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 머튼 – 재의 수요일 생각

“전례의 가장 어두운 순간에서마저 기쁨이 넘친다. 사순절기의 시작인 재의 수요일은 행복의 날이요, 그리스도인의 잔칫날이다.”

토마스 머튼은 “재의 수요일”에 대한 짧은 글을 이렇게 시작했다. 반세기 후 재의 수요일 아침, T.S. 엘리엇의 “재의 수요일”과 더불어 그의 글을 번역하여 다시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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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의 수요일은 자신의 영이 얼음처럼 차가운 물에 젖어 있는 사람을 위한 것이다. 사실 우리는 모두 그런 사람이다. 다만 우리가 그것을 깨닫지 못할 뿐이다.

“재의 수요일 전례는 참회자의 죄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하느님의 자비에 초점을 맞춘다. 죄에 대해 묻는 것은 정확히 말해서 그날이 자비의 날이기 때문이다. 의로운 사람은 자비의 구원자가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사순절기에 시작에 주님께서 당신을 자비로서 우리에게 나타내신 이유가 분명하다. 이 사순절의 목적은 속죄를 위한 것이 아니다. 하느님의 정의를 만족시키려는 일이 아니다. 그분의 사랑 안에서 누릴 기쁨을 준비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준비는 그분의 자비라는 선물로 이뤄진다. 그 선물은 우리가 마음을 열어야만 받을 수 있다. 자비와 함께 동거할 수 없는 것들을 우리 안에서 몰아내야만 받을 수 있다.

우리가 몰아내야 할 것 가운데 첫째가는 것은 바로 두려움이다. 두려움은 우리 마음의 문을 좁게 만든다. 두려움은 우리가 사랑할 가능성을 찌그러뜨린다. 두려움은 자신을 거저 주는 우리의 능력을 얼리고 만다. 우리가 하느님을 지독한 심판자로 보고 두려워한다면, 우리는 신뢰하며 그분의 자비를 기다릴 수 없다. 기도 속에서 신실하게 그분께 다가갈 수 없다. 사순절을 통해서 누리는 우리의 평화, 우리의 기쁨은 은총으로 보장된 것이다.

재로 그은 빛의 십자가를 우리에게 주면서, 교회는 우리 어깨 위에 있는 무거운 짐을 내려놓길 갈망한다. 걱정과 죄책감이 얽혀 짓누르는 무게와 우리 자신을 향한 이기적인 사랑이라는 죽음의 무거움을 내려놓으라는 것이다. 전 세계를 어깨에 진 아틀라스 신처럼 참회의 짐을 스스로 지고 비틀거릴 필요가 없다.

아마도 이런 참회는 조금은 필요할 수도 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라도 교회가 말하는 참회는 해방보다 더한 짐일 수는 없다. 그 짐은 어쩔 수 없이 져야만 하는 짐일 뿐이다. 사랑은 그 짐을 가볍게 하고 기쁨을 선사한다. 바로 이 때문에 재의 수요일은 사랑이 비추는 빛으로 가득 차 있다.

어떤 수도 공동체서는 수사들이 맨발로 나가서 재를 받는다. 맨발로 거니는 일은 즐거운 일이다. 발바닥으로 땅바닥을 느낄 수 있어서 좋다. 신발 없이 걷는 한 사람의 침묵으로 가득 찬 교회가 정적에 들 때가 참 좋다. 왜 굳이 신발을 벗느냐고 궁금해할 분도 있겠지만, 기도는 거추장스럽게 입고 신는 것이 없을 때 훨씬 더 의미가 있다. 교회에서 신발을 늘 벗는 것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아주 기본적인 충만감을 기억하지 못하는 이들이 보기에는 돈키호테 같은 행동으로 비칠 수도 있다.

“재의 수요일처럼 하느님의 자비를 좀 더 따뜻하게 표현하는 시간을 없을 것이다. 하느님의 자비는 친절하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한 없이 따뜻한 사랑을 더해서” 우리를 바라보신다. 입당성가가 울린다. “모든 이들에게 내리는 하느님의 사랑 (Misereris omnium). 주님은 당신께서 창조하신 그 어느 것도 미워하지 않으시니, 참회하고 절제하는 이들의 죄를 눈감아 주시네. 주님은 우리의 하느님이시기에.”

