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바타]와 브룩스의 “메시아 콤플렉스”

아거(gatorlog)님이 전문 번역한 뉴욕 타임즈 데이빗 브룩스의 [아바타]에 관한 글 “아바타와 메시아 콤플렉스”를 읽고 갑자기 부조리한 생각이 동하니 흐르는 대로 두드려 본다.

1.
영화 [아바타]는 ‘메시아 콤플렉스’의 영화일까? 그래서 어떤 전형적인 오리엔탈리즘의 ‘영화’일까? 아니면 이런 비판은 영화사에 획기적인 사건을 그은 어떤 기술적 성과와 이미지의 풍요로운 혼성 영화에 대한 단편적인 비난일 뿐인가? 논쟁의 전선이 전자는 서구 식민주의 유산에 대한 탈식민주의적 읽기로, 후자는 엄청난 자본의 힘을 입은 할리우드 영화에 대한 무분별한 찬양의 발로로 분명히 그어지기만 한다면, 논쟁의 독자나 관람자는 정작 내용보다는 치고받는 흥미로운 싸움에만 관전할 수 있을는지 모른다. 사실 모든 일이 이렇게 간단했으면 싶다.

그런데 처지가 그렇지 않다. 미국의 어느 ‘세련된 보수 논객’과 한국의 어느 비판적 관람자의 비평이 한 쌍을 이루는 듯하고, 모든 일에 꽤 회의적이고 사사건건 시비를 거는 듯한 어느 비판적 블로거들에게는 영화사적인 작품으로 평가되거나, 전자의 ‘오리엔탈리즘’ 비판이 과도한 일반화로 그 속내를 비추지 못했다는 반박이 나오는 처지에서 보면, 도대체 피아가 구분이 되지 않는 몹시 ‘포스트모던’한 양상이 되어 버린다.

2.
여느 전문가적인 논쟁에서 느끼듯, 이런 화려한 논쟁의 수사와는 멀리, 나는 그저, 슬픈 일을 당한 우리 가족을 위로한다며 그전에 얼굴 한번 보지 못한 어떤 이가 [아바타] 관람권을 손수 마련해 건네 준 탓에, 한 저녁의 호사를 누렸을 뿐이다. 영화 [아바타]는 우리에게 ‘가족 영화’였다.

열한 살 난 아들 녀석은 곧장 미야자키 하야오의 여러 ‘만화’ 판타지를 넘어서 실제처럼 아름답게 펼쳐진 모든 시각 효과에 압도되었다. 막 아홉 살이 된 딸 아이가 관람 후 대뜸 슬픈 영화로 단정 짓자, 둘은 입을 맞춘 듯 나비 족 공동체의 뿌리였던 멋진 나무가 폭격당해 무너지는 장면이 가장 마음 아팠노라고 했다. 아내는 제이크와 나비 족 여인의 사랑과 그 배경의 아름다움이 선연한, 어찌 보면 전체적으로 사랑 영화로도 다가온다며 다소 엉뚱한 관람평을 내놓았다. 영화 막바지 제이크가 이끄는 전쟁 승리의 쾌감은 뒷전이었다. 영화를 잘못 보고 제임스 캐머런을 배반한 것인가?

내게도 역시 판에 박힌 영화의 줄거리보다는 현란한 수많은 이미지의 차용과 합성, 그리고 어떤 상상력에 따라 마련한 아름다운 배경이 눈을 즐겁게 하고 탄성을 자아내게 했다. 가끔 선연하게 등장하는 종교적인 상징들과 이미지들, 그리고 의례(ritual)들이 눈에 들어 머리를 환기시키곤 했다. 그 가운데 영화 막바지 네이티리가 정신을 잃은 진짜 제이크를 안은 피에타(pieta) 이미지를 보고는 ‘성모 마리아 콤플렉스’ 영화라 불러야 할까 하는 다소 ‘스놉'(snob)한 얕은 잔꾀를 생각해 내기도 했다.

다만, 영화를 본 뒤 트위터에 몇 마디 보탰다. 이런 것이었다.

