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성공회는 교회에 대한 내 생각을 바꿔놨다.”
번역자의 발뺌
영 가디언 지에 난 테오 홉슨(Theo Hobson)이라는 젊은 신학자의 글을 올린다. 그의 경력에서 보이듯, 조직신학 분야에서 학위를 하고(교회의 권위 문제), 로완 윌리암스 캔터베리 대주교의 신학, 특히 그의 성사적 교회론에 대한 비판적 저작을 펴낸 바 있다. 제도적 교회의 문제, 특히 영국 성공회의 국교회 지위를 비판하면서, 스스로 제도 교회를 나와 가족과 함께 거리에서, 혹은 어느 곳에서 새로운 교회 운동을 벌이고 있는 모양이다. 그의 짧은 글 하나는 우리 말로도 소개된 적이 있다. 테리 이글턴의 <이성, 신앙, 그리고 혁명>(우리말 번역본 제목은 기괴하게도 <신을 옹호하다>) 서평.
그의 칼럼을 내 식대로 읽는다면, 그의 중요한 지적 하나는 교회 전통 안에서 발전된 제도적 교회의 어둠 뒤로 새롭게 발견하는 제도적 교회의 경험과 가능성이다. 그리고 그것은 ‘의례'(ritual)의 전통에 대한 재발견과 연결된다. 이는 내가 언젠가 말한 바 있는 문제의식과 닿아 있다. 예를 들어, 위계(hierarchy)는 늘 오용 자체, 혹은 오용의 근원인가? 권력은 그 자체로 나쁜 것이며, 저항의 대상만 되는가? 이 의문이 필요하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위계와 어떤 권력과 맞서고 있으며, 어떤 위계/질서와 어떤 권력/힘을 만들어 내려 하는가로 고민의 방향을 돌려야 한다. 지배하는 권력(power-over)이 아닌, 보호하며 섬기는 권력(power-within)으로 위계와 권력을 재규정할 때라야, 정치 혹은 권력에 대한 만연한 혐오주의의 덫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 와중에 ‘의례’는 이러한 새로운 위계와 권력의 삶을 실험하고 훈련하는 새로운 시공간이다. 이는 전례(liturgy)의 목적이기도 하다.
번역은 맥락과 맥락을 연결한다. 번역어는 그 사이에서 불안하게 휘청거린다. 아랫글에서 가장 휘청거리는 번역어는 ‘리버럴'(liberal)과 ‘자유주의'(liberalism)이다. ‘리버럴’과 ‘자유주의’는 그 번역어 이전과 이후에도 진보와 보수 양쪽에서 좁은 이해로 공격받아 고생해 온 서러운 개념이다. 그 서러움을 여기서 다 풀 수는 없겠고, 번역자의 발뺌을 일러두기로 삼는다.
원문의 “liberal”은 대체로 ‘리버럴’ 혹은 ‘자유로운’으로 번역했다. (즐겨찾는 맞춤법 검사 사이트는 이를 ‘혁신적’ 혹은 ‘진보적’으로 고치라고 조언하지만, 무시했다.) ‘자유주의자’ 혹은 ‘자유주의적’이라는 이데올로기적인 냄새가 나는 표현으로 제한하기에는 그 경계가 넓고 모호하다. 그러나 이 문제의식에 일관되지 않게 “liberalism”을 통상 번역하는 대로, “자유주의”라고 했다. 이 비일관성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기도 하지만, 이른바 ‘자유주의’ 개념을 인식하는 우리 안의 양면성을 드러내는 방식이기도 하다. 원래 글에서 말하는 ‘리버럴’과 ‘자유주의’ 개념에 가장 가까운 용례는 고종석에게서 본다, 고만 적는다. ‘Post’는 ‘이후’ 또는 ‘탈'(脫)로 번역할 수 있겠으나, 그 의미의 이중성때문에 ‘포스트’로 남겨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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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성공회는 교회에 대한 내 생각을 바꿔놨다.”
