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리 주교, 영국 런던 서덕 교구 주교좌 성당 설교
캐서린 제퍼츠 쇼리 주교가 영국 성공회 런던 서덕(Southwark) 교구 주교좌성당에서 주일 미사에서 전한 설교 전문을 번역해 싣는다. 쇼리 주교의 방문과 설교, 성찬례 집전을 둘러싼 여러 논의와 논쟁들이 있다고 하나, 기회가 닿으면 그 논란의 지경을 살피겠고, 우선 그의 목소리를 듣는다. 설교문 및 설교 녹음(영문) 링크
영국 성공회 런던 서덕 교구 주교좌 성당
저는 악명 높은 곳에서 왔습니다. 도박과 성매매가 합법적인 네바다에서 교구장 주교로 일했습니다. 그곳에서 사목한다는 것은 알코올중독 치료 모임에 적용하는 12단계 치유 프로그램을 알코올중독자나 약물중독자들뿐만 아니라, 도박 중독자에게도 적용해서 진행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떤 곳에서는 섹스 중독자들을 위한 프로그램을 열기도 합니다. 제가 거기 있을 때, 꽤 널리 돌던 이야기가 있었는데, 한 신부님이 이른바 마담이라는 포주와 그 고용인들에게 자기가 섬기는 교회에 찾아오라고 권유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떤 교회는 따뜻한 환대를 통해 밤일하는 여성들이 자주 들러 쉬도록 했습니다. 물론 어떤 교회들은 예수님의 저녁 식사 참석자처럼 불평하기도 했습니다. ‘저 여자는 도대체 누가 들인거야?’ 그래서 그 여성들은 그 저녁 식탁에 돌아올 수 없었습니다.
영국 성공회에서는 어떨는지 모르겠지만, 미국 성공회 어느 부류는 장소에 맞는 옷차림을 꼭 갖춰야 한다는 것으로 꽤 유명합니다. 물론 행동거지를 어떻게 해야 할지도 알지요. 이런 식입니다. ‘예배를 드릴 때는 온 마음을 다해서 응답하고, 예배에 쓰이는 여러 책을 적절하게 잘 알아서 찾아야 해. 앞문은 절대 지나다니지 않도록 해야 하고.’ 많지는 않더라도, 교회에 늘 앉는 자기 자리가 있어서 다른 사람이 앉는 걸 싫어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꼭 초대받지 않았더라도 팔을 펴서 누구나 환영하는 교회 공동체들이 훨씬 많다는 것도 압니다.
제게는 연세 지긋한 친구 한 분이 있는데요, 수십 년 동안 대학 채플린으로 일하시던 매우 기발한 신부님이십니다. 한번은 이 분이 미국 횡단 여행을 하며 여러 교회를 방문한 경험을 들려주셨습니다. 캠핑해야 해서 매일 씻지는 못했죠. 그런데 성직 셔츠를 입고 교회에 가면 다른 대접을 받더라는 거에요. 몰골이 말이 아니더라도 말이죠. 로드 아일랜드 교구의 주교님은 임기 중 마지막 안식년의 일부를 노숙인으로 사는 것이 무엇인지 배우면서 보냈습니다. 여성 주교인 이 분은 자기 교구에서 운영하는 노숙인 쉼터에서 잠을 자고, 주일에는 그 위층에 있는 교회에 참석했던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사람들은 주교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교회에서는 노숙인인 자신을 환영해 잘 대접해 주는가 하면, 어떤 교회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같은 줄 바로 옆에 앉은 냄새 나는 노숙인 안에서 사랑의 주님을 볼 수 있거나, 기꺼이 보는 일은, 참 어렵습니다. 불청객 안에서 주님을 발견하는 일은 정말 쉽지 않습니다.