인태(@tuesdaymoon)님이 가족 위로차 마련해 준 극장표로 [아바타] 감상. 현실에 떠다니는 온갖 이미지들을 총집합하여 현란하게 요리하고 있었는데, 종교적인 면에서는 ‘창조 질서’ ‘욕망’ ‘아름다움’ ‘구원’의 연관성이 엿보이기도 한다.

[아바타] 신학적 반성과 되새김의 이미지들: 신(God)이 아닌 신성(deity)과 그 여성성, 창조(자연)에 대한 지배가 아닌 교감, 공동체(네트워크)를 통한 서품(ordination) 의식, 그리고 마지막 장면의 피에타(pieta) 등.

이 영화는 무엇보다도 이런저런 사람들이 지적하는 여러 가지 요소들이 온갖 이미지의 향연 속에서 서로 모순되듯 교차하여, 뻔한 시나리오에 대한 판단을 교란하고 있었다. 줄거리나 시나리오가 영화는 아니다. 영화는 이미지들의 복잡한 운동이다. 이미지의 움직임은 시나리오를 뛰어넘는다. 그렇지 않을 바에야 수천억 원을 들여 빤한 ‘콤플렉스’ 영화를 만들겠는가? 그러고 보니 그런 일들이 비일비재하긴 했다. 그러나 그 명백한 지루함, 혹은 발가벗은 메시지들은 시나리오를 벗어나지 못한 그저 그런 것들이 아니었나?

3.
데이빗 브룩스의 글을 다시 읽는다. 이 세련되고 명석한 보수 논객은 분명하고도 영리한 덫을 놓는다. 제목부터가 “메시아 콤플렉스”. 사람들은 ‘메시아’ 표상에 혹하겠으나, 그의 방점은 ‘콤플렉스’에 있다. 게다가 그는 이 영화를 ‘우화’로 단정해 버린다. 영화가 내포할 수 있거나 해석될 수 있는 현실성을 저만큼 비켜나가게 하고 저열하다는 인상을 받게 한다. 그리고는 뻔하다며 볼멘소리하던 그 줄거리를 주구장창 스포일러를 감내하며 풀어놓는다. 그것도 이리저리 비꼬는 투로. 마지막에 이런 논점이 불편할 정도로 공격적이라고 묻는 그는 교활하다. “미국 군대가 죽임을 당하는 것을 구경할 기회를 준다”는 점에서 실은 자신이 불편한 것이다. 대답을 위한 가정은 이를 회피하기 위한 수단이고, 여기에 독자들은 걸려 들어, 짐짓 ‘문화제국주의’를 찬양하고 나선 것은 아닌가 하고 헷갈려 하기 시작한다. ‘이 보수 논객, 웬만한 진보 논객보다 관점 좋고 훨씬 날카롭잖아?’ 이럴 만하다.

세상 아래 새로운 것이 하나도 없으며, 캐머런 감독이 개과천선하여 자본주의를 뒤엎자는 혁명을 할 사람도 아니요, 그걸 기대할 사람도 없다. 그러나 어떤 이야기가 우화라 할지라도, 그 우화에서도 우화를 넘어서 배울 수는 있는 법이다. 게다가 온갖 이미지의 운동 속에서 서로 부딪히는 여러 모순은 시나리오를 넘어서는 상상력을 자극하고, 그 수많은 모순의 경계 안에서, 독자/관람자는 자신의 삶의 처지에 따라 그 해석을 다양하게 펼쳐 나갈 것이다. 그 수용과 해석의 다양성과 폭이 넓은 만큼 그 영화는 문제작, 나아가 좋은 작품으로 남을 수 있는 더 많은 여지를 얻을 것이다.

