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례, 그 낯선 마지막 환대의 잔치

우리는 결국 그 사람을 보냈다…

고 노무현 대통령의 장례식 직전에 여러 사람들과 추모의 시간을 마련했다. 헤아리거나 표현할 수 없는 마음의 먹먹함때문에 작은 시간과 공간에 함께 모이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주위의 성직자들과 신학생들 몇몇이 모여 급히 생각을 모았다. 저마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이 지역 한인 사회나 교회의 보수성에 짓눌려 슬픔도 울분도 잘 나눌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 그런 이들이 한둘이 아닐 테니 급하게나마 자리를 마련하고, 지역 신문과 인터넷 게시판에 광고를 내어 초대했다. 생각보다 많은 이들이 찾아 주셨다.

무거운 마음에 서로 처음보는 이들끼리 서먹한 인사를 나눴다. 헌화도 하고 분향도 하고, 노래도 부르고 이야기도 들었다. 고인의 흔적을 돌아다 보며 눈물을 흘리기도 했고, 한편으론 나눈 이야기들에 웃으며 박수를 치기도 했다. 중계되는 영결식을 함께 보며 분노했고, 눈물 흘렸고, 마음마다 어떤 다짐도 했다. 함께 하는 이런 시간이 그나마 위로가 되었으면 했다. 없는 살림들에 보잘 것 없는 차와 쿠기 몇조각을 준비했는데, 수박이며 샌드위치며 다른 음식을 싸오신 분들이 있어 제법 풍성해졌다. 그 마음들이 참으로 고마웠다.

사회하는 일에 서로들 손사래를 치며 떠미는 통에 나이 한살 더먹었다는 이유로 책임을 맡았다. 그럼 그저 모임을 여는 말만 하겠노라 하고, 나머지는 자연스럽게 맡기자고 했다. 그렇게 했다. 참석자들 모두가 훌륭한 사회자들이었다.

다만 여기에 그 여는 말 하나만 담아 놓는다. 이 “잔치”가 새로운 삶을 여는 축제의 시작이길 바란다.

오늘 이 자리에 우리가 겪고 있는 슬픔을 나누기 위해 찾아주신 모든 분들을 환영합니다.

지난 며칠여 동안 우리는 충격과 경악을 금치 못했고, 이어지는 슬픔 속에서 시간을 보내야 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고인이 되신 노무현 대통령의 영결식을 맞으면서 이 자리에 모여 있습니다.

가만 생각했습니다. 저마다 따로 장례와 영결식에 대한 이해가 있을 것입니다만, 저처럼 시골에서 자라서 우리의 전통적인 장례식을 보고 겪은 처지로서 얻은 깨달음이 있습니다.

장례는 그저 슬픔에만 휩싸여 있는 이별의 시간이 아닙니다. 장례식은 고인이 살아 있는 가족과 친구들을 마지막으로 초대하여 베푸는 낯선 마지막 환대의 잔치입니다. 그래서 우리 전통의 장례에서는 음식이 풍요롭고, 떠들썩하며, 이야기가 넘쳤습니다. 심지어는 노름판도 벌이고, 노래도 춤도 추곤 했습니다.

우리 마음이 그리 쉽게 움직이지 않을 것을 압니다. 그러나 다시한번 고인이 우리에게 베푸는 환대의 잔치로 이 시간을 바라 보았으면 합니다. 가까이 살면서도 멀었던 친구들이 모이고, 나누지 못했던 삶의 이야기들을 나누고, 그것이 슬픔이든 기쁨이든 이 자리에 내어 놓았으면 합니다. 그것이 고인이 되신 대통령께서 남기신 마지막 말씀의 뜻이라 생각합니다.

이 조촐한 모임은 어떤 특정 종교나 정치적인 이념을 넘어서려고 합니다. 그저 우리 삶이 녹아들어서, 우리 한국 사회가 좀더 상식과 원칙에서 벗어나지 않고, 정의가 숨을 쉬고, 자유의 춤이 어우러지는, 그런 꿈들이 잊혀지지 않아야 된다는 소박한 생각때문에 마련한 시간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자연스러움에 맡기려 합니다.

