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의 그늘 – “재의 수요일” 번역 후기
다시는 돌아가리라 희망하지 않기에
희망하지 않기에
돌아가리라 희망하지 않기에
이 사람의 재주와 저 사람의 기회를 탐내는 일
더이상 이런 것들을 얻으려 애쓰지 않기에
(늙은 독수리가 왜 날개를 펴야 한단 말인가?)
여느 통치의 권력이 희미해진다고
슬퍼해야 할 이유가 있는가?(“재의 수요일” I, 부분)
사순절이 다가올 때마다, T.S. 엘리엇의 “재의 수요일”을 조금씩 번역하여 올려두었다. 이번에 번역을 마쳤다. 번역의 부족함이 분명하지만, 이 일을 하는 동안 그 말에 담긴 생각을 더 느리게 살피며 함께 걸을 수 있었다. 그 동행의 전후 사정과 그 느낌을 모두 적어 밝힐 수는 없다. 그의 시와 시어가 드러내는 대로 삶의 희망과 절망은 너무 얽혀 있다. 지난 몇 년간 내 여러 처지를 되새기고 삶을 관조하는 데 큰 힘이 되었다고만 할 뿐.
(‘재의 수요일’ 표지 및 속지 – 스콧 피츠제럴드에 쓴 시인 친필)
그의 시와 함께 다시 깨닫는 사순절의 의미들: 자기 안에서는 구원을 얻지 못한다는 것. 언제나 구원은 밖에서 ‘틈’과 ‘사이’로 선물로 오는 것이니, ‘도통’하려 들지 말 것, 하느님 앞에서 내 작음을 알되 큰 구원이 감싸는 은총을 거부하지 말 것. 값싼 희망과 절망에 휘둘리지 말 것.
엘리엇은 미국을 떠나 영국으로 귀화하고, 종교마저도 성공회로 이적하여, 자신을 당시 성공회 내 강력한 전통으로 거듭나던 ‘성공회-가톨릭'(Anglo-Catholic)이라 불렀다. 그의 “재의 수요일”은 그런 신앙의 여정과 전통의 성격을 매우 잘 드러내는 탁월한 시로 읽힌다. 언젠가 자신을 “문학에서는 고전주의자, 정치에서는 왕당파, 종교에서는 성공회-가톨릭”이라고 한 것처럼, 가장 고전적인 의미의 보수주의자로서 자신의 덕을 이 시와 다른 글들에서 드러낸다. 인간의 부질없는 작음, 개인이 아닌 공동체 안에서 나누는 책임을 강조하면서도, 이마저 회의와 물음의 대상으로 삼아 덧없는 낙관의 위험을 경계했다. 한편, 끊임없이 ‘초월’이라는 ‘밖’의 은총에 기댔지만, 이 초월은 이미 우리 삶에 여느 구석에서든 만날 수 있는 것이었다. 내가 엘리엇의 몇몇 시와 글에서 발견하는 고전적이며 전통적인 보수의 얼굴이다.
그는 지금 나와 비슷한 나이에 이 시를 출간했다. 비슷한 나이에, 궤를 같이하는 신앙적 전통 안에서, 닮은 정치 신학적 견해를 겹쳐 보며, 스스로 흠칫 놀란다. 나는 전통에 기댄 보수주의자가 아닌가? (물론 나는 그의 여러 ‘보수주의적’ 비관에 모두 동의하지 않고, 그의 ‘보수주의적’ 낙관주의에 다른 비관주의로 대답하겠지만.) 그동안 여러모로 나를 주저하게 하는 내 태생의 ‘보수성’과 씨름했다. 이를 받아들일 무렵, 이미 내게는 그와 정반대되는 딱지들이 셀 수 없이 붙어있었다. 그러나 항변은 부질없는 일이다. 오염 없는 언어가 불가능한 마당에, 이 현실을 인정하고 서로 대화하고 이해하는 약속의 저변을 확대하는 일 말고는 소통은 불가능할 테다. 누구를 비판하거나 나무랄 힘도 이젠 없다. 다만, 희망과 절망이 교차하며 만드는 그늘 속에서 벗을 만나 틈과 틈 사이로 대화하며 기도할 뿐. 구원은 깨진 틈 사이로 드는 빛이니.
다시 돌아가리라 희망하지 않더라도
희망하지 않더라도
돌아가리라 희망하지 않더라도얻음과 잃음 사이에서 흔들리느니
꿈이 교차하는 이 짧은 전이 속에서
탄생과 죽음 사이를 꿈처럼 교차하는 황혼은
(신부님, 저를 축복하소서) 내 비록 이를 바라노라 바라지 않더라도
바위 해안을 향해 난 넓은 창으로부터
하얀 돛배들은 여전히 바다를 향해 비상하느니, 바다를 향한 비상
부러지지 않은 날개들(“재의 수요일” VI, 부분)
February 22nd, 2012 at 1:05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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