“메시아 콤플렉스”라고?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브룩스가 이 영화에 대고 이렇게 말할 처지가 아니다. 오바마의 대선 수락 연설을 비꼬아 중계하던 브룩스는 언젠가 부시(G.W.Bush)에 대한 심기 복잡한 글을 적은 적이 있다. 이번 아바타 평과 제목이 비슷하다. 이른바 “부시 역설”(The Bush Paradox). 이 글에서 그는 부시의 장단점을 균형 있게 지적하는 듯하면서도,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그의 약점들이 어떻게 그의 이라크 전쟁 전략에 제대로 먹혀들어갔는지를 설명하려 든다. “인생은 복잡한 거야. 우리가 민주주의를 지키는 이유는 한 쪽이 언제나 옳은 게 아니기 때문이지. 정말 위험한 사람은 분명한 사실을 인정할 수 없는 사람이야”라며, 부시가 아니라 독자들을 타일렀다. 실은 그 글이야말로 “부시의 메시아 콤플렉스”가 되고, 이 영화평이야말로 “아바타의 메시아 역설”이라고 했어야 정직한 것이었다. ‘복잡한 인생’과 ‘명백한 사실’ 운운은 실은 자신에게 돌려야 할 말이었다. 허위 정보에 입각한 부시의 이라크 전쟁이야말로 비뚤어진 ‘메시아 콤플렉스’였고, 아바타는 ‘군산복합체’와 ‘제국주의적 침략과 식민지 개척’이라는 명백한 사실을 비추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어디서도 ‘부시의 메시아 콤플렉스’를 다룬 적이 없다. 그런 그의 말들이 낯 간지럽다.

그나저나 ‘콤플렉스’를 겪는 이는 브룩스 자신이 아닐까? 그는 제 주장과 비판을 자신의 이념에 따라 어디에는 갖다 붙일 수 있는 ‘전능하고 보편적인 신의 컴플렉스’를 가졌는지 모른다. 오지랖 넓은 그 보편성은 매혹적인 비판점을 아우르는 듯하지만, 그 밑으로 감추는 것들이 많다. 대체로 많은 보수주의자에게서 보이는 이 버릇과 복합감정은 종종 근본주의자들과 근사치를 이루는 일이 빈번하다. 부시와 빈 라덴의 사례처럼. 자기 말고는 다른 메시아의 등장을 한사코 인정하지 않아 예수를 죽였던, 그 어떤 무리처럼. 한사코 자신이 인정하는 메시아가 아니면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고, 마침내 ‘선택된 민족’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 버린 시온주의자들처럼.

4.
영화를 두고 두어 마디 트위터에 적은 며칠 후, 전투적 여성 해방 신학자 메리 데일리(Mary Daly)죽음 소식을 접했다. 그를 되새기며 그의 책 어느 부분을 다시 찾아 읽었다. 트위터에 이렇게 적었다.

메리 데일리(Mary Daly). 그가 최전방까지 밀고 가 마련한 신학적 비판과 상상력의 경계와 공간 때문에, 여전히 마초에서 벗어나지 못한 나 같은 이마저 얼마나 너른 자유의 숨을 쉬었던가!

그러더니 다시 영화 아바타의 모순된 이미지들의 향연이 떠올랐다. 다시 트윗팅.

이미지들의 복합체인 영화 아바타의 궤도를 교정할 수 있는 하나의 길은, 역시 메리 데일리 같은 이들이 제안하는, 잊혀진 전통의 복원을 통한 상상력과 (남성적) 지배의 의미 구조와 역사에 대한 급진적(근본적) 비판과 반성이겠다.

중첩된 이미지들과 오염된(순수는 환상이니까) 이야기들이 겹친 시나리오는 언제나 ‘제멋대로’ 해석을 열어둔다. 그 해석의 다양성은 좋은 작품임을 드러내지만, 종종 그 중첩과 오염 속에서 그 비판적 의미의 궤도를 잃기 때문이다.

비판과 반성이 우리의 상상력을 가두지 않는 것이었으면 한다. “마당은 삐뚤어졌어도 장구는 바로 치렸다.”

(허튼 글이지만, 우리 식구를 위로하려고 영화표를 마련해 준 김인태(@tuesdaymoon)님의 따뜻한 마음에 드린다.)

