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감 – 권력의 식별과 구원

성인들이 드러낸 영성의 핵심에는 늘, 기꺼이 ‘루저’가 되는 행동이 있다. 그런데 성인들의 삶에 깃든 영성을 팔며 소비하는 이들에게서 ‘성공’과 ‘업적’에 대한 강한 집착이 자주 엿보인다. 게다가 그 도통함은 종종 권위주의적이고 탐욕스럽기까지 하다.

삶은 권력관계다. 자신이 얽혀있는 권력관계에 대한 섬세한 자각과 성찰이 없이는 개혁이니 진보, 영성이니 도통이니 하는 것들은 대체로 의식/무의식의 자기기만이다. 그러니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한 수사학에 불과한 일이 많다.

자신들에게 도전하면 ‘응, 다 알아’, 혹은 ‘너희는 복잡한 속내를 몰라서 그래’라며 입을 막곤 한다. 그러나 자신을 예외로 두고는 변화는 없다. 이를 살피지 않고 영성을 말하고 도통한 척들 하니 소위 ‘진보적’ 교회 꼴이 어떻겠나?

80년대를 거친 낭만적이고 나이브한 운동권 신학이, 이후에 성취한 기득권과 만날 때, 더욱 공고한 권력체계를 구성한다. 그 나이브한 낭만성에서 비롯한 진보의 수사학이, 그 세대의 강렬하고 ‘유니크’한 경험에서 비롯된 문화가 지배하는 구조가 만났기 때문이다. 그 수사학은 혹하도록 멋지지만, 텅 비었다. 한편, 그것을 참을 수 없기에 관습화한 권위주의로 바꿔 채운다.

결국, 열망이 식은 자리를 탐욕이 대신 꿰찬다. 그런데도 그것을 계속 열정이라 우긴다. 그 열망을 부인하면 자신의 기득권을 변호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적 식별에서 핵심은 열망과 탐욕을 식별하는 일이다.

갖지 못한 이들은 열망하되 탐욕할 수 없다. 이들이 험하고 거친 것은 탐욕 때문이 아니라 현실의 고통 때문이다. 자리를 차지한 사람이 여전히 영적 식별을 하려 한다면, 이제 타자가 된, 그리고 타자의 고통스러운 열망에 귀 기울여 자신의 초심을 되살릴 길밖에 없다.

구원은 늘 밖에서, 그리고 깨진 틈 사이와 상처에서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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