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간 대화 – 환대의 한 실험

한국 성공회 안에서 대안 교회를 꿈꾸는 “길 찾는 교회”가 불교의 젊은 학승 혜준 스님을 초대하여, 종교간 ‘잡담’을 나누려 한다는 소식을 듣는다. 반가운 소식이다. 실은 경계를 걷는 그리스도인이 ‘열린 포럼’이라는 이름 아래 이곳 이민 사회에서 가장 먼저 추진하려던 일이 바로 이런 ‘종교 간 대화’였다. 그러나 생각지도 못한 일로 그 일이 이뤄지지 못했다. 넓게 말한다면, ‘직업적 종교인’의 눈치 보기 때문이었다. 그런 참에 듣는 이 ‘잡담회’ 소식이 너무도 반가웠고, 바다 건너에서 기쁘게 응원한다.

꼬리 문 생각에 이어 또 다른 독특한 실험이 있어 잡감을 적어둔다.

종교 간 대화 (interfaith dialogue)는 기대와 의혹의 눈초리를 동시에 받는 매우 매혹적인 주제이다. 그동안 종교간 대화는 어떤 양상이었나? 그 양상을 넘어서는 새로운 방법은 없는가?

학자들은 인간이 지닌 종교의 보편성이라는 전제 아래서 비교 대상이 된 종교들의 공통점과 상호 이해를 추구했거니와, 이들은 종종 신학이나 교리에 집중한 면이 많았다. 어떤 이들은 종교 경험에 좀 더 눈길을 돌려 그 실존적인 경험이 서로 겹치는 부분을 강조하며 종교간 대화의 길을 확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것도 여전히 학자들의 몫이었다.

종교간 대화나, 상호 종교 연구가 학자들의 몫이 되는 동안, 그 논리나 담론, 연구 등은 현실의 종교와 현실의 종교인에게는 별로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현실의 종교 생활에서는 전혀 다른 두 길이 엇갈렸다. 즉 전통적으로 자기 종교가 우월하다는 입장에서 타종교인들을 그저 무시하기 일쑤인가 하면, 바로 그 순간에도 사람들은 다종교 상황에서 타종교인을 서로 가족으로, 친구로, 동료로 만나서 살아야 한다.

생활 현장에서 종교 간 대화가 잘 이뤄진 경험이 없지는 않았다. 7-80년대의 민주화 운동 속에서 종교는, 특정 교단의 이름이 아니라, 종교 전체의 이름으로 사회의 불의에 저항하며 싸웠다. 이들은 거리에서 손을 잡았고, 함께 피를 흘렸고, 함께 감옥에 갇히기도 했다. 공동선을 향한 공동의 협력이 종교간 대화의 손쉽고 효과적인 방법이다. 게다가 그 삶의 실존적인 만남은 타종교에 깊은 이해와 더불어 존중심을 갖게 했다.

학자들의 연구와 대화는 계속돼야 한다. 공동선을 향한 노력에서 종교가 함께 협력해야 한다. 그러나 여전히 ‘보통 사람들’은 종교의 다양성에 대해 마음의 문을 잘 열지 않는다. 종교의 다양성은 자명한 현실인데도.

음반사의 기획으로 나온 듯한, 의례 음악 실험에서 새로운 경험을 듣는다. 서방 그리스도교 신앙 전통에서 나온 의례 음악인 ‘그레고리안 성가’와 동양 불교의 의례 음악인 범패가 만나서, 새로운 양상의 종교 간 대화를 들려준다. 이는 분명 실험이다. 그러나 그 공간은 그리스도교의 성당인 것이 분명하다. 이 공간은 타종교인을 환대하는 현실 세계의 공간이다.

이는 책이나 거리가 만드는 공간과 사뭇 다르다. 신앙의 반복과 재현, 핵심이 집약된 공간이 마련한 환대는 낯선 음악을 초대하며, 그 음악의 발언에 조심스럽게 응답하는 모양으로 전개된다. 낯설어 어긋날 것만 같은 종교 의례 음악은 서로 존중하며 어우러진다. 서로 받아들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 와중에 우리는 귀를 열고 그 소리의 흐름에 자신을 내맡길 일이다.

종교와 신앙생활은 언제나 이런 내맡김의 공간과 시간 속에서 일어난다. 종교 간 대화가 학자들의 것이든지, 현장 활동가들의 것이든지, 아니면 보통 신앙인의 것이든지, 이처럼 새로운 공간에서 이루는 상호 환대와 새로운 목소리에 귀를 열고, 마음을 내어 맡기는 체혐을 계속해서 만들어야 한다. 그것이 어떤 ‘잡담회’라 하더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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