13 Responses to “[아바타]와 브룩스의 “메시아 콤플렉스””

  1. 민노씨 Says:

    아주 재밌게 읽었습니다. : )
    앞으론 ‘주낙현 신부의 영화 이야기’를 연재하셔도 좋을 것 같은데요?

    마지막 문단의 “비판과 반성이 우리의 상상력을 가두지 않는 것이었으면 한다.”라는 문장이 저 스스로에게도 참 많은 자극을 줍니다.

    또 아바타를 “가족영화”로 이야기하시면서, 딸아이의 이야기를 전해주는 부분은 마치 그 아이의 안타까운 표정이 보이는 듯 하네요. “막 아홉 살이 된 딸 아이가 관람 후 대뜸 슬픈 영화로 단정 짓자, 둘은 입을 맞춘 듯 나비 족 공동체의 뿌리였던 멋진 나무가 폭격당해 무너지는 장면이 가장 마음 아팠노라고 했다.”

    추.
    제가 “모든 일에 꽤 회의적이고 사사건건 시비를 거는 듯한” 블로거라뉘… ㅠ.ㅜ;;
    앞으론 긍정적이고, 뽀샤샤한 모습도 보여줘야겠습니다. ㅎㅎ.

    [Reply]

    fr. joo Reply:

    민노씨 / 재미있게 읽으셨다니 기쁩니다. 이 글은 ‘영화’에 대한 글이라기 보다는 브룩스의 칼럼에 대한 이견 정도이니, ‘영화 이야기 연재’는 사양할래요. 저 같은 사람까지 끼어들면 안되지요. 좋은 영화 글쟁이들이 있으니 그것 보면서 즐기다가 허튼 생각 하나씩 보태면 될까 싶어요.

    추.
    블로거 민노씨에 대한 사적인 ‘애정’에 대해 잠시 거리감을 두자고 묘사한 내용이 제가 보기에도 참 건조하군요. 그래도 저는 그 “꽤 회의적이고 사사건건 시비를 거는” 블로거에게서 많은 걸 배웁니다.

    [Reply]

  2. 아거 Says:

    진보들이 표현하지 못했던 줄거리 비평을 먼저 선점하고 나선 ‘세련되고 영리한’ 보수 논객의 덫에 많이 걸려들었다는 지적에 크게 공감합니다. 전문 번역하면서 그 안에 숨은 정치적 덫들을 함께 지적할까 생각하다가, 그냥 두었는데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구체적으로 데이빗 브룩스의 의도적인 불평에 신부님께서 메스를 가해 주셨습니다.

    신부님의 말씀 중 다음 대목에 날이 시퍼렇게 서 있다는 생각입니다.

    1. 영화는 이미지들의 복잡한 운동이다. 이미지의 움직임은 시나리오를 뛰어넘는다. 그렇지 않을 바에야 수천억 원을 들여 빤한 ‘콤플렉스’ 영화를 만들겠는가?

    2. 게다가 그는 이 영화를 ‘우화’로 단정해 버린다. 영화가 내포할 수 있거나 해석될 수 있는 현실성을 저만큼 비켜나가게 하고 저열하다는 인상을 받게 한다.

    3. 그는 교활하다. “미국 군대가 죽임을 당하는 것을 구경할 기회를 준다”는 점에서 실은 자신이 불편한 것이다. 대답을 위한 가정은 이를 회피하기 위한 수단이고, 여기에 독자들은 걸려 들어, 짐짓 ‘문화제국주의’를 찬양하고 나선 것은 아닌가 하고 헷갈려 하기 시작한다.

    4. 온갖 이미지의 운동 속에서 서로 부딪히는 여러 모순은 시나리오를 넘어서는 상상력을 자극하고, 그 수많은 모순의 경계 안에서, 독자/관람자는 자신의 삶의 처지에 따라 그 해석을 다양하게 펼쳐 나갈 것이다. 그 수용과 해석의 다양성과 폭이 넓은 만큼 그 영화는 문제작, 나아가 좋은 작품으로 남을 수 있는 더 많은 여지를 얻을 것이다.

