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완 윌리암스, 진 로빈슨, 그리고 사제직

공정함을 잃은 듯한 로완 윌리암스 캔터베리 대주교 소식을 접하는 일은 몹시 안타깝다. 게다가 그분의 학문적 통찰에 깊은 영향을 받고 있는 나같은 학생 처지에서나, 그분의 영적 지도력이 매우 중요한 한 교단 전통에 소속된 한 성직자로서도 이런 글을 올리는게 민망하다.

그러나 세계성공회 안에서 일고 있는 동성애 관련 논란에 대해 그분이 지난 몇년간 보여준 모습들은 “신학적 주장 따로, 정치-사목적 판단 따로”인 것 같다. 그 아쉬움이 이번에는 좀더 실망스럽게 불거졌다.

캔터베리 대주교 사무실(람베스 궁)이 현재 영국을 방문 중인 미국성공회 뉴햄프셔 교구장 진 로빈슨 주교(미국성공회의 공개적인 첫 동성애자 주교)가 영국 안에서 “사제직 기능 수행”을 허락할 수 없노라고 로빈슨 주교에게 이메일을 보냈다는 것이다.

당사자인 진 로빈슨 주교는 곧장 이러한 금지 조치를 대주교에 대한 존경의 뜻으로 수용하겠노라고 말했다고 한다.

여기서 말하는 사제직 기능의 실제 내용은 교회 안에서 설교하고 미사를 집전하는 것이다. 사실 그 판단은 해당 교구와 교구장 주교가 하면 되는 것이지 캔터베리 대주교가 나설 일은 아니다. 그런데도 이런 조치를 취한 것은 여러 면에서 오버하는 것으로 보이며, 특히 로빈슨 주교에 대해서는 공정함을 잃은 듯 하다.

교회법적인 논란이 먼저 일고 있는 모양이다. 미사 집전에 관한 문제는 확인되지 않으나, 설교하는 것은 초청한 교회의 허락만 있으면 된다. 초청한 교회가 있고, 소속 교구장이 잠잠한 처지에 대주교가 이럴 권한이 있느냐는 것이다.

캔터베리 대주교는 이메일 말미에 세계성공회 전체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이런 금지 조처를 하게 되었노라고 유감을 표명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동성애자 주교의 활동은 금지하고 다른 괴상한 일들에 연루된 외국 주교들의 활동은? 해당 기사는 이미 익히 알려진 다음과 같은 사례를 든다.

캔터베리 대주교는 세계성공회의 분열을 겁주고 있는 나이지리아 피터 아키놀라 대주교가 영국에 방문했을 때 어떤 금지 조처를 말하지 않았다. 아키놀라 대주교는 자국 내 정부를 도와 동성애자 탄압을 정당화하는 법안을 만들고 있고, 이는 여러 국제 인권 단체에서 비판을 받고 있기도 하다. 게다가 아키놀라 대주교는 자국에서 일어난 이슬람 신자들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집단 보복 학살과 연루되었다는 의혹을 받고 있으나 시원한 대답을 못내놓고 있는 처지다.

아프리카 다른 성공회의 처지는 더 심각하다. 짐바브웨의 말랑고 대주교는 무가베 정권의 독재와 연루된 한 주교의 행동을 심의하려는 교회 재판소를 이유 없이 해산해 버렸다. 그 대주교가 영국에 방문했을 때도 그는 자유롭게 설교하고 집전할 수 있었다. 요크 대주교가 통탄할 일이다.

또 미국과 캐나다, 그리고 브라질 성공회에서 탈퇴한 교구들을 자기 관구로 받아들이고, 타 관구에 관구장들의 허락 없이 방문하여 분열을 도모하는 성공회 사상 최고의 극단적 보수파로 이뤄진 서던 콘(남아메리카)의 베나블레스 주교도 윈저 보고서의 경고를 멋대로 무시하고 있으나, 그가 영국에 방문했을 때 어떤 제재 조치를 받은 적이 없다. 오히려 그는 캔터베리 대주교와 올 3월 함께 만나서 기도했고 생각을 같이했노라고 떠들고 다닌다.

캔터베리 대주교의 이런 태도와 행보의 문제점에 대해서 여러번 지적된 바 있거니와, 세계성공회 총무 신부는 언젠가 캔터베리 대주교가 영국 내 보수파들에 휩싸여 이 문제에 대해서 만큼은 제대로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 것다고 불평한 바 있다.

이런 일련의 행보는 캔터베리 대주교 자신의 신학적 주장 혹은 성찰과도 모순된다. 그동안 나는 그분의 글과 책을 여러 권 읽고, 때로는 번역하여 소개하고, 또 그분을 변호하는 글까지 쓴 적이 있다. 며칠 전에는 프란시스 수도회의 크리스토퍼 수사님이 윌리암스 대주교가 쓴 사제직에 대한 신학적 성찰(“Space for the Divine”)을 보내와, 이를 읽고 그분의 깊은 통찰에 감복하여 내 자신의 사제직을 되새기고 있던 참이었다.

