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사랑과 사사로운 사랑

히포의 성 어거스틴은 이분법적 세계관을 그리스도교 전통에 깊숙이 남겨 놓았다. 그 이분법의 폐해를 의심하더라도, 수사학자요 신학자요 주교로서, 선과 악의 문제로 씨름했던 어거스틴의 고민은 여전히 우리 현실의 문제이다. 성 어거스틴은 두 도성에 관한 이론을 나름 완비하기 전에, 이미 “창세기의 문자적 의미”라는 책에서 이 문제의 실마리를 풀어놓았다.

사랑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거룩하고 다른 하나는 불순하다. 하나는 사회적 사랑이요, 다른 하나는 사사로운 사랑이다. 하나는 높은 도성에 속한 탓에 공동선을 생각하고, 다른 하나는 그 오만하여 공동선마저도 자기 개인의 것으로 만든다. 하나는 하느님께 순종하지만, 다른 하나는 하느님께 반역한다. 하나는 평온하지만, 다른 하나는 소란스럽다. 하나는 평화스럽고, 다른 하나는 반역한다. 하나는 진리에서 멀어진 인간들의 칭송보다는 진리를 더 중요하게 여기지만, 다른 하나는 어떻게든 칭송을 얻으려고 욕심을 부린다. 하나는 벗이 되고자 하고, 다른 하나는 질시한다. 하나는 자기에게 바라는 대로 남에게도 바라지만, 다른 하나는 남을 자기에게 복종시키려 한다. 하나는 이웃의 선을 위하여 권위를 행사하지만, 다른 하나는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권위를 휘두른다. 이 두 가지 사랑은 처음에 천사들에게서 드러났으며, 하나는 선한 이들에게 깃들고, 다른 하나는 악한 이들에게 깃든다. 결국, 이것이 두 도성을 구별하게 한다. 하나는 정의로운 이들의 도성이요, 다른 하나의 사악한 자들의 도성이다. 놀랍고도 헤아릴 수 없는 하느님의 섭리로 이 두 도성이 인류 안에 마련되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창조하신 모든 것을 관장하시고 다스리신다. 이 두 도성은 세상 속에 섞여 있어 역사 속에서 계속될 것이지만, 마지막 심판이 그것을 가를 것이다. (De Genesi 11:15.20)

흥미롭게도, 아니 당연하게도, 선한 도성과 악한 도성의 차이는 “사랑”의 차이에 기인한다. 탐욕마저도 사랑의 변종일 뿐이다. 게다가 이 사랑의 향방이 세상의 참된 권위, 혹은 권력의 향방을 가른다는 것이 성 어거스틴의 정치신학이다. 사랑의 방향이 하느님의 진리와 이웃의 공동선을 향할 때와 자기 자신의 이익을 위한 권력욕이 될 때가 구분된다. 권위는 이웃의 선을 위한 다스림과, 자신의 이익을 위한 지배욕으로 나뉜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고별 연설에는 사랑의 마음이 절절하다. 그래서 ‘사랑’의 계명을 주시면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이제 나는 너희를 종이라고 부르지 않고 벗이라고 부르겠다.” 성 어거스틴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사랑과 벗”의 관계를 깊이 되새겨 윗글에 적었으리라. 동등한 제자직, 벗 된 제자직이 복음인데도, 질시와 지배, 기어코 무릎을 꿇리려는 허세가 여전히 교회에 득세한다. 어떻게 견디고 이겨낼까?

시인 오든(W.H. Auden)은 일찍이 “반지의 제왕” 서평에서 이렇게 적은 바 있다.

결국, 선이 이긴다는 이야기는 그것이 힘에 의지하는 것일 때 오히려 모순적이다. 사랑과 자유인 선은, 선이기를 포기하지 않는 한 그것을 힘으로 강요할 수 없기 때문이다. 현실에서는 정의롭든 불의하든 힘 있는 편이 이긴다…

그러나 악은 선이 가지는 상상력에서 열세이다. 선은 그것이 악이 될 가능성을 상상하여 이를 거부하지만, 악은 그 자신 말고는 상상할 수 없다. 그것이 악의 눈을 가린다…

악은 선이 절대 권력의 반지를 파괴하리라고는 전혀 상상하지 못했다. 지배와 공포에 대한 욕망 만이 사우론을 이끌었던 탓이다.

다시 이분법적 세계관의 폐해를 염려하면서도, 이렇게 말해야겠다. 이 선과 악의 싸움이 우리 사회 곳곳에도 극명하다고. 선한 일에 힘쓴다는 이들도 실은 무엇인가에 ‘눈이 가린’ 일이 많다고. 이때 선한 이들이 지탱할 끝까지 선한 상상력이 절박하다. 신앙인에게 그 상상력 훈련은 내용 갖춘 성찰이요 기도일테다. 그런데 절박한 만큼, 성찰과 기도가,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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