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 후 잡감 – 신학, 식민지성, & 역사의 맥락

1. 세계 성공회 관구장 회의가 열리고 있다. 우간다 성공회를 포함한 아프리카의 여러 성공회 관구장들은 이 관구장 회의를 반대하며 참석하지 않았다. 미국 성공회 의장 주교가 여전히 제재 없이 참석한다는 이유였다. 함께 자리에 앉을 수 없다고들 했다. 이런 현상을 두고 브라질 관구장 마우리치오 주교는 “에큐메니칼 대화도, 다종교간 대화도 가능하다면서, 왜 성공회 주교끼리는 대화할 수 없단 말인가?” 되물으며 그 보수적인 관구장 주교를 비판한 바 있다. (기사 연결)

2. 한편, 우간다 성공회는 우간다 정부가 추진 중인 동성애자 처벌법을 지원하고 있다. 이 법은 동성애자를 사형에까지 처할 수 있다. 국제적인 비판이 지속되지만 안하무인이다. 그러던 중에, 우간다 동성애자 인권운동가 한 사람이 혐오 범죄 행위의 대상이 되어 목숨을 잃었다. 관구장 회의를 주재하고 있는 캔터베리 대주교 로완 윌리암스 박사는 곧장 동성애 혐오 범죄 행위를 규탄하며, 영국 정부에 우간다 동성애자들의 망명을 허용하는 조치를 촉구했다. (기사 연결) 그러나 알만한 이들에게 그의 목소리는 늘 한발 늦으신 것 같다. (cf. 배신, 식민주의, 그리고 캔터베리 대주교)

3. 로완 윌리암스 대주교의 신학에 대한 비판적 연구 저작을 내기도 해 살핀 바 있는, 젊은 신학자 테오 홉슨(Theo Hobson)의 영 가디언 지 칼럼을 하나 읽는다. 그는 오랫동안 아나키적 교회 문화를 꿈꾸며 거리 예배 등 매우 파격적인 교회 실험을 해 오던 실천적인 신학자이다. 칼럼을 보니 그가 아예 미국으로 이주했나 보다. 그가 추구하는 교회의 실험을 확장하기 위한 것일게다. (어떤 이의 ‘귀여운’ 부탁도 있고, 읽으며 마음먹은 바 있어서 전문을 번역해서 따로 올렸다.)

4. 복잡한 이유로 미국 유학행을 결심했을 때, 많은 이들은 ‘성공회라면 당연히 영국에 가서 공부해야지’하며 걱정 반 빈정거림 반으로 묻곤 했다. 물론 내 이유와 결심은 상당히 확고한 것이었지만, 그리 자주 설명한 기회가 없었다. 아무리 설명해도 “성공회=영국 성공회=국교”라는 잘못된 등식에 사로잡혀 있는 이들은 아예 귀를 열지 않았던 탓이다. 여기서 미국 신학생들에게 “성공회 신앙 전통과 삶”을 교수 신부님과 함께 가르치는 마당이지만, 한국에서는 내 ‘미국 성공회’ 경험은 ‘모(母) 교회 영국’이 아닌 변방의 목소리라고 치부되곤 한다. 혹은 미국물 먹어서 이상한 목소리를 들고 사람을 선동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애처로운 일이다. 우리 교회에, 그리고 나 자신에게.

5. 여러 이유에서 한국에 있을 때부터 세계 성공회 소식을 신자들과 나누려고 애썼고, 이곳에 와서도 그렇게 했다. 그러나 요즘은 시들해졌다. 편견에 싸우는 일에 지친 탓도 있다. 미국 성공회, 아니 세계 성공회에 대해서, 그보다는 좀 더 근본적으로 성공회 신앙의 전통에 대해서 어떻게 말해야 할까? ‘모 교회’를 숭상하든 어떻든, 신앙은 특정한 시공간의 맥락에서 일어나는 하느님 경험에서 비롯한다. 그 신앙의 다양한 경험을 보편적 언어와 논리로 풀어서 소통해보려는 노력이 신학이다. 이 점에서 신앙과 신학은 모두 역사적 맥락 안에서만 이해 가능하다.

