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르심 – 낯설고 불확실한 미래
부르심 – 낯설고 불확실한 미래 (마르 1:14~20)1
그리스도교 신앙이 다른 종교와 구별되는 점 가운데 하나는 ‘부르심’입니다. 인간 밖이든 인간의 내면이든 인간이 나서서 ‘신’을 찾는 것이 여러 종교의 특징이라면, 그리스도교 신앙에서는 하느님께서 나서서 인간을 찾습니다. 이를 ‘부르심’ 또는 ‘소명’이라 합니다. 이 부르심의 특징 때문에 그리스도교는 다른 종교와 방향이 다릅니다. 성서의 많은 내용은 하느님께서 인간을 부르시면서 일어나는 사건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 사건 속에서 하느님께서 인간을 부르신 뜻과 목적이 서서히 드러납니다. 그것은 복음과 하느님 나라입니다.
여느 다른 종교와 그 방향의 달라서 성서의 이야기와 등장인물도 사뭇 낯섭니다. 낯설어서 새롭기도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요나를 불러 낯선 땅 니느웨에 가서 회개를 선포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요나는 거절하고 도망치다 큰 물고기에 삼켜 그 어둠 속에서 두려움에 떨다가 겨우 밖으로 나옵니다. 그제야 요나가 가고 싶지 않던 곳에 가서 회개를 외치니 모든 사람이 다 회개하고 마음과 행실을 고쳐먹었다고 합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아 낯설고 확신할 수 없는 곳에 자기 몸을 던졌을 때 새로운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를 부르신 이야기에도 낯선 방향 전환이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잡혔다는 소식을 듣고 예수님께서 전면에 등장하십니다. 요한과 예수님이 연결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 선포가 낯설고 새롭습니다. 요한은 하늘나라가 ‘오고 있다’고 했지만, 예수님은 ‘하늘나라가 다가왔다’고 선포하십니다. 미래나 외계에 있으리라 생각한 하늘나라가 우리 현실 안에 이미 다가왔다고 합니다. 경전의 글귀나 설법에 있다고 생각한 복음이 실은 이 땅에 사신 예수님의 행동에 이미 드러나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 하느님 나라와 복음은 지금 여기서 경험하고 실천하는 것입니다.
부르심에 대한 응답 역시 낯섭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에는 여느 종교가 약속하는 미래 보장이 없고 자세한 설명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제자들은 자신의 생업을 버리고 예수님을 곧바로 따릅니다. 우리는 그 결과가 무엇인지를 사실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 인간이 목격하는 예수님의 미래는 고난과 죽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떠나신 뒤에 제자들이 겪었던 삶도 박해와 순교였습니다. 부르심을 받았던 제자들이 자신의 미래를 가늠하고 확신하며 따랐으리라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불확실한 미래에 동료와 함께 자신을 던졌을 때라야, 우리는 오히려 부활이라는 새 생명을 경험합니다.
보장성 보험의 종교가 아니라, 낯설고 불확실한 현재와 미래에 펼쳐지는 하느님 나라를 예수님과 동행하며 함께 걷는 일이 성서의 신앙입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찾으시며 건네는 부르심과 동행의 초대에 우리는 지금 다시 어떻게 응답해야 할까요?
- 주교좌성당 주보 2015년 1월 25일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