순서의 형식과 통제에 여러분을 끼워 넣고 싶지 않습니다. 적어도 그런 것을 몹시도 싫어했고, 그런 것이 자칫 갈등의 해소라는 미명 하에 또다른 억압이 될 것을 늘 염려했던 고인의 뜻에도 맞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 시간과 이 공간은 고인이 마련한 마지막 환대의 잔치입니다.

여러분이 잔치를 채워 주십시오. 먹을 것도 별로 없고, 술도 없으며, 화투짝도 돌아가지 않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함께 부르는 노래로 채워주십시오.
우리가 함께 읽는 시로 물들여 주십시오.
꽃 한송이를 바쳐서 자유로운 영혼이 가는 길을 축복해 주십시오.
향 하나를 피워서 그 영혼이 자연의 숨결로 녹아들게 해 주십시오. 혹은,
우리가 꿈꾸어야 할 세상, 우리가 이뤄가야 할 세상에 대한 꿈이라도 나눠 주십시오.
그도 아니라면 침묵 속에서, 우리 자신을 돌아보고,
이 순간 자신의 다짐을 살펴보아 주십시오.

이것이 여기에 참석한 모든 분들에게 부탁드리는 것입니다.

종종 고인을 추억하는 동영상도 나눌 것입니다.
그 사이에 누구든 나와서 헌화와 분향도 하실 수 있습니다.
그 사이에 누구든 촛불 하나를 켜실 수 있습니다.
그 사이에 누구든 노래를 부를 수 있습니다.
그 사이에 누구든 시 하나를 읽거나, 이야기를 들려 주실 수 있습니다.
그런 우리의 몸짓 사이에서, 그리고 사이 사이의 공간 속에서,
고인이 바라마지 않고 이루려 몸부림쳤던 그런 꿈이 새로운 한 발을 내디게 될 것입니다.

이 환대의 잔치에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잔치는 끝나지 않았다. 슬픔과 사랑과 꿈을 기억과 마음에 묻는 순간, 비로소 잔치는 시작된다.

12 Responses to “장례, 그 낯선 마지막 환대의 잔치”

  1. 아거 Says:

    정말 좋은 자리였겠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어제 혼자서 중계방송을 지켜보면서 슬픔도 컸지만 한편으로는 외로움도 무척 컸습니다. 오죽 하면 트위터로 전해오는 메시지에서 위안을 찾았겠습니까.

    지난 월요일 메모리얼데이 때 만난 교회의 비교적 젊은 분들 (30대)의 생각은 제가 생각하기에도 의외였습니다. 물론 지적하신대로 교회의 보수성때문인지 의견 개진이 완전히 자유롭지는 않다는 한계를 느끼기도 했지만요.

    글을 읽다보니 이번 일을 계기로 온라인 오프라인을 가리지 않고 사람들이 모여 함께 생각하고 토론하는 문화가 좀 더 확산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어떻게 보면 한국의 두란노 선교회나 릭워렌의 새들백이 썼던 cellular church http://www.gladwell.com/2005/2005_09_12_a_warren.html 식의 교회 건설운동의 전략을 잘 활용해서 Robert Putnam등이 역설했던 social capital 을 강화하는 길이 될 수도 있는 것 같구요.

    그러다보면 ‘정치가 썩었다고 눈을 돌리는’ 그래서 역사를 거꾸러 돌리는 반동세력들에게 당하는 그런 일은 없어질 수도 있는 것 같은데요. 반동과 암흑의 시대를 살면서 갈고 닦은 여러가지 좋은 사회적 자산이 쌓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사회적 자산이 함께 굴러가지 않는다는 다시 말해 로버트 풋남의 책 제목처럼 bowling alone 현상으로 끝나버린다는 게 안타까울 뿐입니다.

