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별의 신앙 – 쓸쓸하고 아름답게 떠나는 일
사도 17:22~34 / 시편 148:1~2, 11~14 / 요한 16:12~15
2015년 5월 13일 (부활 6주간 수요일) 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아침 성찬례
주낙현 요셉 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하나이다.
세상에서 가장 쉬운 일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아주 짓궂은 대답이 있습니다. 그것은 “남에게 충고”하는 일이라고 합니다. 자신의 지식과 경륜이 깊다면서 이래저래 지시하고 훈수 두는 일입니다. 충고가 쉬운 까닭은 자기 손에 어떤 책임도, 어떤 더러움도, 어떤 수고도 담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땀과 수고를 더하지 않고, 자기 손을 더럽히지 않는 충고는 힘이 없을뿐더러, 오히려 조롱거리가 됩니다.
저 같은 여러 성직자는 종종 이처럼 세상에서 가장 하기 쉬운 ‘충고’나 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인지도 모릅니다. 이러면 성직자와 교회는 조롱거리가 됩니다.
그렇다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은 무엇일까요? 또다시 짓궂은 대답을 찾는다면, 그것은 어려운 일은 자신의 자리를 내려놓고 떠나는 일입니다. 자신이 지금까지 이룬 성취, 땀 흘렸든 안 흘렸든 자신이 차지한 자리, 스스로 고생해서 이뤘다고 자찬하며 흐뭇해 하는 지위를 내려놓고 이별하는 일입니다. 내려놓는 이별이 가장 어려운 까닭은 자신이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잊힐까 두렵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이뤄낸 일과 자신의 생이 다음 세대에서 무시당할까 두렵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떠나야 할 자리에 틀어 앉아 쥐고 있으면, 그 자리가 작동하지도 않을뿐더러, 오히려 추한 일이 됩니다.
저 같은 여러 성직자는 이처럼 세상에서 가장 하기 어려운 일에 발목이 걸려 자신의 생존 영역을 지키려고 하나 마나 한 충고나 내뱉으며 살아가는 사람인지도 모릅니다. 이러면 성직자와 교회는 추하게 됩니다.
우리 그리스도교 신앙인은 우주 삼라만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관계의 표상을 삼위일체 하느님에게서 찾는 사람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한 분 하느님이라는 매우 기이하고도 이해하기 교리를 붙잡은 이유는 그 관계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아름다움과 새로운 도전이 있기 때문입니다. 논리적으로 설명하기 쉽지 않지만, 이 아름다움과 새로운 도전 때문에 우리는 이를 신비라고 부릅니다.
오늘 읽은 복음서 본문에서 우리는 이처럼 신비로운 삼위일체의 관계의 한 모습을 발견합니다. 우리는 우주의 창조주이신 하느님 아버지를 믿습니다. 하느님은 세상을 창조하시고, 인간에게 생명을 주시어 누리며 살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하느님에게서 멀어졌습니다. 혼내시고 복을 내리시며 달래기도 하신 하느님께서는 어느 순간 모든 일을 내려놓고 당신의 아들 예수님께 모든 일을 내어 맡깁니다. 세상을 창조하시며 소유권을 주장하실 만한 분이 갓난아기로 태어난 나약한 한 인간에게, 갈릴래아 천한 시골 촌뜨기에게, 아직 새파랗게 젊은 미숙한 목수 청년에게 자신의 세상을 다 맡기셨습니다.