그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이 ‘타자’를 두려워하도록 할까요? 우리의 오랜 유전자 기억에는 낯선 이를 만나면 곧장 각성 상태로 이끄는 어떤 장치가 존재합니다. 이것은 하나의 생존 장치입니다. 낯선 이를 경계함으로써 우리 인간은 지난 수천 년 동안 살아남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를 그렇게 만드는 또 다른 것도 있습니다. 좀 더 신학적인 용어로 말하자면, 그 사람의 죄를 두고 냉큼 심판하려는 비약이 그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자신의 죄성, 그리고 경쟁하려는 경향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어이쿠, 고맙게도 저 여자는 나보다 훨씬 더 죄 많은 여자야. 감사합니다. 하느님.’
시몬의 집을 배회하던 그 여인은 머리를 가리지 않고 들어옵니다.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 거리에서 몸 파는 여자 아니야?” 사람들이 웅성거릴 때, 여인은 정말이지 당혹스러운 일을 벌이고 맙니다. 주님의 발 앞에 엎드려 눈물을 쏟고, 그 눈물과 머리카락으로 주님의 발을 씻습니다. “저런 저런, 저 여자 이제 향유를 발라주고 있네. 어떻게 이런 일을 가만 보고 있지?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 거야? 이제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어떤 작자들인 줄 알겠네, 알겠어 할 것 아냐? 참 내.”
저들이 과도하게 혹은 부적절하게 사랑한다고 생각하기에, 그 다른 사람들에게 쉽게 덮어씌우는 경멸은 아직도 잘 알려져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예수를 향한 이 여인의 사랑스러운 응답이 바로 그 여인의 용서를 이끌어 냈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그 여인이 하느님과 맺은 올바른 관계를 축하했습니다. 그 여인은 그걸 청한 적이 없습니다. 예수께서는 여인에 대한 용서의 증거가 이미 드러났다고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충분히 꾹꾹 눌러 담고도 넘치는 어떤 것이었습니다. 여인의 눈물과 머리카락과 나르드 향처럼 말입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몰아냅니다”(1요한 4;18). 예수님은 이 말씀을 끊임없이 반복하셨습니다. 우리 자신의 영혼 안에서 꿈틀거리는 자신의 비참함에 대한 두려움이 바로, 우리의 자매와 형제에게서 우리 자신을 몰아냅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하도록 하는 유일한 것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두려움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대체로 우리 주변 사람들 속에서 그 두려움을 발견합니다. 예수께서는 죄인들과 식사하는 일을 두려워하지 않으셨습니다. 시몬과 그의 다른 식객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께서는 이 거리의 여인이 자신의 명성에 어떤 영향을 끼칠까 두려워하지 않으셨습니다.
이 용서받은 여인은 탕자의 누이입니다. 그들은 모두 우리의 오누이들입니다. 스스로 의로운 척하는 껍데기를 버리고자 할 때, 우리는 이들 가족에 합류할 수 있습니다. 그 껍데기는 우리 자신이 완전히 알려지기를 바라는 마음을 덮어 버립니다. 우리 자신이 그처럼 사랑받을 만한 사람이라고 여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껍데기가 바로 우리와 마음 깊이 ‘고향으로 환대’하는 사건 사이를 가로막는 유일한 것입니다. 이 껍데기를 벗겨나가도록 하는 일은 위험한 모험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무릅쓸 모든 위험은 사랑입니다.
그것이 바로 바울로 성인께서 갈라디아 서신에서 말씀하신 바입니다. 바울로 성인은 자신이 율법에서 지시하는 세부 사항을 지키는 것이 마치 베니어합판의 여러 층을 쌓아 붙이는 것과 같다는 점을 깨달았습니다. 이 쌓여가는 층들이 합판을 강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그 층들은 인간 안에서 벗겨져 나가야 할 것들입니다. 투명함과 맞바꾸어야 할 것들입니다. 그 층들은 우리를 하느님과 누리는 바른 관계로 이끌지 못합니다. 사랑이 그리로 이끕니다. 바울로 성인은 말씀합니다. “만일 내가 전에 헐어버린 것을 다시 세운다면 나는 스스로 법을 어긴 사람이 될 것입니다.” 껍데기로 층층이 덮여 있는 자아는 상처받을 만큼 충분히 연약하지 않기에, 우리에게 주어지는 사랑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우리는 저기 있는 사람 안에서 사랑을 향한 인간의 속 깊은 열망을 발견할 수 있나요? 거기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열망을 되새기고, 그 연결점을 발견할 수 있나요? 그것은 자비심입니다. 바로, 사랑에 우리를 여는 것입니다.
