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 – 오직 사랑만이

오직 사랑만이 (요한 3:14~21)1

오직 사랑만이 우리를 구원합니다. 종교는 사랑을 쉽사리 신의 속성이라고 가르칠는지 모릅니다. 철학은 사랑을 행복의 원리로 말하기도 합니다. 과학은 사랑을 인간 생존본능의 한 표현이라고 분석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사랑은 움직이지 않는 속성이나 원리나 분석 대상에 머물지 않습니다. 역사와 삶 속에서 경험하고 기억하며 서로 선물로 주고 받는 사랑이기에 우리를 구원합니다.

인간은 하느님의 사랑 때문에 그분의 거룩한 수고와 숨결로 만들어진 작품입니다. 이 사랑을 기억하시는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실패가 반복되어도 마음에 두지 않으시고 늘 구원의 손길을 펼치십니다. 그러나 사랑에 겨운 나머지 사람은 딴생각을 하곤 합니다. 이집트에서 노예로 고생하던 이들을 사랑과 연민으로 보살펴 해방을 베푸셨지만, 사람들은 자신의 불편과 고통을 내세워 변덕을 부리고 사랑을 의심합니다.

여기서 사랑이 나뉩니다. 히포의 어거스틴 성인은 두 가지 사랑의 분열을 안타까워했습니다.

“사랑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거룩하고 다른 하나는 불순하다. 하나는 사회적 사랑이요, 다른 하나는 사사로운 사랑이다. 하나는 높은 도성에 속한 탓에 공동선을 생각하고, 다른 하나는 그 오만하여 공동선마저도 자기 개인의 것으로 만든다. 하나는 평화스럽고, 다른 하나는 반역한다. 하나는 진리에서 멀어진 인간들의 칭송보다는 진리를 더 중요하게 여기지만, 다른 하나는 어떻게든 칭송을 얻으려고 욕심을 부린다.

하나는 벗이 되고자 하고, 다른 하나는 질시한다. 하나는 자기에게 바라는 대로 남에게도 바라지만, 다른 하나는 남을 자기에게 복종시키려 한다. 하나는 이웃의 선을 위하여 권위를 행사하지만, 다른 하나는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권력을 휘두른다. 이 두 가지 사랑은… 세상 속에 섞여 있어 역사 속에서 계속될 것이지만, 마지막 심판이 그것을 가를 것이다”(De Genesi 11:15.20).

사람을 널리 이롭게 하려는 사랑도 자칫 자신을 향한 좁고 인색한 이기심이 되기 쉽습니다. 종교가 이를 조장하는 일이 빈번합니다. 여전히 많은 종교가 자신을 향한 축복을 우선순위로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사회의 정의와 자신의 축복을 분리하면 하느님께서 창조 때에 마련하여 우리에게 숨결처럼 불어넣어 주신 넓고 깊은 사랑은 인색하고 고약한 자기 사랑이 되고 맙니다. 정치와 종교를 분리하면 이런 일이 생깁니다. 사회와 개인을 분리하면 종교의 가르침이 딴 곳으로 갑니다.

이처럼 분열된 사랑이 만드는 단죄와 심판을 거두시려고 예수님은 인간 고난의 극치를 몸소 겪으셨습니다. 무책임한 정치 권력이 그분을 십자가에 높이 매달았고, 부도덕한 종교 권력이 그분을 조롱했습니다. 그러나 고난은 축복의 결핍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고통의 땀과 상처의 피가 새로운 삶의 새싹을 틔웠습니다. 춥고 어두운 땅에 갇혔던 씨앗이 봄(lent)의 빛과 생명으로 돋아나게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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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돌리는 회개로 사순절 여정을 시작한 우리는 이제 눈을 들어 높이 매달린 예수님의 고난을 바라보며 세상 곳곳에 퍼진 고통을 느끼고 그 신음을 듣습니다. 사랑의 작품인 우리가 겪는 고통에 안타까워하시며 하느님께서 구원의 선물을 건네시는 손길에 응답하여, 우리도 하느님 사랑의 동료인 이웃에게 사랑의 눈길과 선물을 건네라는 말씀을 듣습니다. 우리 역시 누군가에게 선물이어야 합니다.

오직 이 사랑만이 우리를 구원합니다.

  1. 성공회 서울 주교좌 성당 주보 2015년 3월 15일치 –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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