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눔에 관한 상념 1: 권력의 지점
한국의 성공회 신자들은 세계 성공회 여러 곳에서 진행되거나 논의되는 사안들, 신학적이고 신앙적인 고민과 경험을 우리말로 적절하게 소개받지 못한다. 언어의 벽 때문이다. 이 벽에 문제가 없는 이들이 꽤 많지만 자기가 듣고 본 것을 대체로 나누는 일에는 인색한 듯 보인다. 그동안에 소식과 정보를 접하는 이들과 그렇지 못한 이들의 간극은 넓어진다. 정보에 대한 노출과 소유가 사적인 부분으로만 끝난다면 굳이 문제 삼을 일이 아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기 때문에 문제다. 관계의 그물망인 교회 안에서 정보를 가진 이들과 정보를 갖지 못한 이들 모두에게 왜곡은 점점 커진다. 이 왜곡은 모두 전략적인 갈등에서 비롯한다.
어떤 지식과 정보를 소유한 이는 ‘권력자’다. 의식하든 하지 않든, 그 정보력은, 그것을 못 가진 사람에게는 분명히 권력이다. 여기까지는 중립적인 의미의 ‘권력’ 혹은 ‘권력자’이다. 그 중립이 깨지는 것은, 흔히 생각하는 대로, 그 권력을 오용하여 휘두르는 순간에 생기는 것만은 아니다. 그 정보력, 그 권력을 공유하지 않고, 그 간극을 계속해서 유지하는 순간, 이미 중립은 이름뿐이다. 소극적으로는, 지식과 정보의 공유를 머뭇거리는 일, 중립적인 듯하면서도 정보의 간극을 좁히지 않고 내버려 두는 일, 좀 더 적극적으로는 그 정보력을 이용하여 누군가를 무시하고 억누르는 일, 이 모두, 이미 중립을 벗어난 권력의 억압적 행사이다. 다시 말해 적극적으로 나누지 않는 한, 정보를 더 많이 가진 자는 억압을 행사하는 권력에 한 발을 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시각은 ‘권력’을 가진 이들의 일방적 시각이기도 하다. 지식과 정보가 별로 없다고 치부되는 이들은 정말로 권력이 없는가? 그래서 그냥 수동적인 위치에 머물게 되는가? 천만의 말씀이다. 누군가가 어떤 형태로든 ‘소유’에 기반을 두어 권력을 드러낼 때, 같은 형태의 권력을 갖지 못한 이들은 늘 대체 권력으로 자신을 방어한다. 경험과 경륜이 단적인 예이다. 아무리 공부를 많이 한 학자가 있어도, 그 앞에서 경험과 경륜을 내세워서 그 지식과 주장과 대결할 수 있다. 당연한 근거이고 권리이다. 문제는 지식의 권력을 전혀 인정하지 않고,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자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대체 권력의 의욕이라 할 만하다. 이 순간 자기 방어 기제 역시 권력화의 길로 들어선다. 자기 말고는 누구의 말도 듣지 않는다. 자기만의 폐쇄 회로를 작동시킨다. 종종 이를 통해서 다른 이들을 역시 무시한다.
이 현상을 달가워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 교회는 이 오래된 평행선을 교차시킬 생각이 없는 것 같다. 사실 그 교차를 위한 나눔은 서로 부대끼는 일이고 힘겨운 일이다. 대체로, 불편한 일이고, 도전받는 일이다. 그 탓일까? 지식과 정보를 가진 이들은 적극적으로 나누고, 그것을 다른 이들의 경험과 경륜에 비추어 좀 더 구체화해서 도전하여 서로 자라나려는 일들을 쉽게 찾아볼 수 없다. 그러면서 필요에 따라 적절하게 서로 탓하고, 필요에 따라 적절하게 서로의 권력을 승인해 준다. 시간이 갈수록, 그 간극이 좁혀지기는커녕 더 깊어지고 넓어진다. 서로 이 간극을 전략적으로 이용하는 셈이다. 지난 몇십 년 동안 교회 내 의사소통의 내용과 방식은 더 나아지지 않았다는 생각이다. 외양과 수사는 화려하지만, 그 실천의 내용과 질은 퇴보했다고 본다.
