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그라진 손 vs. 오그라진 마음

히브 7:1~3, 15~17 / 시편 110:1~4 / 마르 3:1~6

2015년 1월 21일 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아침 성찬례

주낙현 요셉 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오그라진 손과 오그라진 마음” – 오늘 복음서 이야기를 읽으며 내내 떠나지 않는 이미지입니다. 어쩌면 여전히 우리가 사는 세상을 보여주는 이미지여서 그런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의 선교 활동은 한마디로 말한다면, 본디 온전하던 것이 왜곡되고 뒤틀려서 제대로 구실 하지 못하는 것들을 바로잡는 일입니다. 하느님께서 천지 만물과 사람을 만드셔서 숨을 불어넣으시고 축복하시며 “참 좋다”고 연발하셨던 그 모습을 회복하는 일입니다.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서 부서진 관계, 창조세계와 인간이 서로 해를 입히고 파괴하는 관계, 사람과 사람이 서로 반목하고 억누르는 관계는 모두 뒤틀려서 ‘오그라진’ 상태입니다. 이 때문에 많은 사람이 고통받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관계를 바로잡는 일을 ‘치유’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펼치신 치유는 악령을 몰아내는 것이든 병자를 고쳐주는 것이든 모두 뒤틀린 것을 바로잡는 일입니다. 이러한 치유는 몸이 아파서 고통받는 개인의 문제에만 그치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 보시기에 왜곡과 고통은 우리가 하느님과 누리는 관계, 이웃과 누리는 관계가 뒤틀려서 생깁니다. 예수님에게 치유는 개인을 넘어서 늘 한 사회와 세계의 문제입니다.

예수님은 치유의 기적을 행하실 때 대체로 어떤 조건이나 단서를 달지 않고 병자를 고쳐주십니다. 때로 죄를 용서하시며 고쳐주시는 장면이 나오더라도 그 죄의 내력에 관해서는 전혀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치유 이야기는 예수님을 눈엣가시로 여기던 사람들과 겪는 이상한 갈등으로 번지기 일쑤입니다. 오늘 복음서 이야기도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오그라진 손’으로 고통받던 한 개인을 고쳐주시면서, ‘오그라진 마음’에 사로잡혀 있는 집단과 사회가 어떤 태도를 지녔는지 보여주십니다. 생각해 보면, 예수님은 굳이 안식일에 병자를 고쳐줄 필요가 없었습니다. 오늘 이야기처럼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은 오랫동안 고통을 받았던 것이 분명하지만, 생명이 위급한 상황은 아니었습니다. 잠시 기다려서 안식일 다음날 했어도 됩니다. 눈에 불을 켜고 꼬투리를 잡으려는 사람들에게 빌미를 제공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안식일에 예수님께서 병자를 고쳐주신 행동은 일부러 하신 것입니다. 일부러 사단을 만들고 갈등을 빚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시중에 나도는 자기계발이나 처세술 따위에 마음을 주지도 않습니다. 사람이면 당연히 가져야 할 자비와 사랑을 바른말과 옳은 행동으로 밀고 나가신 분입니다. 이것이 뒤틀린 사회를 바꾸는 첫걸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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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사랑으로 ‘곧게 펴진 손’은 이제, 멀쩡한 겉모습 안에 담긴 ‘오그라진 마음’과 큰 대조를 이룹니다. 복음에 나오는 ‘그들’은 바리사이파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스스로 경건하고 신앙심이 깊다고 자부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잃은 나라를 다시 세우며, 세속화하던 유대교를 개혁했던 신앙운동가들이었습니다. 개인의 신앙 체험뿐만 아니라, 성서에 관한 지식도 깊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이들은 사람들의 지지를 얻어 명예와 지위와 권력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 지위와 권력으로 더 나은 종교, 더 나은 세상을 만들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지위와 권력의 맛에 심취했습니다. 사람을 섬기며 보살피라고 준 지위와 권력의 본뜻을 잊고 사람을 억누르고 부리는 힘으로 오용했습니다. 이런 모습에 예수님은 탄식과 분노를 보이셨습니다.

예수님은 탄식하셨습니다. 경건한 신앙 운동이 부패하는 것을 보셨기 때문입니다. 오랜 역사를 지닌 신앙 운동은 이제 거드름 피우는 율법이 되어 사람들을 옥죄고, 다른 편에서는 여전히 힘없는 많은 사람이 비틀리고 오그라진 채 고통받으며 살아가는 모습을 목격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분노하셨습니다. 종교와 사회를 바로 잡아 공동선으로 이끌라고 준 권한을 내팽개치고 직무유기하는 무책임한 집단의 방해마저 받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직무유기가 “악한 일”이고 “사람을 죽이는 일”이라고 단언하셨습니다. 이 말씀에는 예수님의 분노가 서려 있습니다. 우리 시대의 종교와 사회, 정치를 향한 예수님의 시선과 분노가 선연합니다.