    5. 실은 그 글이야말로 “부시의 메시아 콤플렉스”가 되고, 이 영화평이야말로 “아바타의 메시아 역설”이라고 했어야 정직한 것이었다. 허위 정보에 입각한 부시의 이라크 전쟁이야말로 비뚤어진 ‘메시아 콤플렉스’였고, 아바타는 ‘군산복합체’와 ‘제국주의적 침략과 식민지 개척’이라는 명백한 사실을 비추고 있기 때문이다.

    6. 오지랖 넓은 그 보편성은 매혹적인 비판점을 아우르는 듯하지만, 그 사이에 감추는 것들이 많다. 대체로 많은 보수주의자에게서 보이는 이 버릇과 복합감정은 종종 근본주의자들과 근사치를 이루는 일이 빈번하다.

    7. 비판과 반성이 우리의 상상력을 가두지 않는 것이었으면 한다. 그리고 “마당은 삐뚤어졌어도 장구를 바로 치렸다.”

    [Reply]

    fr. joo Reply:

    아거 / 아거님의 친절하고 생생한 번역이 아니었다면, 살펴보지도 글을 쓰지도 않았을 거에요. 아거님의 세심한 분석이 없기에 누군가에게 떠넘겨 기다리시는 것은 아닌가 했어요. 그래서 제가 낚인 거고요. ^^ 그나저나 진정한 무사는 칼끝을 보이지 않는 법인데, 여전히 서툴게 속마음을 쉽게 들키는 아직 ‘초짜’입니다. 하기야 신부가 무사가 될 필요는 없을 테니까, 하며.

    구질구질한 글인데, 핵심 정리를 분명하게 해주셨네요. 오히려 제가 다 정리가 될 정도입니다. 글은 명료하게 써야 하는데, ‘모호함에 대한 발견과 향유’에 더 끌리는지라 늘 이렇습니다.

    [Reply]

  3. 아거 Says:

    ‘정교하고 세련된’ 보수논객이라고 칭했는데 앞으로는 ‘영리하고 교활한’ 보수 논객으로 불러야 겠네요. ^ ^

    [Reply]

  4. leopord Says:

    영화를 아직 보진 않았지만, 데이빗 브룩스와 신부님의 글을 대조하면서 읽으니 나름 짚이는 점도 있는 것 같습니다.ㅎㅎ; 비평이란 좋든 싫든 작품(대상)에 대한 관찰인 동시에 자신(주체)의 상상을 끄집어내는 행위니만큼, 이 둘 사이의 긴장을 통해 비평 주체의 의식-무의식이 드러나는 걸 피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지적하신대로 브룩스의 논지에 (한국의 정치 스펙트럼 지형에서) 진보적인 부분들이 보수주의자의 고집과 얽혀있어 꽤 고도의 글쓰기 전략이라는 인상이 들기도 하고요.

    [Reply]

    fr. joo Reply:

    leopord / leopord 님처럼 섬세한 눈을 지닌 분이 영화를 보시면 좀 더 흥미로운 생각을 하실 수 있을 것 같아요.

    [Reply]

    leopord Reply:

    아휴. 제가 바로 둔한 눈초리와 서투른 손가락으로 글이나 끄적이는 한량인지라 부끄럽습니다. 조금이라도 더 예리하게 다듬어야 할텐데요.

    [Reply]

    fr. joo Reply:

    leopord / 어쩌면 다듬어지지 않고 생기있는 서툰 시선이 더 중요한지도 모르죠. ^^;

    “Ruffle the perfect manners of the frozen heart, /
    And once again compel it to be awkward and alive… ”
    (W.H.Auden)

  5. 프란시스 Says:

    신부님, 역시 영상대학원 특강오실만하십니다!!^^

    전 약간 다른 접근으로 덧붙이고자 하는데요.
    진중권의 이매진에 언급된 일본의 로봇공학자 마사히로 모리(政弘森)박사의 ‘섬뜩함의 계곡Uncanny Vally’에 대해서 말하려고 합니다.

