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의 성공회? – 그리스도인의 증인됨과 선교

여성 수좌주교의 선출이 미국성공회 관구의회의 전체 뉴스거리는 아니다. 다만 차분히 다른 내용들을 짚어볼 만한 여유가 없거나, 요즘같은 자극적인 세상에 선정적인 소재가 우선이 되기에 정작 깊은 내용들은 지나치기가 십상일 뿐이다. 그렇다고 표면에 떠오른 일들을 모두 비껴서 중요한 것이라고 내세운들 관심이나 갖겠는가? 거창하게 말하자면 여기에 어떤 저널리즘의 한 딜레마가 있으려니 생각하곤 한다. 내내 이 블로그가 절반은 이런 저널리즘의 한 부분이겠거니 싶기에 같은 처지를 벗어나기가 쉽지 않다.

여전히 세계성공회 안에서는 성서와 교리와 전통의 다른 해석에서 비롯된 논란이 줄기차다. 게다가 이것이 교회의 일치와 분열의 문제로 나아가는가 싶다 보면, 그 속내에 자리 잡은 검은 뒷거래와 자본과 권력이 조금씩 드러나기도 한다. 지금 세계성공회를 둘러싼 논쟁은 우리나라의 정치적 혼란과 격투가 실제로 한-미 FTA를 둘러싼 싸움을 통해 보면 좀더 그 속내의 실체가 확연하지는 것과 같을 것이다. 이 돈의 흐름과 작금 세계성공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논란은 시간나는대로 한번 소개하고 다뤄볼 생각이다.

어쨌든 미국성공회 관구의회가 끝났다. 그동안 논란이 된 문제에 대한 어정쩡한 결의안도 있었고, 이에 대한 캔터베리 대주교의 여러모로 아쉽기만 한 “성찰”도 나왔고, 논란이나 대화의 진행이 어떻든 제멋대로인 나이지리아 주교의 행동도 계속되고 있는 참이다. 이전과 달리 캔터베리 대주교의 그 “성찰”에 조근조근 반박할 말이 여럿이고, 이른바 보수파를 자처한다는 “글러벌 사우스”의 행태도 절망적이지만, 좀더 근본적인 것에 대한 반성이 없이는 이에 대한 반응도 내내 싸움질 이상은 아니될 것같다는 생각이다.

이 사정과는 상관이 덜하겠지만, 한국의 성공회는 그나름대로 고민이 많다. 교회의 성장도 그 하나겠다. 그리고 이런 세계성공회의 논란이 이 “성장”이라는 눈으로 보자면 참 어처구니없는 광풍이겠다 싶을 것이다. 그러나 앞선 글에서 윌리암 템플 대주교의 경구를 인용하면서 잠시 물었던 것처럼, 한줌밖에 안되는 한국성공회의 존재 이유에 대한 물음과 성찰이 없이는 성장도 발전도, 아니 그 생존 자체도 회의적일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이다.

내 말을 잠시 뒤로하고, 전직 미국성공회 알래스카 교구장 주교이자, 현재 보스턴 성공회 신학교의 총장인 스티븐 챨스턴 주교 (The Rt. Rev. Steven Charleston)의 목소리를 나누고자 한다. 이 짧은 글이 다만 한국 사회에서 성공회의 존재 이유 찾기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의 한 출발이 되고, 우리 교회가 어떤 되지도 못할 교만함이나 값없는 우월감이 아니라 선교적 사명에 따른 진면목에 대한 반성의 한 계기가 되길 바랄 뿐이다. 관심이 있으시다면 찬찬히 씹어 읽어주시기를…

우리는 어떤 증인이 될 것인가?

스티븐 챨스턴 주교,
보스턴 성공회 신학교 (the Episcopal Divinity School) 총장

성공회 신자들인 우리 앞에 놓여 있는 가장 중요한 질문은 교회의 분열이나 인간의 성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증인됨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증인이 될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그리스도의 증인이 된다는 것은 세상을 향하여 우리의 신앙을 분명히 밝히는 것입니다. 다시말해 우리가 말한대로 실천하는 지를 세상이 보도록 하는 것입니다. 오늘 성공회 신자들은 이러한 증인으로서 실천하도록 부름을 받고 있습니다. 우리의 말과 됨됨이가 일치하는 것을 보여줄 기회입니다. 세상이 우리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증인이 되어야 할까요?

