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서 보라! – 초대하여 함께 벽을 넘는 신앙
1사무 3:1~20 / 시편 139:1~6,13~18 / 1고린 6:12~20 / 요한 1:43~51
2015년 1월 18일 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오전 9시 성찬례
주낙현 요셉 신부
+ 나의 바위, 나의 구원이신 하느님, 내 머리의 생각과 내 입술의 말들이 주님 마음에 들게 하소서. 아멘.
저와 여러분은 이 자리에 초대를 받아서 나와 있습니다. 어떤 연유와 내력이 있든, 신앙은 항상 누군가 마련한 초대에 응답하여 자신의 몸을 움직이고 발걸음을 떼어 어느 자리에 모이는 일로 시작합니다.
초대받아 모인 공간에서 저와 여러분은 이렇게 한 자리에서 하느님을 노래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구약과 신약성서를 통해서 선포되는 소리를 듣습니다. 저마다 지닌 기도의 제목을 이 거룩한 곳에 가져와서 마음 깊이 하느님께 전해드립니다. 그리고 우리 주위에 있는 분들이 기도하는 모습을 보며 그 간절한 마음을 헤아리려고 노력하고 ‘나’ 자신의 기도뿐만 아니라, 이웃과 형제와 자매, 교회와 세계를 위해서도 기도합니다. 무엇보다 우리는 주님께서 마련해서 주신 이 성찬의 상에 초대를 받았습니다. 혼자가 아니라 여럿이 함께 먹고 마시라는 초대입니다. 이처럼 신앙은 찬양과 기도를 올려드리고, 말씀을 먹고 성찬을 나누는 곳에 초대받아 참여하는 일로 시작합니다.
이 초대는 어떻게 시작되었을까요? 우리는 어떻게 이 초대에 응답해야 할까요? 우리는 이 초대를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오늘 읽은 성서의 말씀이 우리에게 던지는 평범하면서도 깊은 질문입니다.
오늘 구약성서에서, 어린 사무엘은 하느님의 음성을 듣고, 하느님의 초대를 받습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의 색깔이 독특합니다. 나름대로 지각이 뛰어나고 총명하고 젊은 사무엘은 하느님의 음성을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사무엘은 함께 사는 제사장 엘리에게 찾아가서 자신을 불렀느냐고 묻습니다. 엘리는 늙고 귀가 어두웠습니다. 엘리는 부른 적이 없다고 대답합니다. 거듭해서 자신을 부르는 이상한 음성을 들은 사무엘이 다시 엘리를 찾아가지만, 엘리는 부르지 않았다고 합니다.
늦게서야 엘리는 자신의 오랜 신앙 경험과 경륜으로 새로운 사실을 알아차립니다. 하느님께서 부르시는 것이니, 하느님의 음성에 대답하라고 사무엘에게 일러줍니다. 어떻게 대답해야 할 지도 알려줍니다. “하느님, 말씀하세요. 제가 듣고 있습니다.” 그때야 비로소 사무엘은 하느님의 부르심과 초대에 응답하여 하느님과 대화할 수 있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이 이야기를 두고, 늙은 엘리의 시대가 가고, 젊고 활기찬 사무엘의 시대가 왔다고 해석하곤 합니다. 어떤 이들은 이 이야기를 두고, 나이 든 제사장 엘리의 효용 가치가 떨어져서, 더 쓸모 있는 젊고 새로운 사무엘을 하느님께서 선택했다고 말하곤 합니다. 세대교체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근거 구절로 사용하곤 합니다. 그러나 이는 몹시 부족한 해석이어서 오해를 낳기 쉽습니다.
급한 해석을 잠시 멈추고 이야기의 장면을 가만 들여다보면 그 뜻이 서서히 드러납니다. 시선을 바꿔서 돌아보면, 젊은 사무엘이 하느님의 부르심과 신앙의 초대를 알아차리도록 돕고 하느님의 음성에 응답하도록 돕는 사람은 바로 제사장 엘리였습니다. ‘엘리’라는 이름의 뜻은 ‘고상하다’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고상한 지혜와 경륜으로 젊은이의 식별을 돕는 사람이었습니다.
엘리 제사장을 자식 농사에 실패한 사람이라고 해석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자신의 제사장직을 자식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물려줄 수밖에 없는 가여운 처지라고 말이지요. 정말 그런 뜻일까요? 오히려 엘리는 자식이나 가족의 기준이 아니라, 하느님의 초대에 세심하게 응답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에게 자신의 신앙을 물려주었다는 뜻이 아닐까요? 실제로 사무엘이 하느님께서 엘리에 관하여 전하신 소상한 말씀을 자신에게 숨김없이 전하라고 합니다. 하느님의 판단에 그는 순종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이 하느님 앞에 솔직하게 설 수 있는 신앙이 곧 고상한 신앙입니다.
어쨌든, 사정을 모두 알아차린 엘리는 사무엘에게 조언합니다. 하느님께서 부르시는 것이니 하느님께 응답하라고 합니다. 그 응답할 내용까지 하나하나 가르쳐 줍니다. 매우 겸손하고도 성실한 어른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바라볼 고상하고 성실하며 연륜 깊은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이제 사무엘을 눈여겨봅니다. 사무엘은 ‘듣는 사람’입니다. 사무엘은 어른이었던 엘리의 식별과 가르침을 들었습니다. 어른의 식별 도움을 얻고서야 사무엘은 하느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 제가 듣고 있습니다. 말씀하십시오.” 이것이 신앙의 초대에 대한 우리의 준비입니다. 저 같은 설교자와 성직자를 비롯한 많은 이들은 듣기보다는 자신의 주장을 하려 합니다. 그러나 듣고 공부하고 새긴 만큼만 밖으로 말한다면, 우리의 인간관계와 사회 안에서 이상한 고집과 주장으로 서로 오해하고 싸우는 일은 꽤 많이 줄어들 것입니다.