    로봇이나 그래픽에서 사람을 재현할 때 어느 정도까지는 닮게 보이며 친밀도를 높이지만 어느 순간 정체되며 더 나아가 혐오감을 준다는 겁니다. 아바타에서 나비족이 푸른 얼굴을 한 것은 어쩌면 기술적인 문제였을 수도 있습니다. 아무리 닮게 3D그래픽 처리를 해도 마치 시체나 좀비를 보는 것처럼 재현에는 실패했을 것이 뻔합니다. 물론 아무리 파란 얼굴이라도 시고니 웨버로 변한 CG가 웃을 때의 그 언캐니함은 사라지지 않지만 말입니다. 몰입을 위한 상업영화의 쉬운 분칠입니다.

    예전에 한국영화가 미국비디오 시장에 들어갈 때 자막을 싫어하는 미국시청자들을 위해 성우더빙을 하는데 미국인이 아닌 호주인 성우더빙을 했었습니다. 호주 악센트가 아시안스럽다고 느꼈나봅니다. 마치 제가 해적판 디즈니만화 ‘타잔’을 말레이시아어을 볼 때 느꼈던 자연스러움과 비슷한 것과 마찬가지겠지요.

    영화 보는 내내 전 왜 나비족이 총 쏘는 법을 안배웠는지 이해가 안됬습니다. 끝까지 총을 안쏘더군요. (총을 안쏴도 이기는 굉장한 나비족인 걸까요.. 환타지지만 말입니다. 활들고 창들고 전쟁에선 이기지만 안습입니다 ) 전에도 말씀드린 적이 있는데 서양기자가 달라이 라마를 앉혀놓고 폭력은 어떤 경우에도 정당화될 수 없다는 말을 앵무새처럼 반복시키는 것이 기억나는데 아바타도 그런 지겨운 훈계같은 영화가 아닐까 의심합니다… 아시아인이나 대안적 삶을 꿈꾸는 좌파가 착하다는 건지..바보라는 건지. 갑자기 신부님의 의견이 궁금해지는데요? ^^ 폭력에 대한 성직자의 입장이랄까요? ㅋ

    [Reply]

    fr. joo Reply:

    프란시스 / 프란시스다운 흥미로운 지적 고맙습니다. 만약 “정체된 친밀감=혐오감”이라는 기술상의 문제를 비켜나가려고 푸른 색 얼굴을 선택했다면, 항간에 떠도는 어떤 인종적 색깔의 조합에 대한 의심은 괜한 것이 될 수도 있겠군요.

    몰입을 위한 분칠이라는 방법이란 점에서 보자니, 비행기 안에서 구부리고 본 영화 [디스트릭트 9]의 외계인들에게 몰입되지 않았는지 알 것 같습니다. 불법 이민자/슬럼의 주민/철거민 등을 상징할 만한 그 외계인들에 대한 감정적인 몰입이 어려워졌거든요. 물론 감독은 일부러 그걸 배제한 것이었는지도 모르지만(비슷함이 아니라 철저히 다른 낯선 것으로 만들어서).

    나비 족의 저항 방식과 관련하여 비폭력주의에 대한 어떤 중산층 이데올로기(특히 리버럴 백인 중산층의)를 의심하는 면은 흥미롭습니다. 그것이 폭력과 전쟁인 한, 그것이 제3세계의 저항 이데올로기이든, 백인 리버럴 중산층의 이데올로기이든, 이 문제는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신학의 오랜 주제이지요. 또 그것은 선악의 투쟁에 어떻게 참여할 것인가에 대한 물음도 제기한다고 생각합니다.

    소재는 다르지만 비슷한 맥락에서 ‘폭력과 정당한 전쟁’에 대해서 언급한 글을 링크합니다. 그리고 1958년 시인 W.H.Auden 적은 “[반지의 제왕] 서평”에 대한 제 트위팅 구절을 옮겨다 놓습니다. 저는 입장을 가진 지도자라기보다는 여전히 갈등하는 중생이기에.