하느님의 일을 받은 성자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며 그 일을 수행하셨습니다. 낮은 인간이 되셔서 온갖 궂은일을 하셔야 했습니다. 사회를 변화시킬 만한 타고난 능력과 재산도 전혀 없이 바닥부터 맨몸으로 시작해야 했습니다. 결국, 성자 예수님의 결말은 고통과 고난 끝에 죽임을 당하는 일이었습니다. 고생 값 받고 싶은 것이 사람 아닐까요? 그 고생의 대가였는지 성부 예수님은 마침내 부활하셨습니다. 모든 싸움에 승리하셨습니다. 그러니 이제 승리의 기쁨과 전리품을 챙길 만한 자격과 지위를 얻었습니다. 게다가 새로운 몸으로 부활하셨으니, 모든 것을 넘나드는 그 몸과 능력으로 홍길동처럼 동해 번쩍 서해 번쩍 하면서 세상을 지배하면 될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지점에서 다시 내려놓고 떠나야 하는 운명에 닥칩니다. 승리를 누릴 충분한 시간도 없이 서둘러야 했습니다. 지난 30년 동안 이름 없이 살아야 했던 삶, 특히 지난 3년 동안 온갖 죽을 고생, 아니 십자가에 처참하게 달려 죽어야 했던 모든 일을 마치고 부활의 승리를 겨우 얻어냈는데, 겨우 40일 만에 모든 것을 내려놓고 떠나야 하는 운명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그 승리와 성취를 성령님께 다시 맡겨야 했습니다. 이렇게 맡기는 일은 자신의 짐을 떠맡기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고생과 온몸의 상처로 얻은 지혜와 연륜을 고스란히 다음 사람에게, 다음 세대에게 물려 주는 일입니다. 그리고 홀연히 떠나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이별하기로 작정하시고 하시는 말씀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당신께서는 하실 말씀이 많습니다. 그 말씀은 모두 하셔야 할 일이기도 합니다. 부활하신 그분의 몸과 능력은 이제 제한도 없이 자유롭습니다. 게다가 제자들과 오랫동안 살을 맞대고 살아서 그 누구보다도 친밀하지 않나요? 당신의 가장 힘센 능력을 갖추고 다시 돌아온 제자들과 멋진 팀워크를 발휘해야 할 때가 아닌가요?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당신보다는 성령이 오셔야 “너희를 이끌어 진리를 온전히 깨닫게 하여 주실 것”이라 하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 말씀을 어떻게 알아들어야 할까요?
놀라운 변화와 새로운 관계는 이때 일어납니다. 새로운 사명을 맡은 성령님은 자기 멋대로 생각하거나 말씀하시지 않고 들은 대로 알려주실 것이라 합니다. 그 성령님은 자신이 아니라, 떠나고 물러난 “예수님을 영광스럽게 하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 아버지께 모든 영광을 돌렸던 신앙과 행동이 성령님에게서도 되풀이됩니다.
이것이 새롭게 등장하는 삼위일체의 관계입니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관계는 종속적인 관계가 아닙니다. 서열의 관계, 주종의 관계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권력 세습의 관계도 아닙니다. 성부 하느님의 창조 세계가 예수님께서 펼치시는 구원 활동의 무대가 되고, 예수님의 구원 활동은 성령님의 활동으로 이어져 확장되는 관계입니다.
이로써 다시 성부 하느님이 펼치신 창조 때에 우주 전체에 숨결을 불어넣었던 기운과 바람인 성령님의 활동은 모두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 펼쳐지는 은혜의 힘이 되어 우리에게 확장됩니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시고 예수님께서 몸소 피땀 흘리셨던 이 땅은 성령님을 통해 은총의 자리로 거룩해집니다. 내려놓고 떠남이 있어서 펼쳐지는 은혜입니다. 내려놓고 떠남이 만들어내는 신비입니다.
떠나는 일과 작별은 세상에서 쓸쓸한 일로 보일는지 모릅니다. 우리가 맞이할 궁극적인 떠남과 이별인 죽음을 무서워 하는 까닭은 그 쓸쓸함에 대한 두려움일 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의 삶에서 보면, 신앙의 눈에서 보면, 떠나는 일은 아름다움이 커지는 일입니다. 자신이 선대의 지식과 지혜, 신앙과 실천 속에서 이어받은 것들이 더욱 넓어지고 더욱 환하게 꽃 피우도록 자리를 마련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떠남과 죽음을 받아들일 때, 우리의 죽음은 죽음이 아닙니다. 그것은 내일 예수님께서 세상을 떠나는 모습처럼 영광스럽게 하늘로 오르는 일, 승천일 것입니다.
신앙인은 떠남이 쓸쓸해서 아름다운 사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