테오 홉슨
단골 독자라면 알겠지만, 그동안 나는 이 난(가디언지 Comment is Free: 역자 주)을 비롯하여 이곳저곳에서 좀 더 급진적으로 리버럴한 그리스도교를 논하는 일에 많은 시간을 썼다. 영국 성공회(Church of England)의 국교 유지를 맹렬히 비난한 것으로 시작하여, 교회 모든 주요 형식들이 자유와 동떨어진 사고방식들로 가득 차 있다고 비판했다. 정말로 리버럴한 그리스도인들은 새롭고, 아나키적이며, 포스트-교회의 그리스도교 문화를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런데 어느 중요한 지점에서 내 마음을 바꿔 먹었다. 조직을 갖춘 종교가 그렇게 나쁜 방식은 아니겠다고 이제는 생각하게 되었다. 다양한 형태의 권위주의적 형식들은 피할 수도 있거니와, 구원을 받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다.
생각을 고쳐 먹은 데는 두 가지 일이 있었다. 첫째, 몇 년 동안 살핀 끝에, 새로우면서도 포스트-제도 교회의 그리스도교 문화를 아주 잘 드러내고 있는 실체를 찾는 데 실패했다는 점을 인정해야 했다. 둘째, 내 생각에 반대되지 않는 교회의 한 형식을 경험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약 10년 전, 9.11 사태 직후에 일어난 논쟁을 통해서 나는 영국 성공회에 대한 내 헌신을 재고하게 되었다. 나는 영국 성공회가 그 국교회의 위치를 박차고 나오면서 스스로 개혁해야 한다고 믿었다. 개혁이 있었나? 전혀 아니었다. 영국 성공회 내부에는 그러한 개혁에 대한 의지가 거의 없음을 발견했다. 오히려, 보수적인 목소리들이 점차 지배하게 되었다. 이들 보수적 주교들과 신학자들은 세속의 자유주의가 암울한 위협이 되고 있다고들 떠들었다. 나의 환멸은 교육 분야에서 영국 성공회가 하는 역할을 보면서 끝을 봤다. 영국 성공회는 이류 학교 운영에 점차 관여하면서, 실속 없는 교회 참석률 올리기에 급급했다.
다른 교회들도 내 관심을 끌지 못했다. 모든 제도 종교들은 구제 불능의 꼴통들 같았다. 비국교 교회들도 오야붕스런 교리주의로 끌려가는 것 같이 보였고, 그리스도교와 자유주의 사이의 친화성을 선포하는 데 실패했다. 그 때문에 나는 새롭고, 좀 더 급진적이며, 리버럴한 그리스도교를 주장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런 그리스도교는 세속의 진보적 생각을 인정하면서, 제도적인 정통주의를 경계한다. 전통적인 교회 대신에, 나는 자유로운 형식과 축제적이며 예술적으로 신앙을 표현하는 어떤 느슨한 문화를 제안했다. 새롭고 자유로운 종교 문화 말이다.
그러나 참여할 만한 이런 문화를 찾지 못했다. 나도 경험해 본 대안 예배 운동(alternative worship)의 몇몇 시도들은 영국 성공회가 소심하게 진행하는 것들이었다. 교회를 멀리하는 몇몇 그리스도인들을 만났지만, 그들은 어떤 일을 하는 데는 너무 냉담했다. 정말 인정하기 싫었던 사실은, 제도에 기초한 그리스도인들만이 의례의 중요성을 이해했다는 점이다. 이들만이 고대의 어느 팔레스틴 사나이에 대한 예배의 의례에 깊이 참여했던 것이다. 사실, 이러한 참여 없이는 그 무엇도 그리스도교라 부를 수 없다.
조직된 종교는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자유롭지 않다. 그러나 조직된 종교만이 그리스도교 의례를 조직할 수 있는 것 같았다. 이 의례가 없다면 그리스도교는 그저 모호한 관념의 집합에 불과하다. 나는 의례(ritual)가 그 제도들로부터 해방되었으면 했다. 그러나 솔직히 말해서 어떻게 가능한지 알지 못했다. 이 질문을 몇 년 동안 살폈지만, 그 어떤 대답도 얻지 못했다.