6. 성공회 신학자들의 신학과 성공회 전통의 신학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손꼽히는 성공회 전통의 신학적 대가들과 그들의 신앙과 신학을 이야기하는 일은 좀 더 쉬울 수 있다. 그러나 세계 성공회의 경험이 없이는 성공회 전통의 신학을 다루기도 말하기도 어렵다. 그 경험 중에서 스코틀랜드 성공회와 미국 성공회의 경험이 가장 획기적이라 할 만하다. 스코틀랜드 성공회는 국교의 위치를 점한 적이 없었고, 늘 소수자로 존재했다. 또 미국 성공회는 소위 신대륙 식민지에 이식된 영국 교회에서 최초로 독립한 성공회다. 이 독립된 성공회를 기초로 세계 성공회(Anglican Communion)라는 새로운 발전이 있었다. 그 식민지 경험와 독립, 그리고 그 와중에서 마련된 자기 정체성 찾기가 독특한 성공회의 기풍을 만들었다. 이 경험에서 배우지 않으면 우리 역시 식민지 교회를 벗어나기 어렵다.

7. 앞에 올려놓은 테오 홉슨의 칼럼(우리말 번역)은, 영국 성공회 안에서 자라나, 그 도저한 문제들에 환멸을 느끼고 실험적 교회 운동을 벌이다, 미국 성공회까지 경험을 확장하려는 노력에서 나온 고민이다. 그의 고민은 끝나지 않았다. 아니, 이제야 비로소, 식민지 경험에서 독립하여 그 경험과 전통의 대화 속에서 자기 정체성을 구축하려 노력했던 미국 성공회의 역사 한 가닥을 겨우 발견한 것인지도 모른다. 아직은 단정하기 어렵다. 미국 성공회는 홉슨이 추구하는 ‘자유주의’의 다른 어둔 면에 사로잡혀 있기도 하니까. 이 어둔 면을 발견하여 그의 비판과 실험을 밀고 나갈 수 있을 때라야, 그는 정말 그의 모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아니다. 모델은 만들어 나갈 것이지, 발견할 대상이 아니다. 그가 그 모델을 만들어가길 빈다. 나 역시 우리 맥락에서 어느 모델을 만들지를 좀 더 구체적으로 고민하고 실험해야 한다.

3 Responses to “번역 후 잡감 – 신학, 식민지성, & 역사의 맥락”

  1. leopord Says:

    오랫만에 덧글답니다. 연결된 번역문과 테오 홉슨의 이글턴 서평도 흥미롭게 읽었어요. 인간이 서로 맺는 다양한 관계에 있어서 권력 자체를 배제하거나 회피할 것이 아니라, 보다 평등한 권력을 획득할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떠올랐고, 또 어느 정도 마주친 듯해 기뻤습니다.

    다시 본문에 대해 말하자면, 신학의, 그리고 실천의 식민지성과 역사의 맥락을 생각한다면 “어떻게 ‘전통’과 결별할 것인가?”라는 화두와 마주치지 않나 싶습니다. 거기서 어떤 ‘새로운 전통’ 혹은 ‘더 나은 전통’을 추구한다는 건 자칫 단순한 자리바꿈에 불과한 건 아닌가 조심스러워지고요. 신부님의 고민에 저도 머리를 깨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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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r. joo Reply:

    반갑습니다. 허튼 잡감의 편린에서 어떤 즐거움을 찾아주시니 고맙습니다.

    지적하신 대로 “전통과의 결별”에서 “어떻게”가 중요하다고 봅니다. 그래서 저는 ‘결별’보다는 ‘단절과 연속’이라는 점이 전통을 생각하고 다루는 방법이라고 봅니다. 말씀하신 대로, 편만한 ‘자리바꿈’의 결과들은 대체로 권력/이권의 문제에서 자유롭지 않을 때, 즉 새로운 권력의 삶을 실험하여 몸에 훈련하지 않았을 때 필연적으로 미끄러져버리는 결과라고 생각해서요. 이에 대한 고민이 깊어지는 요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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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via media 주낙현 신부의 성공회 이야기 » Blog Archive » “윌리암스 캔터베리 대주교와 세계 성공회 10년” 블로깅 목록 Say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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