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든 (W. H. Auden) “Night Falls on China”

밤은 중국에 지고,
흐르는 그림자가 드리우는 커다란 궁호는
땅과 바다 위를 움직이며, 삶을 바꾸나니…

오, 이제 우리의 광기가 웃자라도록 가르쳐 주시게
얼어붙은 마음의 완벽한 예절일랑 헝클어 버려야 하리니,
다시 한번, 서툴게 하고 살아 있도록 해야 하리니…

머리에서 치워버리게, 멋진 쓰레기 더미일랑,
잃었던, 전율하는 힘의 의지를 일으키어
그 힘을 모아 지상에 펼쳐야 하리…

그리고 이제 인쇄기의 소음을 들으니,
나무들의 숲이 거짓으로 바뀌는…


W.H. Auden (1907-1973), “Night Falls on China”
번역: 주낙현 신부

5 Responses to “오든 (W. H. Auden) “Night Falls on China””

  1. 민노씨 Says:

    오든은 주신부님께서 특별히 좋아하는 시인인가요?
    저는 이번에 처음 접하는 시인입니다.

    추.
    트위터에도 남겼는데요.
    영국으로 귀화한 엘리어트와 미국으로 귀화한 오든의 공통점이 “전례”(liturgy)라고 하셨는데, 그 전례의 의미가 뭔지 구체적으로 잡히지가 않습니다. ^ ^; 좀더 풀어서 설명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Reply]

    fr. joo Reply:

    민노씨 / 저도 아직 발견하고 있는 처지라 구체적으로 말씀을 못드리겠고요. 다만 ‘전례’에 관해 말하자면, ‘몸’의 발견이라 할까요. 특히 오든이 관심하는 ‘사랑과 몸’에 대한 것이 전례에 대한 관심으로 연결된다는, 제멋대로의 해석을 해보는 겁니다. 제 안경이 그러니까요.

    트위터에 적어 놓고 다시 돌아보니, 엘리엇은 ‘몸’이 관련된 전례보다는 실은, 시간에 대한 생각(교회의 전례력에 기초한)이 더 깊었던 것 같아요. (물론 이것도 크게는 전례의 범위에 속합니다만), 그래서 그는 훨씬 불교적이고 윤회론적인 사고 방식이 엿보이고요. (제 블로그에 몇 차례 엘리엇의 시를 번역해 올려 두었습니다. 약 10년 걸쳐서 ‘리틀 기딩’을 완역해 볼 생각으로요. ㅎㅎ)

    오든은 저도 몇년 전부터 읽게 된 시인인데요. 그 삶도 삶이려니와, 훨씬 그리스도교적인 명제인 ‘사랑’에 천착하면서도, 그 고정관념에 도전하는 날 것의 사랑 / 몸을 통한 사랑에 대한 깊은 동경이 있는 것 같아요. 그런데, 제가 보기에 전례(혹은 교회의 전례력)에는 이러한 몸의 사랑이 성찰하고 확장해가는 어떤 시공간이 마련되는 것 같고요.

    다시 돌아보니, 이 두 시인의 가장 큰 공통점은 단순히 “성공회”라는 신앙 전통을 향한 회귀이기도 한데요. 이 신앙 전통이 좀더 신비의 영역, 도전의 영역에 열려 있는 탓이었으리라 봅니다. 물론 이 즈음에서 제 답글이 대단히 변증적인 냄새(이른바 전도 모드)가 농후해졌다는 것도 느끼고 있습니다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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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민노씨 Says:

    주신부님 말씀 중에서 꽤나 인상적으로 기억하고 있지만, 여전히 그 구체적인 풍경이 보이지 않는 신비로운(^ ^;) 느낌의 말씀이 계셨습니다.

    “교회와 구원이라는 근본적인 사목적 신학적 주제는 교회를 기점으로 하여 펼쳐지는 교회의 전례와 선교를 통해서 실천하고 몸으로 드러나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 몸의 실천은 물질적인 것 속에서 만나는 신성한 것을 지속적으로 경험하면서, 종말론적 희망을 부분적으로 먼저 맛보는 일이어야 한다. 종말론적 희망이라는 전망은 교회와 신학과 그 실천(전례와 선교)에 대한 끊임없는 비판과 성찰의 기준점이다.”
    http://viamedia.or.kr/2008/05/08/213

    특히 “이 몸의 실천은 물질적인 것 속에서 만나는 신성한 것을 지속적으로 경험하면서, 종말론적 희망을 부분적으로 먼저 맛보는” 것의 풍경이 어떤 것이고, 그것이 어떻게 이토록 세속적인 욕망이 강박적으로 강요되는 사회에서 생겨날 수 있는 것인지… 정말 그럴 수 있기는 한 것인지, 한편으론 회의하고, 또 한편으로는 그런 일들이 생겨나길 바라면서.. 주신부님께서 좀더 일상적인 언어로, 좀더 낮게 내려온 세속의 언어로(에드워드 사이드가 주창했던 좀더 낮게 좀더 낮게 써야한다는 그 의미에서요) 그 풍경들, 그 욕망 가득한 곳, 그 욕망의 숙주인 몸에서 피어날 수 있는 신성한 소망들을 그려주시기 바라봅니다.

    추.
    트위터에 남기셨던 ‘일치’에 관한 논평 요청(^^;;)은 제가 워낙에 과문해서요…
    논평은 가당치 않고, 그저 좀더 읽어보고 궁금한 것이나 이해되지 않는 부분에 대해 여쭤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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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김바우로 Says:

    안녕하세요.
    신부님. 도서관이라는 직장의 특징때문에 주말에도 근무하고 있는데, 잠깐 시간을 내서 주 신부님의 블로그를 방문하였습니다. 한시간 뒤면 퇴근이라서 조금은 가벼워진 마음으로 글을 씁니다.^^ 머리에서 치워버리게, 멋진 쓰레기 더미일랑이라는 말이 인상깊습니다. 신약성서학자 서중석 연세대학교 교수님의 글을 빌렸는데, 그 글에서는 마태오복음서를 인용하여 마음이 청청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돈을 더 모을까, 어떻게 하면 세상에서 인정과 존경을 받으면서 살까, 어떻게 하면 사람들의 인기를 받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내 자식을 좋은 대학교에 보낼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깨끗한 부자’가 되어 돈도 벌고 존경도 받을까, 어떻게 하면 출세해서 사회적 위치도 높이고 존경도 받을수 있을까를 생각하기 쉬운 우리들의 마음을 생각해본다면 오든 시인의 말대로 머리에서 치워버리게, 멋진 쓰레기 더미일랑이라는 말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사실 이 글을 쓰는 저도 그렇고요…그래서 견진성사때 박경조 프란시스 주교님의 안수를 통해 제 안에 오신 성령에게 마음속이 청청해지게 해달라고,그래서 하느님나라를 보게 해달라고 말씀드리는 것 밖에는 방법이 없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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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r. joo Reply:

    김바우로 / 청정한 마음을 담기 위해 마음을 비우는 절기가 바로 대림절인 듯 합니다. 복된 대림절되시길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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