윌리암스 대주교는 전통적인 로마 가톨릭 교회의 사제직 이해나, 개신교의 성직 이해와는 달리 이렇게 적었다.

십자가 안에서 보이는 하느님은 자신의 ‘영역’ 수호를 거절한 분이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스스로 영역 수호를 거절하는 인간의 삶 속에 그리고 그 인간의 삶을 통하여 지극히 역설적인 방법으로 하느님은 존재한다. 이 삶 속에 하느님은 모든 순간과 생각과 행동에 침투하시며, 그 삶을 하느님께 순종하게 하신다…

[이러한 십자가 사건의 결과] 더 이상 도로 닫힐 수 없는 하늘과 땅 사이에 어떤 열린 문이 마련되었다. 이 공간은 하느님의 행동과 인간의 현실이, 어떤 대결이나 두려움 없이, 함께 하는 곳이며, 이곳이 바로 예수께서 존재하는 곳이다. 이 공간 속에서 인간은 오직 주어진 것들에 마음을 열며, 하느님은 그 어떤 것도 요구하지 않고, 다만 멈추지 않는 사랑 안에 머무신다. 그 사랑은 인간의 세계와 인간의 언어로는 오직 ‘상처입기 쉬움”(vulnerability)을 통해서만 상상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공간에서 인간의 경쟁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이 공간에서 실패를 받아들이는 것은 끝이 아니라, 오히려 시작이다. 이 공간에서는 미리부터 어느 누구도 배척당하지 않는다.

예수의 행동은 이 공간과 문을 여는 것이었다… 사제직의 임무는 이제… 이 예수를 통하여 마련된 공간을 집으로 삼고자 하는 이들에게 [이 공간의] 증인이 되는 것이다… 사제직이란 이제, 예수 안에서 신과 인간의 행동이 겹쳐진 그 공간에 자리잡는 것이다. 그리하여 인간의 세계가 바로 그런 공간이 존재함을 알게 하는 일이다.

인간의 공동체요, 실재의 물리적 공간인 교회는 정기적으로 이곳에 모임으로써 그 어느 곳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인간 경험의 측면들을 위한 자리를 마련해 준다…

영국 성공회[sic] 안에서 사제직은 하느님께서 열어 놓으신 이 공간을 위해 철저히 봉사하는 것이다. 그 공간으로 들어가는 문을 열어, 혼란스러운 인간이 서서히 그 안으로 들어가도록 돕고, 그 안에서는 모든 복잡한 것들과 감정적인 격동과 영적인 불확실성에도 불구하고 이를 받아주고 들어준다는 것을 이해시키는 것이다.

Rowan Williams, “Space for the Divine: An Essay on Christian Priesthood in Contemporary Culture” in Praying for England: the Heart of the Church edited by Sam Wells ad Sarah Coakley (T. & T. Clark Ltd, forthcoming in June 2008)

이 신학적 성찰은 십자가의 구원 사건과 사제직과 교회론과 선교의 개념까지 포괄하는 매우 깊고 풍요로우며 아름다운 전망을 담고 있다.

그런데 캔터베리 대주교는 자신의 이 신학적 성찰을 실제로 자신의 사제직 안에서 펼치고 있는가?

10 Responses to “로완 윌리암스, 진 로빈슨, 그리고 사제직”

  1. 김바우로 Says:

    로완 윌리엄스 캔터베리 대주교님이 호평한 책 (The Free of Charge) 를 읽고 있으면서, 대주교님이 신앙적으로 안목이 깊은 분이구나라는 감탄을 했었습니다. 아마도 이번 논쟁도 성직자로서의 깊은 안목으로 잘 해결하실 거라고 봅니다.

    [Reply]

  2. fr. joo Says:

    김바우로 / 로완 윌리암스 주교님의 학문적 영성적 안목은 탁월한 것으로 정평이 나있습니다. 그분을 읽을 때마다 빈자리 없이 꽉꽉 채워져 있는 느낌을 받고 무겁게 배우고 있습니다.

    세계성공회 전체를 둘러싼 사태의 복잡성과 그 해결의 어려움을 부인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지적하려는 것은 최소한의 ‘공정한 대처’입니다. 논쟁의 한 측면에만 몰두하여, 오히려 더욱 심각한 윤리적인 문제들, 그리고 교회가 도전해야 하는 문제들, 즉 학살과 부패와 독재 부역에 대해서는 비켜가는 일이 보인다는 것이죠.

    그래서 저는 제 자신을 포함하여 학문한다는 사람들의 “문약”(文弱)에 대히 깊이 생각해 보고 있습니다. 물론 매일 기도 때마다 그분을 기억하며 그분이 이미 받은 지혜에 상응하는 용기를 주십사 기도합니다.

    Free of Charge 라 함은 Miroslav Volf 가 쓴 책을 말하는 건가요? 우리 말로도 번역되었나요? 이 분은 매우 탁월한 신학적 성찰을 쏟아내는 분입니다. 크로리아티아 출신으로 몇년 전에 아예 성공회 신자가 되었습니다. 특히 화해와 용서에 관한 신학적 저작들이 탁월합니다. 윌리암스 대주교와도 신학적인 통찰이 어울릴 만하다고 봅니다. 언제 한번 저도 살펴보아야겠군요.