그러다 작년에 나는 미국 뉴욕으로 옮겨 갔다. 그곳에 좀 더 강력한 포스트-제도적 그리스도교 문화가 있는지 보고 싶었다. 좀 더 구체적인 “이머징 처치” 운동을 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 있다. 그러나 제대로 발견했는지는 모르겠다. 미국 성공회(The Episcopal Church)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갖게 될지 궁금했다. 미국 성공회는 국교회가 아닌 것을 자랑스러워한다. 그리고 세계 성공회 여러 교회와는 달리 동성애 혐오의 원리주의와도 단절했다. 그러면 여기서 자유주의의 어떤 모델을 발견할 수 있을까? 아니면 여전히 제도 종교의 다양한 병증에 시달리고 있는가? 아마도 후자이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놀랍게도, 미국 성공회 예배의 맛은 내게 이런 질문을 하게 만들었다. “바로 이거 아냐?”
세계 성공회의 위기를 뒤돌아 보면서, 미국 성공회의 담대함에 깊은 인상을 받은 나 자신을 발견한다. 진 로빈슨 주교의 성품을 유보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은 그리스도교의 기본 원칙 하나가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도덕적 원리주의에 반대할 필요가 있으며, 모든 이들에게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고 말이다. 이것은 사도 바울로의 프로젝트였다. 아이러니하게도 바울로는 보수적인 인사들에게도 무기를 제공하고 있다. 이 위기는 바울로의 마음 내부에서 일어나는 논쟁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나는 리버럴한 성공회 신앙을 (모호하게) 믿으며 자랐다. 그리고 그것이 대부분 신화였다는 것을 점차 알게됐다. 영국 성공회는 항상 자유주의에 양가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 문제에 과감하게 직면하기보다는 점잔빼며 무시했다. 정말 영국 성공회에도 지적이며 리버럴한 목소리가 있지 않나? 그렇다. 그러나 그들의 범위는 제한적이다. 그들은 방 안에 있는 코끼리를 무시하는 실용적 방법을 택했다. 교회를 어슬렁거리는 그 늙은 반(反)리버럴의 저주를 말이다.
이곳의 공기는 더 상쾌하다. 미국 성공회는 지난 십여 년 동안 리버럴한 그리스도교의 전 지구적 선구자로 등장했다. 이 점이 내가 아직 교회를 포기하지 않도록 나를 설득하고 있다.
번역: 주낙현 신부
원문: 英 가디언 誌 2011년 1월 28일 치 http://goo.gl/PgnPx
January 31st, 2011 at 3:39 pm
“조직된 종교는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자유롭지 않다. 그러나 조직된 종교만이 그리스도교 의례를 조직할 수 있는 것 같았다. 이 의례가 없다면 그리스도교는 그저 모호한 관념의 집합에 불과하다. 나는 의례가 그 제도들로부터 해방되었으면 했다. 그러나 솔직히 말해서 어떻게 가능한지 알지 못했다.” 제 마음의 표현을 찾아준 문단입니다.
아마도 이렇게 교회를 중시하는 진보신학자의 애정어린 참여가 있기에 미국성공회가 진보그리스도교의 전지구적 선구자가 되지 않있을까 생각합니다. 이런 점에서 천주교로 간 영국성공회주교들과 이번 관구장회의에 불참한 주교들의 행동을 애도합니다.
[Reply]
fr. joo Reply:
February 9th, 2011 at 9:08 am
차요한 / 오랜만입니다. 글의 핵심 가운데 하나는 “의례”(좀 더 정확히 말하면 ‘전례’)를 생활 방식으로 갖는 ‘제도적 교회’로서 진보적/리버럴한 신학과 삶을 발전시켜나가는 것이라 읽을 수 있다고 봅니다. 곧, 제도와 전통에 안주하지도 무시하지도 않고, 여러 ‘말과 정신’ 뿐인 ‘진보-입네’하는 신학을 넘어서는 두 가지 과제가 중요하다는 의미로 확장해서 생각합니다. 이 점을 잡고 씨름해 주셨으면 합니다.
[Reply]
June 8th, 2011 at 7:36 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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