“하느님, 제가 듣고 있습니다.” 우리 신앙의 진리는 나 자신의 내면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신앙의 진리는 내 경험에서도 나오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밖에서, 밖에 계신 하느님에게서, 밖에 있는 지혜와 통찰과 경륜을 통해서 내게로 들어옵니다. 그러니 서로 귀 기울이지 않고는, 서로 배우지 않고는, 우리는 하느님의 초대에 응답할 훈련을 할 수도 없습니다. 결국, 하느님의 부르심과 나 자신의 주장을 혼동하고 맙니다. 사무엘을 부르시는 하느님은 우리 신앙인이 서로 깊이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이제 이 신앙의 초대에 응답한 다른 사람을 만납니다. 오늘 우리가 복음서에서 만난 나타나엘입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을 듣고 먼저 제자가 된 필립보는 친구 나타나엘을 찾아갑니다. 신앙의 선조들이 전하고 기다렸던 ‘어떤 분’을 따르기로 했다면서 자신이 받은 신앙의 초대에 친구도 초대합니다. 이 장면에서 두 가지 서로 다른 태도가 돋보입니다. 나타나엘은 ‘나자렛에서 무슨 신통한 것이 나오겠냐?’며 자신의 고정관념과 차별의식을 드러냅니다. 우리 사회와 빗대어도 여러 사람에게서 발견하는 태도입니다. 학력과 지역 차별, 재산과 지위에 따른 차별의식이 여러 곳에 널려있는 사회입니다. 이에 따라 사람을 판단하는 것이 고정관념입니다.
반면, 예수님의 태도는 전혀 다릅니다. 예수님은 그를 꾸짖기는커녕, ‘나타나엘에게는 거짓이 조금도 없다’며 그를 있는 그대로, 그의 깊이를 헤아려 주십니다. 이 장면은 우리가 ‘사람을 안다’는 것, ‘사태의 본질을 안다’는 것에 관한 신앙인의 태도를 되새기게 합니다.
나타나엘은 자신의 지식과 경륜에서 얻은 확고한 신념을 드러냅니다. 우리는 종종 ‘나는 내가 가장 잘 안다’고 생각하곤 합니다. 종종 ‘내 신앙 체험과 신앙이 옳다’고 확신하고는 합니다. 밖을 향해서 어떤 판단을 쉽게 내리곤 합니다. 예수님과 나눈 대화 중에서 나타나엘은 깨닫습니다. 오히려 밖에서 오는 친밀하고 따뜻한 발견을 통해서 사람은 자기 내면의 참모습을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자신이 지닌 오랜 지식과 체험은 종종 고정관념과 차별의식으로 작동하기 쉽습니다. 그 고정관념은 자기 내면의 눈을 가려서 사람 판단, 사태 판단을 흐리게 합니다. 신앙은 자기 안의 시선에 머물지 않고 밖에서 오는 새로운 발견을 받아들이고 안팎으로 새로운 탐험을 시작하는 일입니다.
신앙인을 가장 잘 표현하는 말은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입니다. 구약성서의 핵심인 ‘율법’의 원래 뜻도 ‘하느님께서 열어주신 길을 걷는 일’입니다. 적어도, 성서의 신앙은 전능하고 초월적인 미지의 존재를 우러러보는 일이기에 앞서, 예수님의 삶이 열어놓은 길을 따라 걷는 일입니다. 예수님이 사람과 맺은 관계의 모본에서 배우고 따르는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를 따라오너라”하고 당신의 길에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그 길은 알 수 없는 탐험일 수 있습니다. 새로운 탐험의 초대에 응답하는 일이 바로 신앙입니다.
필립보는 친구에게 예수님을 따르라는 초대로 “와서 보라”는 말을 씁니다. 이 도드라진 표현이 사람의 움직임과 참여를 드러내는 동사인 점을 눈여겨봐야 합니다. 몸소 걸어서 참여하고 관찰해야만 새로운 경험이 일어납니다. 또한, 새로운 사람을 ‘와서 보라’고 초대하고 환대하는 일로만 새로운 사람과 친교를 나눌 수 있습니다. ‘천사들이 하늘과 사람의 아들 사이를 오르내리는 장면을 보게 되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이채롭습니다. 예수님 안에서는 사람을 가르는 차별과 사회를 가르는 분열의 담이 허물어집니다. 대신, 초대와 환대, 그리고 친교가 어떤 학력과 출신과 지위와 성별을 막론하고 자유롭고 풍성하게 일어난다는 말입니다.
특별히 전례 전통이 깊은 우리 교회는 “와서 보라”는 초대로 사람을 이끌고 환대하기에 좋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아름답게 찬양하러 모입니다. 그윽한 연기를 피워서 우리 자신을 정화하는 냄새를 맡고 우리의 기도를 하느님께로 올려보내는 모습을 목격합니다. 주님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시는 일로 우리는 새로운 사람을 초대합니다. 와서 보며 참여하여 함께 그 깊은 맛을 느끼고, 예수님의 삶을 되새기고 그 길을 따르는 새로운 탐험, 신앙의 순례를 이어갑니다.
이제 우리는 어떻게 귀를 기울여 하느님과 이웃의 목소리를 들으렵니까? 우리는 어떻게 다음 세대에게 자신의 고상한 삶과 신앙의 조언을 건네렵니까? 우리는 어떻게 이 거룩한 시간과 공간으로 새로운 사람을 초대하여 차별과 고정관념의 벽을 허물고 자유롭고 풍성한 삶을 만들어내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