이 탄식과 분노에 대한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대응책이 놀랍습니다. 자신과 늘 갈등하며 싸우고 지냈던 헤로데 당원들과 합작하기로 합니다. ‘예수’를 제거한다는 목적으로 자신들의 원래 이념마저 포기하고 종교와 정치가 합작하여 ‘죽이는’ 일에 작당한 것입니다. 악한 행동입니다. 지위와 권력을 지켜내기에 급급하여 만들어 낸 ‘오그라진 마음’입니다.

오늘 읽은 서신 히브리서에 등장하는 멜기세덱 이야기는 우리 신앙인이 종교와 정치와 관련하여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지 되새기게 합니다. 창세기에 잠시 등장했다 사라진 멜기세덱이 왜 신약의 서신서에도 등장하는 것일까요? 멜기세덱은 사제이자 한 나라의 왕이었습니다. 그 이름의 뜻에 실마리가 있습니다. 멜기세덱이라는 이름은 ‘정의로운 왕’이라는 뜻입니다. 종교와 사회, 정치의 지도자가 ‘정의’로워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는 살렘의 왕이었습니다. ‘살렘’은 ‘샬롬’에서 나왔습니다. 평화라는 뜻입니다. 정의로운 권력만이 평화의 나라를 만들 수 있다는 말입니다. 멜기세덱은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온 아브라함을 축복하며 그에게 떡과 포도주를 가져왔습니다. 거친 세상에서 바른 신앙의 싸움을 견디고 이겨낸 사람들을 떡과 포도주로 먹이고 힘을 돋우며 정의와 평화의 나라를 건설하라고 당부했습니다. 이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을 대사제 멜기세덱이라 부릅니다. 이 때문에 우리 신앙인은 아브라함의 후손으로서 예수님께서 주시는 떡과 포도주를 먹고 마십니다. 우리가 마시는 떡과 포도주는 세상의 정의와 평화를 위해 용기와 힘을 내라는 선물입니다. 신앙의 결단과 행동입니다.

오늘 복음과 서신을 읽으며 우리는 304년 로마에서 순교한 아그네스 성인을 기억합니다. 부유한 귀족 가문에서 온갖 혜택을 누리던 아그네스는 예수님을 믿으면서 세상의 부와 권력에 관한 관심을 내려놓았습니다. 그 자신이 너무도 아름다워 부와 권력을 지닌 사람들이 청혼했으나 번번이 거절했습니다. 자신은 이미 예수님과 결혼했으니 다른 사람과 결혼할 수 없다고 당당하게 말했습니다. 전설에 따르면, 힘을 가진 사람들은 아그네스에게 치욕을 주려고 옷을 벗겨 거리에 끌고 다녔지만, 신비하게도 그의 머리가 자라나 온몸을 덮었고 금세 탈출했다고 합니다. 권세를 가진 사람들이 아그네스를 겁탈하려 했지만, 신비하게도 그에게 가까이 오자 눈이 멀어버렸다고 합니다. 결국, 힘을 가진 사람들이 아그네스를 칼로 목을 쳐서 죽였지만, 그의 피가 멈추지 않고 흘러서 다른 그리스도인들의 옷을 적시며 순교의 신앙을 더욱 부추겼습니다. 그의 나이 열세 살이었습니다.

후대 사람들은 아그네스를 예수님을 상징하는 ‘양’(羊)과 함께 그리기를 좋아했습니다. 아그네스라는 이름을 양을 뜻하는 라틴어 ‘아뉴스’(angus)로 잘못 이해하거나 말장난을 하여 의미를 넣은 것이었습니다. 원래 아그네스는 라틴어가 아니라, 희랍어 ‘아그네’(agne)에서 나왔습니다. ‘순결하고 거룩하다’는 뜻입니다. 아그네스 성인의 삶에서 보듯이 이 순결함과 거룩함은 부와 권력의 포기를, 그리고 신앙의 용기를 뜻합니다. 권력에 굴하지 않았던 그는 연약한 소녀들, 미혼 비혼 여성들의 수호성인이 되었고, 특별히 모든 성폭력 피해자들의 수호성인이 되었습니다.

작은 무리로 이 아침에 모여있는 우리는 이제 ‘오그라진 손’을 바르게 펴서 어떤 손길을 세상에 내밀어야 할까요? 세상의 온갖 ‘오그라진 마음과 행동’으로 피해를 당하고 고통받는 이들을 어떻게 보살피고 치유하여 그들과 함께 서야 할까요? 정의와 평화의 사제 예수님께서 주시는 떡과 포도주를 먹고 마시는 우리는 이제 이 세상을 향해 어떤 사람으로 서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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