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회 전례의 현실 II – 기본에 관한 상념들

올 1월 초에 이메일로 한국 성공회 전례의 현실과 의미들에 대해서 나눈 생각들의 토막을 좀더 넓게 나누고자 이제야 여기에 옮겨 본다. 메일을 주신 분의 허락을 받았으나, 이름을 밝히지 않는다. 첫번째 내용은 전례 상의 관습과 행동에 대한 다양한 질문과 그에 대한 내 생각을 거의 가감없이 그대로 옮긴 것이고, 두번째 내용은 메일 주신 분의 고민과 더불어서 전례의 의미를 다루는 기본에 관한 잡다한 생각을 적어 본 것이다. 두번째 글을 먼저 읽고, 첫번째 글로 돌아와 읽는 것도 좋겠다. 이 허튼 생각을 계기로 많은 분들이 소중한 경험과 통찰을 진전시켜 나갈 수 있기를 바란다. 이 자리를 빌어 소중한 질문을 주시고 생각을 나눠주신 분께 다시 한번 깊은 감사를 드린다.

+ 주님의 평화

** 교우님이 다시 주신 글을 읽으면서 아픈 마음과 부끄러운 마음이 함께 들었습니다. 매우 좋은 전통의 교회에 찾아온 이들을 박대하는 방법도 여러가지로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고, 어떤 형태로든 도전을 받아들여 성찰을 깊이하지 않는 교회들의 현실에 저 또한 먹은 게 얹힌 것처럼 내내 답답하기만 합니다. 아.. 이거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까요? 주저 앉을 수만은 없는 일이니, 차근히 한번 생각해보고 실마리들을 찾아 새로운 실타래를 마련할 밖에요. 

무엇보다 먼저, ** 교우님이 몇몇 교회 안에서 겪으신 경험들에 대해서, 그 논란 혹은 책임 여부가 어디에 있건,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그저 마주 앉아 차분히 이야기를 나눌 수만 있었어도 그러질 않을 텐데요. 대화를 중요시하여 스스로를 성찰하는 것을 신학적 성찰의 기본으로 삼았던 성공회 정신과 한참 동떨어진 경험들이 만연한 현실에 대해서도 안타까움을 느낍니다.

아픈 사례들을 함께 나눠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사례들에 대해서 일일이 토를 달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고, 다만 몇가지 드는 생각을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그리고 ** 교우님이 어떤 식으로든 교회 안에서 – 그것이 어떤 전통 안에 있는 교회나 교단이건 – 전례를 통한 신앙의 형성에서 염두할 수 있었으면 하는 점들을 나누고 싶습니다. 이건 또한 제 자신을 향한 독백이기도 합니다.

1.
편의를 위해서는 큰 의미의 전례와 구체적인 전례 행동들을 구분해서 생각할 필요가 있고, 그런 다음 좀더 심층적으로 이 둘의 관계가 어떻게 빗나가고 있는지에 대해서 생각해야 한다고 봅니다. 지금으로서는 ** 교우님은 전례 행동의 여러가지에 대해서 지적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이런 많은 문제들은 “전례”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얕기 때문에 생긴 게 분명합니다. 특별히 어떤 관습적인 행동이나 매우 이상한 행태들이 아무런 도전을 받지 않고 지속되거나, 다른 생각을 짓누르는 것은 그 관습과 행동을 지키는 것말고는 그 의미나 이상을 추구할 수 만한 내적 근거가 없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보여줍니다. 한국성공회 안에서 전례에 대한 논란 혹은 어떤 낭패감들은 모두 여기에서 출발하는 것이지요.