심판과 정죄가 아닌, 자비행이야말로 껍데기를 벗기는 한 시작입니다. 저녁 식사에 초대받은 모든 이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이 몰인정한 주인과 그 손님들에 대한 사랑을 발견할 수 있다면, 그 식사 잔치는 훨씬 더 흥미롭게 진행될 테니까요. 이들을 저버린다면 자비심의 실제 가능성을 닫아버리는 일입니다. 그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우리가 감수할 위험은 우리 자신의 마음이요, 그 여인의 눈물이 흘러 넘친 것처럼, 그들도 흘러 넘칠 가능성입니다. 껍데기가 벗겨나가도록 놔두는 일은 아주 모험 어린 큰 위험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감수할 위험은 그 껍질 밑에 있는 한 형제요, 자매를 발견하는 일입니다.
예수께서는 우리 모두를 이 동적인 잔치에 초대하십니다. 그분은 이 저녁 잔치를 시몬에 남겨 두시고, 다른 곳을 방문하러 떠나십니다. 방탕한 이를 향한 사랑과 방탕한 이를 향한 용서가 필요한 곳으로. 그분의 길동무들은, 말 그대로 그분의 식탁 동료는, 그 열두 명과 “악령이나 질병으로 시달리다가 나은 여자들”이었습니다. 흠… 굳세고 건강한 여인들이었습니다. 그들 가운데 셋은 이름도 적혀 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 요안나, 수산나입니다. 다른 여러 사람과 함께, 그들은 그 공동체를 돕고 먹였습니다. 그들은 잔치의 주인이 되었습니다.
깊이 받아들여지고 깊은 사랑을 알게 되어 치유와 용서를 얻은 이들은 다른 죄인들을 찍어 내려는 자기 방어적인 껍데기를 버릴 수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머리를 가리고 눈물을 감추거나 값비싼 향유를 숨겨두는 일이 사랑을 펼치는 길이 아니라는 점을 깨닫습니다. 그 깨달음이 다른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들지라도 말입니다. 결국, 그 깨달음은 그들 자신을 하느님 나라의 잔치에 마련된 자리로 이끌었으며, 이로써 그들 자신의 두려움에 대한 염려마저 치유했습니다. 이 식탁에 우리를 위한 자리가 마련되어 있습니다. 환대의 눈물과 떠돌이의 입맞춤, 그리고 고향의 맛 난 냄새가 있습니다.
이 잔치에 함께 하시렵니까? 여러분을 이 자리에 초대합니다. 사랑이 여러분을 구원했으니, 평화로이 나가십시오. 평화에 기대어 낯선 세 사람에게 같은 말을 전하십시오. 여러분을 이 자리에 초대합니다. 사랑이 여러분을 구원했으니, 평화를 누리십시오.
June 16th, 2010 at 6:53 pm
감동적인 설교네요.
오랜만에 ‘비아메디아’에 새 글이 올라와서 참 반갑기도 하고요.
쇼리 주교의 설교를 들으면 사회학적 성찰, 인간 심리에 대한 성찰이 대단히 높다는 것이 그대로 전달됩니다. 거기에 번역하신 주신부님의 따뜻한 음성이 겹쳐지는 것 같네요. : )
사소하게 궁금한 것.