    [Reply]

  3. 혜이안 Says:

    우리 캔터베리 대주교님도 천주교 형제들의 교황님도 이번엔 언행이 무거운 분들이 맡으셨습니다.
    이 세상을 짊어진 그분들 언행이 무겁다고 이 세상까지 무거워지면 안되는데…
    주님, 저희 목자들을 당신 손으로 안배하소서!

    [Reply]

  4. 김바우로 Says:

    예. 신부님 말씀대로 Free of Charge, 예일대 Miroslav Volf 교수가 쓴 책 맞습니다. 한국어판은 복있는 사람에서 역간했으며, 감리교 김순현 목사님이 번역했어요. 그나저나 Miroslav Volf 교수, 아버지가 오순절교회 목사라고 해서 개신교 신학자인줄 알았는데 성공회 신자였군요. 그러고보니까, 실력있는 신학자들중에서 성공회 신자들이나 성직자가 많습니다. 바트 어만, 스탠리 하우워스 등등..물론 우연은 아닐 거라고 봐요.

    [Reply]

  5. fr. joo Says:

    혜이안 / 재밌게 표현해주셨네요. 두 분의 무거움은 차이점도 있고 공통점도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분들이 세상을 짊어진 것 같지는 않구요, 사실 보통 사람들과 신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짊어지고 있죠. ㅎㅎ

    [Reply]

  6. fr. joo Says:

    김바우로 / 바우로님이 흥미로워 할 것 같아 Volf 가 성공회 신자인 걸 언급했고요(역시나!). 훌륭한 신학자들이야 어느 교단 전통에든 널려 있지요.

    정말 흥미로운 건 몇몇 걸출한 개신교 신학자들이 성공회나 천주교, 정교회 쪽으로 적을 옮기느냐는 거죠. 두 가지가 이유가 띕니다. 하나는 가톨릭성(catholicity)과 전통이고, 둘째는 성사적 영성과 전례입니다.

    [Reply]

  7. Paul Says:

    신부님,

    “윌리암스 대주교는 전통적인 로마 가톨릭 교회의 사제직 이해나, 개신교의 성직 이해와는 달리 이렇게 적었다.”

    라고 하셨는데, 혹시 조금 더 설명을 해주실 수 있을까요?

    저의 짧은 지식으로는 천주교의 사제직 이해나, 윌리암스 대주교님의 인용글에서 보여지는 사제직의 이해가 다른 것 같지 않아서요….

    [Reply]

  8. fr. joo Says:

    Paul / 그리스도교 전통에서는 우선 공통점이 많다는 것을 전제하고, 그런 다음에 교단 전통에 따른 강조점의 차이들이 존재하는 것이겠지요. 그런 점에서 “달리”라고 말했으니 그걸 헤아려 주세요.

    그 다른 점들에 대해서는 여전히 신학적인 논쟁이 분명하다고 보구요. 이에 대해서는 몇 년 전에 어느 분과 질문 답변하는 과정에서 간단히 다룬 적이 있으니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만인사제주의

    [Reply]

  9. 차요한 Says:

    전에 USPG에서 발행하는 Transmission에서 “(서양의) 동성애 문제 말고도 빈곤, 부패, 독재 등과 같은 (아프리카의) 더 중요하고 긴박한 현안들이 많으니, 엄한데 힘 빼지 말고 그 현안들에 더 힘을 쏟자.”라고 주장하는 주교님에 관한 기사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동성애를 반대하는 분들은 사실 빈곤과 부패와 독재에 대항하는 데에도 그리 큰 관심이 없는 건가요? 오히려 위와 같은 주장들은 동성애 문제를 폄하하려는 의도가 숨어있는 교묘한 수사인가요? 진정성이 전혀 없다고 할 순 없지만, 그 과정과 방법으로 볼 때, 불순함이 있다고 볼 수 있을까요?

    [Reply]

  10. fr. joo Says:

    차요한 / 실은 그 말씀을 하셨다는 주교님의 견해가 다수를 차지한다 할 수 있지요. 이것은 어떤 사안에 대한 반대, 찬성의 문제가 아니라, 그 한 문제를 전체로 보느냐, 전체의 한 부분으로 보느냐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이른바 “반대” 측 인사들이 실제로 가지고 있는 사회 정치적 입장은 다양하겠습니다만, 드러나기로는 한국의 수구 빰치는 행태를 보이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인용한 위의 주장은 “동성애 문제 폄하”와는 거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동성애를 끌어 안자는 사람들의 것과 거의 같은 의견이라해도 별 무리가 없을 겁니다. 제 블로그 여기저기에 적은 대로 하느님의 선교와 하느님의 통치라는 지평으로 넓혀 놓고 보면, 그 안에서 함께 논의될 문제라는 것이지요. 저는 그렇게 듣습니다.

    [Reply]

Leave a Rep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