2.
사실 이것은 전례적 전통을 가진 모든 교회들이 빠질 수 있는 위험입니다. ** 교우님이 좋은 사례로 드는 로마 가톨릭 교회의 경우도 예외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곳에는 불필요한 것에, 자잘한 행동들에 대한 의미 부여의 과잉이 문제인 경우도 많고, 그것이 폐쇄적인 교회적 권위와 연결되면 사태가 매우 심각해집니다. 이런 처지에 한국성공회의 문제는 전례학적인 성찰이 교회의 현실 안에서 단절된지 오래되다 보니, 관습적 혹은 경험적 유산으로만 남아 있는 특정 전례 행동이 성찰의 권위가 사라진 빈 틈을 타서 군림하는 양상에서 나온 것이라 생각합니다.

3.
성찰없는 권위는 “오래된 신자” “대대로 신자” 혹은 “수박겉핥기로 맛보고 주섬주섬 이어서 만들어낸 근거 불명의 설명과 이에 곁들여진 약간의 억압적 권위”로 대치되는 것은 시간 문제이지요. 이러나보니 제대로 된 지식과 성찰이 다시 그 권위를 회복할 수 있는 틈이 없어져버리고 맙니다. 이른바 적반하장인 경우가 생깁니다. 저도 이게 걱정입니다. 공부하는 제 말에 얼마나 귀기울여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자꾸만 업습합니다. 사실 저는 제 말을 할 생각은 없고, 전례에 대한 기본적인 성찰과 대화를 부추기면서, 이를 위한 근거들을 채워주는 일이겠지요. 그것이 전례학자들의 일입니다. 

4.
다만 여기서 책임소재를 물어 굳이 비판하고자 한다면, 제 자신이 이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겠습니다. 평신도를 탓하기보다는 그 교육과 사목 지도의 책임을 가진 성직자들이 또한 책임을 통감해야 합니다. 문제는 여러 성직자들이 전례를 지도할 수 없는 권위와 근거가 부족하거니와, 한편으로는 이를 “사목적인 배려”라는 이름으로 변명하는데 익숙하다는 것이지요. 

5.
그렇다면 어떻게 이것을 풀어볼까? 아마도 대화의 창구들을 만드는 것이겠고요, 문제를 나누고, 근거를 찾아보고, 대안을 마련해 보는 통로를 만드는 것이겠지요. ** 교우님이 예로 들어주신 천주교의 “전례학 동호회”도 좋은 예입니다. 저 또한 이런 형태를 마련해보고자 노력해왔고, 그 때문에 홈페이지 질문 답변란 같은 것을 운영하기도 했지요 – 하지만 전례에 대한 질문은 별로 없더군요. 그래서 새로운 방법을 만들어보려고 합니다. 성공회 위키 지식 백과 등과 같이 그것이겠고, 인터넷을 통한 “성공회 전례 포럼”이 그 예이겠습니다. 곧 띄워볼 생각입니다.

6.
이제 ** 교우님의 제기하신 문제를 가지고 이야기하자면 이렇습니다. 실제로 성공회 쪽에 자료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있는 자료도 다시 뒤져서 확인해보지 않거나, 서로 물어보지 않는 것일 뿐이지요. 이것은 전례에 대한 기본적인 관심이 없다는 현실의 반영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동기가 없으면, 황금이 옆에 있은 들 뭐로 하나 가공해낼 수 없으니까요. 예를 들어 “성공회 예전 안내서”도 성찬례에 대한 매우 중요하고 핵심적인 내용들을 담고 있거니와, 이를 통해서 이야기를 펼쳐나가면, 굳이 외국의 경험이 아니라 우리의 처지에 맞는 좀더 창조적인 전례와 그 구체적인 행동들을 만들어 낼 수 있겠지요. 자료의 양이 문제가 아니라, 시작하는 시점에서는 관심이 더 중요한 거지요. 저도 멀리서나마 아직 공부하는 중에 있지만, 저 자체를 하나의 자료로 볼 수 있거든요. 그런데 물어오는 사람이 드뭅니다. 많은 자료들을 개개인이 흩어져 스스로 일일이 설렵하기보다는 이를 업으로 하는 이들을 이용하는 것이 참 빠르고 편할텐데요. 게다가 이러면 저같이 책상물림하는 사람들에게도 더욱 현실감각을 갖도록 도와주는 일이 될텐데 하는 생각이 듭니다. 소통하지 않으면 고립되어 왜소해지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현실이…