    성공회와 평화주의, 그리고 C.S. 루이스 « 성공회 질문 답변 http://bit.ly/8fls1y

    W.H. Auden – [반지의 제왕] 그리고 선과 악 (트위터 @viamedia)

    선과 악 1: 결국 선이 이긴다는 이야기는 그것이 힘에 의지하는 것일 때 오히려 모순적이다. 사랑과 자유인 선은, 선이기를 포기하지 않는 한 그것을 힘으로 강요할 수 없기 때문이다. 현실에서는 정의롭든 불의하든 힘 있는 편이 이긴다.

    선과 악 2: 그러나 악은 선이 가지는 상상력에서 열세이다. 선은 그것이 악이 될 가능성을 상상하여 이를 거부하지만, 악은 그 자신 말고는 상상할 수 없다. 그것이 악의 눈을 가린다.

    선과 악 3: 악은 선이 절대 권력의 반지를 파괴하리라고는 전혀 상상하지 못했다. 지배와 공포에 대한 욕망 만이 사우론을 이끌었던 것. – W.H. Auden, 1956. [반지의 제왕] 서평 http://bit.ly/52y4LJ

    [Reply]

    프란시스 Reply:

    신부님의 관찰에서 잠깐 딴 생각이 들었는데요.

    최근의 아바타 현상과 맞물려 재밌는 건 보셨던 ‘디스트릭트9’의 기술수준도 아바타에 뒤지지 않음에도 그렇게 열광하지 않았던 이유는 뭘까입니다.

    리얼한 환타지(?)가 CG화된 재현된 리얼을 압도하는 것일 텐데요. 아바타를 보고 우울증이나 자살충동을 느꼈다는 사람들이 많다는데 이제 우리가 보는 스펙타클은 리얼을 넘어 하이퍼리얼로 치닫고 있는 것 같습니다.

    단순히 파란얼굴의 분칠이라고 말할 수 없는 다른 차원의 문제라고 할까요. 현실보다 더 현실같은 그 너머의 초현실이 눈 앞에 펼쳐지고 있는데… 그 끝은 어딜까요.

    메가처치도 2000천억원짜리 교회도 점점 하이퍼 리얼해져가는 사람들의 스펙타클을 따라가는 것 같습니다. 이제 리얼은 없어지는 것이죠. 오래된 교회가 주는 성사적, 성서적 환타지보다 이젠 자본의 교회가 주는 하이퍼 환타지에 어쩔수 없이 매달리게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어쩌면 적그리스도가 하이퍼 리얼 아바타로 나타날 수도 있겠어요. 충분히요… 제가 너무 나갔나요? ㅎ

    [Reply]

    fr. joo Reply:

    프란시스 / [디스트릭트 9]는 펼쳐지는 내용과 주제들이 좀 무거웠던 것 같아요, 그 기술을 보기에는 ^^

    [스펙타클]을 찾는 사회에 대한 언급과 교회에 대한 연결이 흥미롭군요. ‘너무 나가서’ 그 힘을 ‘적그리스도’와 연결시키는 것 역시. 실제로 그에 대한 암시가 묵시록 등에는 여러 모양으로 드러나기도 합니다.

    늘 고민스러운 주제입니다. 이미지는 드러내기도 하고, 그만큼 덮어 감추기도 합니다. 이게 종교에도 해당하는데, 종교적 담론이 해방의 담론의 될 수도 있지만, 금세 억압의 담론이 되기도 하니까요. 그 ‘금세’의 순간에 실은 ‘스펙타클’한 권력이 자리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권력은 그 놀라운 힘의 이미지로 사람을 유혹하고, 다시 그에 포섭된 사람들의 놀라운 수와 양에 기대에 그 힘의 근거를 구축한다고 봐요.

    반면, 성서적/성사적 판타지는 여러모로 자신을 부인하고 초월하도록 도전하니 불편하죠. 그런 점에서 ‘하이퍼 리얼 판타지’는 적절한 인정과 적절한 초월을 제공하는데다 여가의 공간까지 마련해 주잖아요. 여러 진보적 종교인들이 고민하는 딜레마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Leave a Rep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