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풀며 닳아서 빛나는 영광

베풀며 닳아서 빛나는 영광 (요한 12:20~33)1

무슨 ‘영광’을 보자고 우리는 신앙생활을 할까요? 그리스인들이 예수님의 제자를 찾아와 “예수님을 보게 해 달라”고 청하던 마음에도 이런 질문이 고스란했습니다. 예수님 시절에 ‘높은 영광’은 힘 있는 자리와 많은 재산을 뜻했습니다. ‘영광’은 세상을 호령하던 로마 제국의 권력에 걸맞은 말이었습니다. 지금 쓰이는 ‘영광’도 이런 뜻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이런 기대와 크게 어긋납니다. 우리가 진정 ‘보아야’ 할 바를 말씀하십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어야 열매를 맺고, 자기 목숨을 버리는 사람이 영생을 얻으며, 섬겨야 높아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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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대답이 펼쳐지는 방식을 눈여겨봐야 합니다. 사실을 바로 보고, 뜻을 헤아리며, 새롭게 실천하라는 가르침이 차례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밀알이 죽고 썩어야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말씀은 비유가 아니라, 명백한 사실입니다. 객관적 사실을 거부하거나 애써 부인하여서 신앙을 얻으리라는 기대를 버리라는 발언입니다. 적어도 오늘 대답에서 예수님은 객관적인 사실 위에 우리 신앙을 다시 세우십니다. 자연의 이치 안에서 죽은 밀알은 풍성하게 열매를 맺어 많은 사람을 넉넉하게 먹이도록 변화합니다.

사람은 죽습니다. 죽음이라는 현실을 완전히 받아들이고, 죽음의 한 차원을 끝낼 때 우리는 영원한 생명에 관해서 말할 수 있습니다. 이승의 생을 어떤 신비로운 방식으로든 저승의 생으로 연장하려는 기대는 ‘영원한 생명’과 전혀 관계없다는 말입니다. 이런 기대를 가르치는 종교는 ‘자기 목숨을 아끼려는’ 태도일 뿐이며 결국에는 모두 허망한 종말을 목격할 뿐입니다.

신앙인은 이생에 선물로 얻은 생명을 인색하게 아끼려 살지 않고, 너그럽게 베풀며 삽니다. 베풀다가 닳아버리고 가난해진 삶이 영원한 생명의 시작입니다. 예수님은 지상의 삶을 가난하고 아픈 사람들을 어루만지고 고치는 일에 베풀며 쓰셨습니다. 세상의 ‘영광’을 쫓으며 사람을 억누르던 세상 권력과 대결하며, 자기 몸을 닳아 없애셨습니다. 이런 예수님을 섬기고 그분의 삶을 닮아 따르며, 사람을 넉넉하게 만드는 일이 신앙입니다.

신앙은 고통의 지우개가 아닙니다.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신 예수님마저도 당신이 겪을 ‘고난의 시간’을 없애달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인생의 고뇌와 병고와 고난의 제거는 축복이 아닙니다. 우리와 함께 고난을 겪으신 예수님께서 고통 중에 있는 우리와 동행하시는 일이 축복이요 은총입니다. 이 고난의 동행을 받아들이며 세상의 고난에 참여하는 일이 신앙입니다. 이 신앙이 우리 아픈 ‘가슴에 쓰고 새길 새 계약’이며, 고난의 수고를 다 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바라볼 우리의 ‘영광’입니다.

  1. 성공회 서울 주교좌 성당 주보 2015년 3월 22일치 –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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