지나치고, 단순한 시각이요, 억울한 평가라 볼 멘 소리 할 수도 있다. 이 진단이 잘못이길 바란다. 다만, 서로 적극적으로 나누지 않는 한, 서로에게 억압자가 되고, 서로에게 피해의식을 느끼며, 서로 반목한다. 학교와 교회는 서로 억압하고 억압당하며, 성직자와 신자는 서로 억압하고 억압당한다. 성직자 고하는 서로 억압하고 억압당하며, 신자의 연륜 고하는 서로 억압하고 억압당한다. 이 전략에서만큼은 모두가 억압자이고, 모두가 피억압자이다. 그러나 서로에게 모두 안전한 관계이기에, 이 평행선은 유지된다. 무의식으로나마 모두 야합하는 전략이다.
여기서 그치고 마는 것일까? 사실, 그동안 그 권력의 이득을 챙기는 이들은 따로 있다. 어느 쪽에서나 좀 더 많이 가진 이들이 좀 덜 가진 이들의 것을 차지한다. 평행의 선로를 끝 없이 죽어라 놓는 이들이 있다면, 그 위를 멋 부리며 기차를 모는 이들은 따로 있다. 그 기차에 편히 몸을 얹은 이들이 그 기차를 멈추겠는가? 변화는 선로를 놓는 이들에게 달려 있다. 스스로 기차에 올라 타고 있다거나, 언젠가 선로 노역을 벗어나 기차에 올라 탈 수 있다는 삿된 기대에서만 벗어난다면.
이 거친 평가를 인정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 순간 우리는 다시 도돌이표가 되고, 자신을 변명하기 위한 반목의 평행선은 계속 유지된다. 그러니 주장하거나 이식하려 들지 말고, 적극적으로 나눠야 한다. 그리고 그 나눔의 씨앗이 있다면 거름 주고 키워내야 한다. 그 나눔의 다양한 가지를 계속 일으켜야 한다. 우리 교회를 살려 지탱할 유일한 방법이요, 궁극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June 19th, 2010 at 7:57 pm
“평행의 선로를 끝 없이 죽어라 놓는 이들이 있다면, 그 위를 멋 부리며 기차를 모는 이들은 따로 있다. 그 기차에 편히 몸을 얹은 이들이 그 기차를 멈추겠는가? 변화는 선로를 놓는 이들에게 달려 있다. 스스로 기차에 올라 타고 있다거나, 언젠가 선로 노역을 벗어나 기차에 올라 탈 수 있다는 삿된 기대에서만 벗어난다면.”
>> ‘변화는 선로를 놓는 이들에게 달려 있다’ 라는 말이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선로를 깔던 사람들이 선로깔던 일을 던져버리고 폼나게 기차위에 올라타고 가면서 벌어진 웃지 못할 사건들이 많았죠.
>> 그런데 신앙인들에게는 선로를 까는 것이 만인의 구원을 위한 노력으로 볼 수도 있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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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 joo Reply:
June 20th, 2010 at 12:43 am
1) ‘폼나게 기차 위에 올라 탄 사람들과 웃지 못할 사건’ –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텐데요.
2) 그리스도교 신앙에서는 구원의 주체는 하느님이시니, ‘선로 까는 일’은 그 구원의 사건에 동참하는 일이겠지요. 히포의 어거스틴은 이렇게 말씀하셨다죠? “Without God, we cannot; without us, God will n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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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거 Reply:
June 20th, 2010 at 9:37 am
인민들이 없으면 하느님도 구원할 대상이 없으시니 심심하시겠네요.
그래서 노아보고 방주를 만들라고 하신거군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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