그 대답은 신앙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믿는 것에 대한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성공회 전통 안에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우리는 성서를 믿습니다. 우리는 복음을 믿습니다. 우리가 나누는 신앙의 핵심적인 부분을 강력하게 신앙하면서도, 그것들이 우리에게 의미하는 바에 대해서 서로에게 동의하지 않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차이를 우리 안에서 활동하시는 하느님 성령의 역동적인 현존이라고 여기며 오히려 환영합니다. 우리의 증인됨은 어떤 확신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에 있습니다. 성공회 신자인 우리는 교회 안에 모인 모든 이들이 일시에 똑같은 방식으로 똑같은 것을 믿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대신에 우리는 교회에 모인 이들이 그들이 믿는 내용때문에, 그들이 누구냐에 따라서, 혹은 그들이 어디서 왔느냐를 보고 교회 안에서 쫓겨나는 사람이 있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증인됨은 그리스도 예수의 은총을 통하여 드러난 하느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에 관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잣대로 다른 사람을 판단하기 위해서 사랑에 제한을 가하려 하지 않으며, 은총이 가져다 주는 위험 부담을 감내합니다. 성공회로 들어오는 문지방에는 문지기가 없습니다. 우리는 모든 인간이 지닌 존엄성을 존중하며, 예배 중에 우리 옆에 앉아 있는 이가 누구이건 부끄러워 하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가 하느님의 자비가 필요한 죄인이며, 또한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성공회를 둘러싸고 있는 벽이란 없습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이 세상 속에서 일하신다고 믿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이 우리를 완벽하고, 정결하고, 힘있는 자로 보도록 하는데 관심이 없습니다. 대신에 우리의 관심 사람들이 우리가 정의를 실천하고 있는지, 자비를 펼치고 있는지,은 그리고 우리 모두를 동등하게 사랑하시는 하느님과 함께 겸손하게 걷고 있는지를 지켜 보고 있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우리의 증인됨은 희망에 관한 것이지, 두려움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들이 저마다의 종교적 확신과 문화적 가치, 그리고 사회적 위치에 따라 분열되어 있다 하더라도, 정녕 그들이 그것을 원치 않는 한, 서로 완전히 동떨어져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 속에서 증인이 되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한, 우리는 서로를 두려워 하지 않습니다. 우리 안에 놓인 차이가 크게 보이고, 그 화해를 향한 길이 멀게만 느껴질지라도, 우리에게는 성령님의 인도와 위로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결코 서로에 대해서 절망하지 않으며, 배척하지도 않습니다. 그런 행위들은 성령의 힘에 대한 절망하며, 이를 부인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증인됨은 선교의 사명에 관한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우리를 진리로 이끄시는 한,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명을 짊어지고 나갑니다. 우리는 제자직을 앞세워 교만을 떨지 않습니다. 우리 안에서 여러가지로 서로 동의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우리 앞에는 오직 하나의 선교 사명이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고자 하는 사람의 신앙에 대해서 의문을 품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 사람이 “옳으냐” 혹은 정치적으로 공정하냐 하는 문제는 중요하지 않다고 봅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이 그리스도의 종된 사목에 환영을 받고 있다고 느끼느냐 아니냐라고 생각합니다. 성공회에는 어떤 충성 서약 같은 것이 없습니다. 다만 이 부서진 세계를 치유하려고 돕고자 하는 이들이 해야 할 많은 일들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선교 사명은 이 두려움의 시기 속에서 하느님의 화해에 대한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성공회 안에서 우리는 서로 동의하지 않음에도 함께 서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서로 동의하지 않기 때문에 함께 서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급진적인 희망을 실천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집에는 많은 방들이 있으며, 결국 우리가 선택하기만 한다면 모두 함게 살아갈 하나의 집이 있다고 말하는 신앙을 몸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지금은 이러한 우리의 증인됨을 실천해야 할 때입니다. 이미 지난 1백여년은 전쟁의 공포와 두려움을 통한 애국심으로 우리를 몰아넣은 광기로 점철되었습니다. 이 때에 우리가 실천해야 할 증인됨이란 무엇일까요? 우리가 이 세상에 제시해야 할 대안이란 무엇일까요? 우리가 함께 나눠야 할 신선한 비전은 무엇일까요? 여전히 우리는 “진짜 신앙인” 을 가려내고, 저 사람이 좌파인지 우파인지를 추적하는 일에만 매달리면서, 자신은 진리를 가지고 있다고 짐짓 의인인체 뻐기는 일로 퇴행해야 하는 것일가요? 부와 권력이 우리에게 영원히 중요한 것이라고 여기며 이를 두고 싸워야만 할까요? 서로를 비방하며,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어떤 의심을 부추기는 사람들이 되어야 할까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것보다는 사람들이 우리를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를 두고 더욱 염려해야 하는 것일까요?