    세계 어느나라 국민들이 상록수나 아침이슬을 함께 부르면 광장을 가득메울 수 있단말입니까. 사회적 자원이 충분한데 일이 안풀리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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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r. joo Reply:

    아거 / 아, 반갑습니다. 그래요, 저희도 그런 외로움을 달래려고 모였을 뿐이에요. 가만보니 교회에 다니지 않는 분들이 더 많이 찾으셨던 것 같기도 하고요. 이민 사회의 교회는 한국보다 더 보수적인 면이 많아요, 이민 사회가 그런 것처럼. 통신 기술의 발전때문에 그 폭이 줄어들고 있긴 하지만…

    언급해주신 ‘교회의 건설 운동 전략’에 대해서 그 필요성과 그런 방법의 활용을 공감하고 있습니다. 제깐에도 해본다고 했는데(하는데), 여러 요인들로 잘 안되는 게 있어요. 아마 제 처지때문인 탓도, 혹은 근본적으로 방향이나 방법에 문제가 있을 법도 하고, 아니면 교회 자체의 근본적인 문제일 수도 있겠고…

    다행인 것은, 이번 모임 이후에 아거님이 지적하신 것과 비슷한 생각이 오갔다는 것인데요. 이를 “사회적 자산”의 공유와 확산으로 풀어주시니 좀더 선연해집니다. 실제로 UC Berkeley, 신학-종교계에서는 GTU 와 같은 좋은 신학교 연합이 있고, 그 안에 좋은 학생들이 있는데, 이 지역이야 말로 미국 이민 사회에서 가장 보수적이고 폐쇄적이라는 말들을 듣곤 합니다. 여전히 각개전투하다 지쳐 버린 탓인지도 모르고요.

    생각이 좀더 몸짓을 갖추면, 이 부분에서 아거님의 의견을 많이 구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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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아거 Says:

    아참.. 요즘은 터치를 이용해 블로그를 읽기 때문에 글은 꼬박꼬박 읽는데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답글을 못달고 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주신부님 블로그는 정말 터치에서 최적화되어 있습니다. WP 버전때문인지 아니면 사용하시는 theme때문인지는 몰라도 정말 모든게 예쁘게 보입니다.

    그러나 외형보다 훨씬 더 예쁜 것은 신부님의 마음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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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r. joo Reply:

    아거 / 방문만으로 황송하니 답글까지 바랄 바 아닙니다.

    아이폰/터치가 대중화되니 누군가 접속할 것 같았습니다. 모바일시대니까 ^^; 그 첫 확인을 아거님이 해주시니 참 좋습니다. 어쨌든 그런 생각에 지인의 아이폰으로 살펴보고는 진작에 전용 테마 플러그인을 깔아두었습니다.

    http://www.bravenewcode.com/wptou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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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짠이아빠 Says:

    5월 정말 힘든 한 달이 지나갔습니다.
    하지만, 끝이 아니라는 생각에 머리는 더 무거워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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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r. joo Reply:

    짠이아빠 / 그래요, 이미 오월은 우리 역사에서 명백한 고유명사가 되었지요. 예, 힘들었어요. 그 사람 노무현에 대한 애증때문에, 더 힘들었는지 몰라요.

    그를 한시대의 마지막 거름으로 삼아, 이제는 너무 무겁지 않으면서도 효과적이며 지속되는 싸움을 했으면 좋겠어요. 아니면 더 처절하게 당할 것 같습니다.

    참… 8월에 학회로 뉴질랜드 오클랜드에 갈 일이 있어요. 그 일로 연락 한번 드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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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로자 Says:

    성공회 엿보기를 하던중 여기까지 왔습니다…그래서 용기를 내어 교회를 찾은지 두어달쯤 된 것 같네요…오늘하루 교회빼먹을까 했다 갔습니다. 그리고 이제 교회가기 싫어지더군요. 신부님의 글쓰기가 저같은 지식이 짧은 사람을 위해 쉬워졌습 좋겠네요. 넘 어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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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r. joo Reply:

    로자 / 어렵게 찾아 주신 것 같은데 그리 친절한 글쓰기가 아니어서 미안합니다. 좀더 자세히 지적해 주시면 이런 댓글을 통해서 좀더 서로 생각을 나눌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아니면 그저 왜 교회를 찾았던 것인지, 다시 왜 “교회가기 싫어”지는 이유 등을 나눠주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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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로자 Says:

