이 말씀하시는 연대를 위하여 저는 “해체”의 과정이 절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한국인들은 패거리 의식 집단의식 혹은 국수적 사고방식이 강하기에 이것을 해체하는 과정이 반드시 있어야 되지 않나 생각합니다(물론 물질적 개인주의를 경계해야할 것입니다). 이때 변절이니 배신이니라는 단어가 오용되지 않을 것입니다.
공명은 치렁치렁 끌려다니는게 아니라 어떠한 조건이 되어 순간적으로 일어난다고 할 때 우리 개인에게 깊숙히 내재되어 있는 이러한 패거리 의식(예로 한일전 열광하고 있는 나를 관찰하면 됩니다)의 해체작업없는 지적인 연대로의 작업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어떠한 특정 집단에 중독되어 있는 부분을 해결하지 못하면 자신의 신념은 사상누각일 뿐이며 방어기제와 합리화기제만 늘게해주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쓰다보니깐 길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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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 joo Reply:
May 30th, 2009 at 11:16 am
홍 / 지난 짧은 만남 이후로 (즐거운 대화였어요!) 엄청난 일이 벌어져서 대답을 미뤄두고 있었습니다. 다른 이와 사적으로 나눈 대화의 마지막 감상을 올려 놓은 것인데, 세심하게 읽고 생각을 확장시켜 주셔서 고맙습니다. 백번 공감합니다.
원래 글에 적은 “공방”은 그리 심각한 논쟁은 아닙니다. 앞서 말씀드린대로, 사적인 편지를 주고 받는 처지에서 나온 대화를 그리 표현했습니다. ‘그래 그래’ 하고 맞장구만 치는 일이 결국 자조가 되는 일이 많아서, 좀더 서로의 생각들을 벼려 보려는 셈으로 쓴 수식입니다. 그러나 ‘공방’과 ‘공명’의 단계와 이행을 멋지게 풀어주셔서 한 수 배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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