하느님을 미워하는 분이라고 생각하는 일이 만연한 가운데, 이 지혜서의 말씀은 얼마나 좋은가? 하느님을 부인하는 사람들이야말로 하느님을 미워하는 분으로 생각한다. 하느님은 세상을 미워하시고 그래서 세상의 악이 일어난다고 생각한다.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사람마저도 종종 신을 화난 아버지로 생각한다. 화가 난 신은 자기를 거역한 사람들의 악행을 두고 심판하고 복수할 것으로 생각한다. 이런 신은 어떤 사소한 잘못도 참지 못하고 하나씩 세어 천벌을 내리며, 갚지 않은 빚을 전혀 탕감해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런 신은 하느님이 아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가 아니다. 예수께서는 우리의 죄를 숨겨주시고 (dissimulans peccata) 우리 앞에 보이지 않게 하시는 분이시다. 마치 엄마가 아이의 더러워진 얼굴을 금방 닦고 씻어주고 깨끗한 얼굴로 나오도록 하시는 것처럼. 재가 전해주는 축복은 하느님을 “죄인의 죽음을 전혀 바라지 않는” 하느님으로 알게 한다. 그분은 “우리 스스로 선택한 굴욕에 감동하시고, 우리가 보이는 참회를 보고 마음을 달래시는” 분이다. 그분은 어디에서든 “풍요로운 자비”를 보여 주실 뿐이다 (multum misericors).

이러한 하느님의 한없는 자비를 통하여 참회의 선물을 가져 주신다. 이는 비열한 두려움이 없는 슬픔이다. 이 슬픔은 자비로우신 주님의 평온하고 고요한 사랑을 통하여 용서를 받는 것이며, 그 때문에 더 깊고 부드럽다. 전례는 이 사랑을 번역할 수 없는 두 단어로 표현했다 – serenissima pietas. 재의 수요일의 하느님은 고요한 자비의 바다와 같다. 그분 안에는 분노가 없다.”

출처: Thomas Merton, “Ash Wednesday,” Worship 33 (1958): 165-170
번역: 주낙현 신부

3 Responses to “토마스 머튼 – 재의 수요일 생각”

  1. 재의 수요일 미사 안내 : 경계를 걷는 그리스도인 Says:

    […] 토마스 머튼의 “재의 수요일 생각” […]

  2. Hoonseo Park Says:

    사순절의 의미는 사무치게, 의식은 습관적인 통과의례가 되지 않도록.

    [Reply]

  3. 김정환 Says:

    1.'그분의 사랑 안에서 누릴 기쁨을 준비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준비는 그분의 자비라는 선물로 이뤄진다.'

    저는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에 대해, 깊이 회의합니다 그분의 사랑과 자비라는 것이 있다면, 인간과 생명에 대해 대단히 불평등하고 차별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분명합니다

    더 근본적인 회의는, 하느님, 신을 인격적인 존재로 생각하고 받아들이는 믿음이 과연 합당할까요? 그분에 대해 어떻게 알 수 있으며, 알고 있다고 믿는 그것이 과연 그분의 본질인지 어떻게 확인할까요?

    2. '하느님의 자비는 친절하다. … “모든 이들에게 내리는 하느님의 사랑 (Misereris omnium). 주님은 당신께서 창조하신 그 어느 것도 미워하지 않으시니, …”'

    이 부분은 신앙 고백이겠지요 어떻게 생각하면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면 안 된다는 의미가 될 수 있겠지요

    그래도 한 번 질문을 던집니다 '주님은 당신께서 창조하신 그 어느 것도 미워하지 않으'신다면, 생명체를 괴롭히고 심지어는 죽이는 생명체에 대해서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예를 들어 인간의 목숨을 앗아가는 최대의 질병이 암인데, 그 암세포도 그분이 창조하셨을 터인데, 그분은 암세포도 '미워하지 않으'신다면, 인간과 암세포의 관계는 어떻게 될까요?

    3.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기독교 신앙과 신학의 역사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회의해 봅니다 저의 이같은 회의를 하느님, 신을 부정하는 것으로 받아들이진말아 주십시오 삶이라는 실존의 무대에서 일어나고 겪는 다양한 일들을, 한 가지 틀로 재단하지말아 주십시오

    4. 또 생명 현상에 대한 과학의 설명들을 무시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같은 설명들을 신앙과 신학이 다시 풀어 설명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기존의 신앙과 신학의 틀과는 큰 충돌과 갈등이 있겠지만, 과학의 설명은 하느님에 대한 과거의 가르침을 다시 돌아보게 합니다

    5. 올리신 글을 읽으며 마음이 많이 볶였습니다 하느님의 사랑, 자비라, 우리가 겪은 일들이 있고 봐온 일들이 있는데, 어떻게 그런 고백을 내 고백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과연 그런 고백이 맞는 것일까…

    글 잘 읽었습니다 dh

    [Rep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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