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언자적인 종교와 예배
로버트 벨라(Robert N. Bellah)는 버클리 대학(UC Berkeley)에서 가르치다 은퇴한 사회학자이다. 그리스도교 신자인 그는 종교의 사회적 현상, 특히 미국 사회와 종교의 관계를 분석하는 연구를 진행하면서, 종교의 사회에 대한 공적 책임에 대한 문제를 제기해왔고, 미국 사회와 종교의 지속적인 개인화 현상에 대한 분석과 비판을 거듭해왔다. 성공회 신자이기도 한 벨라 교수는 이러한 사회의 공공성을 공동선에 입각해 재구축하는 일에 종교와 그 예배가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를 여러 글을 통해서 밝히기도 했다. 특히 공동체 예배를 중시하는 성공회 전통의 신자였던 영향이 없지 않을 것이다. “민주 사회 안에서 예언자적 종교”(Prophetic Religion in a Democratic Society, 2006)라는 에세이 끝에서, 그는 “예배”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종교 전통들이 공동의 삶에 가장 깊이 기여할 수 있는 지점은 무엇인지를 논의하면서 내 말을 마치고자 한다. 우리는 종교에 찾아오는 모든 사람들과 나누는 대화에 참여함으로써 좀더 넓은 시각을 공공 영역에 가져올 필요가 있다. 그러나 신앙인들이 제공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것은 예배의 자리이고, 영적 실천의 자리라고 믿는다. 주요 종교들 안에서, 예배는 “사적인” 것이 아니다. 오히려 예배는 공적이다. 국가의 지원을 받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모든 이들에게 열려 있고, 모든 이들에게 관심을 갖는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예배는 우리의 모든 적극적 행동의 원천이요 목표이다. 예배는 우리가 지극히 의식적으로 궁극적 실재와 연결되는 곳이며, 이 힘든 세상 속에 우리의 사명을 갖고 나가도록 하는 힘을 얻는 곳이다. 무엇보다, 예배는 우리의 비전이 살아 움직이며, 거듭날 수 있는 곳이다. 앞서 나는 위르겐 하버마스가 고전 철학 사상을 두고 화산의 “용핵”(molten core)이라 표현한 이미지를 사용한 적이 있다. 이것은 예배에 대해서 생각할 때도 도움이 된다. 바로 예배 안에서 우리는 우리 신앙의 “용핵”과 만난다. 바로 예배 안에서 우리의 종교적 상상력이 응축되어,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나누는 “거룩한 비전”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여러 방면에서 일하고 있는 수많은 활동가들이 있다. 그리고 신앙인들도 때로 이러한 활동가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어떤 종교 전통에 있든지 간에 그 신앙인들이 자신들을 규정하는 종교적 실천들을 무시한다면, 그 신앙인들은 세상에 대해서 어떤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신앙인들이 만들어낼 수 있는 차이란 무엇인가? 종교 사회학자로서 나는 종교와 영성 전통이 대체로 기존 질서(status quo)를 옹호하는데 열심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생각이 다르더라도 침묵하고, 어려운 문제를 제기하지 못하게 했다. 그러나 종교와 영성 공동체들을 통해서 위대한 문제 제기가 터져 나오고, 그 사회에서 그저 당연하게 여기는 것들을 넘어서서 궁극적인 실재에 비추어 이 문제들을 검토하는 이들이 나왔다는 것도 알고 있다. 때로 이들은 자신들이 속한 사회를 거부하고 비판했다. 아무래도 신앙인들은 계속해서 이 거부와 비판 사이에서 움직일 필요가 있다. 그러나 신앙인들은 ‘대낮같이 환하게’ 실천한다. 신앙인들은 자신들의 삶의 방식을 통해서 그들의 대안적 현실을 좀더 넓은 사회에 보여주는 것이다. 이들이 없이는 공공 영역은 급격히 퇴락하고 만다. 신앙인들 어느 누구도 그 혼자서는 답을 낼 수 없다. 하지만 함께하여 서로에게서 배운다면, 신앙인들은 우리가 맞딱드린 곤경에서 우리를 꺼내어, 덜 파괴적이며, 이 지구 위에 살아가는 모든 이들를 위해 좀더 건설적인 삶의 형식으로 안내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종교사회학을 기능주의로 보든, 그의 주장을 어떤 책임주의 명령에서 나온 것으로 바라보든 간에, 전례 전통의 교회들이 예배를 두고 사회와 세상에 대한 새로운 대안적 질서(order)의 표현이요, 그 질서의 본연인 “천상 전례”의 반영이라는 시각을 발전시켜왔으니, 그의 생각이 이런 교회 전통의 이해에서 비롯되거나 맞물려 있을 법도 하다. 전례 혹은 예배는 새로운 사람살이의 틀을 만들어내는 핵심적인 실천이다.
후기; 벨라 교수를 주일 교회 미사에서 그리고 몇몇 특별 강연에서 만나 인사를 나눈 적이 있었다. 그의 충실한 독자는 아니었으나, 다시 지난 몇몇 글들을 들춰보면 흥미로운 것들이 눈에 띈다. 그는 마르크스-베버-뒤르켕을 학문적 토대로 하며, 틸리히를 통해 그리스도교를 재발견하여 성공회 신자가 되었고, 알리스터 맥킨타이어(After Virtue)의 윤리학적 전망을 줄곧 인용한다. 깊이에 차이가 심하지만, 개인적으로 그 궤적과 관심의 흐름에서 놀라운 공통점을 발견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