    나는 왜 교회에 갔나? 저또한 여러가지 타당한 이유를 스스로에게 하고 있었습니다. 제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교회에 가고 싶다고 하니 저를 다시한번 위 아래로 처다보더군요. 이 정권이 들어선후 이런 현상은 더 심해진 듯 하니 이 정권이 교회에 꼭 좋은 영향(?)만을 미친것 같진 않더군요. 교회에 왜 가고 싶냐? 기도하고 싶어서… 꼭 교회가서 기도해야 돼냐? 절도 있잖아! 절은 향냄새가 싫어…그럼 천주교회를 가든가? 성공회도 꼭 개신교는 아니래… 분명 종교의 자유가 있는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왜 교회에 나가야 되는지 스스로에게, 그리고 주변 사람들에게 타당한 이유를 말해야하는 상황이 저도 이해가 안갈때가 가끔 있습니다. 이런 상황이 발생하는 것은 제 가치관과 종교적 가치관이 이해를 서로 달리하기 때문이겠지요. 그래서… 기도하고 싶어서 나갔던 교회가 편안함이 아니라 또하나의 풀리지 않는 실타래가 되어 되돌아 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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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r. joo Reply:

    로자 / 이야기 나눠 주셔서 고맙습니다. “기도하고 싶어서 나갔던 교회”에 대한 어떤 실망과 좌절이 느껴집니다. 많은 교회들은 이 흉물스러운 정권을 만드는데 큰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교회(성공회)도 여기서 그리 자유롭지 않습니다.

    “기도하고 싶은 마음”을 간직해 주십시오. 그 이유를 굳이 해명하려고 하지 마시고, 하느님과 나누고 주위의 눈 맑은 이들과 나눌 수 있는 기회를 만드셨으면 합니다. 로자님과 같이 기도하고파서 어디선가 서성서리는 분들이 있을 겁니다. 그 서성거리는 분들이 새로운 교회의 희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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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종호 Reply:

    이제 교회가 싫어진다는 로자님의 말씀은 참 마음 아픕니다.

    서울주교좌성당 질문 게시판에 이번 주일 김주교님의 설교에 대해 어떤 이가 던진 물음을 보며 혹시 연관이 있지 않을까 추측해봅니다. 직접 듣지는 못해서 어떤 말씀이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복음적인 가치가 분명히 제시되지 않은 상태에서 성공회의 특징이라할 “애매모호함”은 오해받기 쉽지요.
    저 역시 종종 교회공동체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자기검열을
    하곤 합니다만 좌우간 어떤 비판이든 각오하는 수준에서 마무리합니다.

    구태여 교회를 변명하자면
    교회는 내가 다니는 곳이 아니라
    교회는 우리가 이루는 곳입니다.
    서로가 각자의 가치관을 소통하여
    성서와 전통안에 녹아있는 종교적 가치관을 밝히고 다듬어야 하겠지요.
    그래도 성공회는 그 일이 현실적으로 가능한 구조라는 것이
    유일한 희망인데요…
    구체적인 노력은 신부님과 우리의 몫이겠지요.

    [Reply]

    fr. joo Reply:

    임종호 / 신부님 말씀 듣고 잠시 그 게시판을 들여다 봤습니다. 전체 내용을 알 수 없으니 섣불리 판단할 수 없으나, 오가는 댓글을 보면서 여러 생각이 겹쳐졌습니다. 슬픈 일입니다. 좌절감을 느낄 만합니다.

    우리 교회가 어떤 “소통”과 “깊은 종교적 가치관”을 다듬어내는 “일이 현실적으로 가능한 구조”라는 것에 대해서는 많은 변화를 담지 않는 한 쉽게 동의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구체적인 노력이 무엇인지를 서로 밝혀가야 한다고 봅니다.

    저는 여전히 교회가 사람들에게 제공할 수 있는 어떤 공간에 대해서 생각합니다. 적어도 대한문 앞 분향소가 사방으로 막혀 운용되고 있을 때라면, 그 이웃에 있는 교회(서울주교좌성당)는 분향하는 사람이든 아니든, 그 어떤 사람들도 또다른 방식으로 스스로를 돌아보고 기도하고 위로받는 어떤 공간을 마련해 주었어야 하리라는 생각입니다. 그것이 교회가 할 일입니다. 교회는 어떤 주장을 하는 곳이기보다는 어떤 공간을 만들어 내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교회와 그 지도자들에게 절망하고 밖에서 서성이는 이들을 생각합니다. “교회는 자기 내부의 일원이 아닌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 존재하는, 지상의 유일한 사회이다”라는 윌리암 템플 대주교의 말이 다시 떠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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