1. “껍데기의 층으로 쌓여 있는 자아는 우리에게 주어지는 사랑을 받아들일 만큼 충분히 유약하지 않습니다.” 이 부분이 문맥상 명료하게 이해되지 않습니다… 특히 “충분히 유약하지 않습니다”라는 부분이요…
2. 마지막 ‘그림’은 따뜻한 느낌이면서도 왠지 기괴한 느낌인데요. ‘하반신’은 왜 그리지 않은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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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 joo Reply:
June 16th, 2010 at 8:31 pm
민노씨 / 여기에 댓글도 주식 트위터에 소개도 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신자들보다 더욱 신앙적인 감수성을 지닌 민노씨를 다시 확인합니다.
궁금한 내용 1) 사소한 것이 아니라, 제 모자란 번역 탓에 그 뜻을 정확하게 전달하지 못했습니다. 가장 좋아하면서도 가장 번역하기 어려운 단어인 “vulnerable”에 걸린 탓입니다. 사실 해당 문단에서 가장 핵심적인 문장이기도 합니다. 여전히 부족하지만, 다시 살펴셔 이렇게 고쳤습니다. (모든 분들에게 – 더 나은 번역을 제안해 주세요.)
“껍데기로 층층이 덮여 있는 자아는 상처받을 만큼 충분히 연약하지 않기에, 우리에게 주어지는 사랑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The veneered self simply can’t be vulnerable enough to receive the love that’s being offered.)
궁금한 내용 2) 아래 그림은 16세기 Giovanni Pietro Rizzoli 가 그린 ‘참회하는 막달라 마리아’라는 제목의 그림입니다. 중세 전설에서는 막달라 마리아가 제자들과 선교를 하다 은퇴하여 동굴에서 참회와 기도 생활로 여생을 살았다고 합니다. 그림도 동굴에 몸을 가린 설정이 되어 있죠. 같은 상황에서 나신 전체가 드러난 작품도 막달라 마리아에 관한 일반적인 예술적 표현이었던 것 같아요. 동굴에서 나신으로 지내는 설정은 아무래도 사막이나 광야의 은수처에서 헐벗은 채로 고행했던 은수자의 이미지를 겹친 것이라 생각합니다. 위 그림은 다른 그림에 비해 제 눈에 더 들었을 뿐이고요 😉 cf. http://goo.gl/dPu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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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ne 19th, 2010 at 2:06 am
심판과 정죄가 아닌, 자비행이야말로 껍데기를 벗기는 한 시작입니다.
가 글의 핵심일 듯 합니다. 제 블로그http://logosblf.egloos.com/2627023에 발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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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ne 22nd, 2010 at 5:03 pm
[…] 말이 무성하다. 일전에 번역하여 올려놓은 미국 성공회 의장 주교인 캐서린 제퍼츠 쇼리 주교의 설교에는 몇 가지 논쟁의 맥락이 있고, 그와 관련된 특정한 사건은 언론을 타고 […]
July 5th, 2010 at 6:52 pm
[…] 한글 설교문 보기 (주낙현 신부님 번역) 주신부님 블로그로 가기 […]
July 17th, 2014 at 6:58 pm
죄많은 한 인간으로서, 가슴 깊이 저며오는 아픔을 느끼게 하는,
그런 강론을 읽게 해 주심을 먼저 감사드림니다.
주제 넘지만…..,
“가식(또는 허식)하는 영혼은, 참된 사랑을 받아들일 만큼 마음이 충분히 열려져있지 못함니다” 로 해석해봄니다.
Giampietrino(지암피에트리노)로 더 많이 알려진 분의,
“참회하는 막달라 마리아” 그림은
“하느님 앞에서 단 한오라기의 가식도 걸치지 않은 영혼”을 그렸다고
보여짐니다만,
굳이 하반신을 다 그려야 (혹은,보아야?) 온전히 벗은 영혼으로 느껴지실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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