지금은 우리의 증인됨을 실천해야 할 때입니다. 지금은 우리 뒤에 놓여 있는 성스러운 배경이나, 우리가 쓴 주교관, 그리고 우리를 내세우려는 어떤 순교자의 관을 벗어내야 합니다. 우리가 실천해야 할 우리의 증인됨이란 무엇일까요?

우리 교회의 어떤 분들에게도 답을 드릴 수는 없고 다만, 내 자신을 향한 답변을 나누고자 합니다. 나는 여러분이 제 신학에 동의하느냐고 묻지 않습니다. 나는 내 방식대로 여러분도 성서를 읽어야 한다고 요구하지 않습니다. 나는 여러분과 내가 여러 가지 문제에서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고, 그 때문에 함께 살아가기가 참 어려울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나나 여러분이나 똑같이 하느님의 용서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이나 나나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도 서로를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수많은 이들이 이 상처입은 세계 속에서 우리를 필요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난하고 굶주린 사람들, 유배되고 갇혀 있는 이 세계의 많은 이들은 우리의 논쟁보다는 우리가 해야 할 좀더 나은 일에 목을 매고 있습니다. 이들을 위해서 우리의 증인됨은 교회의 정치에 관한 일일 수 없습니다. 그것은 생명과 죽음에 관한 일이어야 합니다. 나는 여러분도 이 사실을 알고 있다고 믿습니다.

지금은 우리의 손을 서로에게 펼쳐야 할 때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에서 떨어져서 걸을 수 없습니다.

지금은 우리의 손을 사용할 때입니다. 우리는 선교 사명을 제껴두고 우리의 자존심을 내세울 수는 없습니다.

지금은 우리의 손을 들어야 할 때입니다. 우리는 하느님만이 홀로 영광을 받으신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선교 사명의 증인입니까? 여러분은 나와 함께 이러한 신앙의 공개적인 실천과 확신에 동참하시렵니까?

그 동안 나는 성공회에 있었던 많은 중요한 시점들을 알고 있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세상에서 어떤 증인이 될 것이냐늘 묻는 시점입니다. 지금은 우리가 전혀 뜻밖이고 멋진 일을 해내어, 우리 교회에 더이상 비전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오히려 궁색하게 만들 때입니다. 지금은 우리가, 우리가 말하는 대로 실천할 수 있으며, 우리가 말한대로 되고자 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세상에 보여주어야 할 시점입니다. 지금 이 시기는 우리가 어떤 일을 두고 누구를 이겼다고 생각하는 시점이 아니라, 우리가 서로를 사랑하는 한 결코 지거나 잃을 것이 없다는 것을 확신하는 시간이어야 합니다.

나는 한 사람의 증인입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나는 정의와 자비와 화해의 복음을 믿습니다. 나는 하느님의 공동체를 믿으며, 모든 이들과 함께 평화를 가져오고 이 세상을 치유하는 일에 성실하게 일하겠습니다. 나는 내 손을 열어 놓습니다. 나는 내 마음을 열어 놓습니다. 나는 내가 전혀 두려워 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세상이 깨닫기를 바랍니다. 나는 감사한 마음으로 하느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에 한발짝 내딛습니다. 나는 내 생각이 옳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믿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우뚝 서려 합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도 나와 함께 하시렵니까?

당신은 증인입니까?

One Response to “위기의 성공회? – 그리스도인의 증인됨과 선교”

  1. Geronimo Says: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찰스턴 주교의 글은 페이스북에 게시하여 나누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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