7.
이런 가운데, ** 교우님이 지적하신대로 천주교 쪽의 자료는 매우 중요하기도 합니다. 저라도 당장 신학교에서 전례를 가르치는 입장에 서게 된다면, 현대의 중요한 전례 문서로 바티칸 2차 공의회의 “전례 헌장”을 숙독시킬 것입니다. 그러나 천주교 역시 “전례 헌장”의 정신이 전례 행동에 진정한 의미로 작용하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경험적 회의를 갖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전례 헌장”의 핵심은 전례가 하느님의 백성이 하느님을 예배하는데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하며, 이러한 적극적인 전례 참여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몸인 공동체를 이루는 것이라고 할텐데, 많은 경우 천주교에서 전례는 성직자의 권위주의와 더불어 교인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방해하는 일들이 나타난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전례 헌장” 자체의 신학적 문제와 한계도 명백히 지적되어야겠지요.) 매우 세심하게 규정된 전례 행동들은, 달리보면, 매우 세밀한 전례적 통제 장치일 수도 있는 것이지요. 이런 상관 관계들을 비판적으로 성찰하며 적용할 때라야, 이른바 “헌장”의 정신이 살아남을 것입니다. 그리고 전례의 “의미”와 전례의 구체적 “행동들” 사이에 진정한 일관성이 마련되겠지요.

8.
성공회는 영국적인 성향이어서 느슨하거나 단호적 교리적 체계를 갖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바로 성공회 전통에서 형성된 하나의 기질(에토스)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이것은 또한 성공회의 신학하기(doing theology) 방법이기도 합니다. 성공회에는 이른바 전일적인 교도적 지침 (magisterium)이 없으며, 이를 반대해왔습니다. 이러한 전일적인 교도적 지침의 태도들은 개신교 내에서 그 창시자나 주도적인 신학자의 이름을 딴 어떤 “**주의”(-ism)로 잔존하고, 로마 가톨릭에는 그 이름 그대로 맹위를 떨치는 교리 체계로 남아 있습니다. 

9.
이 때문에 전례에 관해서 성공회는 매우 다양한 태도들과 더불어, 그 단계 혹은 정도가 천양지차로 서로 다른 전례를 발전시켜 왔습니다. 이는 분명 강점과 단점을 동시에 지니고 있습니다. 문제는 이러한 성공회의 태도와 전통들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방법입니다. 저는 그것을 “대화”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여전히 문제는 이런 대화가 지속되지 못하다는 것이고, 이것이 역시 성공회를 개신교 편향, 혹은 천주교 편향으로 이끌고 있다고 봅니다. 한가지를 지적하자면, ** 교우님의 지적 속에서 성사와 관련하여 “람베스 회의가 종교개혁자들을 추종한 것”이라는 지적은 정확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람베스-시카고 4개 조항에 관련해서 말씀하시는 것으로 보이는데, 이것은 서로 다른 전통을 가진 성공회의 여러 교회들, 그리고 더 넓게는 개신교와 로마 가톨릭, 그리고 정교회와 같은 다른 교단 전통에 이르기까지 서로 이해하고 대화를 할 수 있는 하나의 근거를 마련하고자 나온 것이며, 여기서 가장 기본적인 두가지 성사를 언급하고 있는 것이지요. 이야기 하나를 덧붙이자면… 어느 천주교 신자가 저명한 정교회 전례학자들에게 물었답니다. “정교회에도 칠성사가 있고 이를 행하나요?” “그럼요, 있지요.” … “허나, 칠성사뿐이겠습니까? 세상은 성사로 가득차 있어서 헤아릴 수 없답니다.” 성사를 숫자로 따지는 것은 서방교회의 못된 관습 가운데 하나지요. 개신교나 천주교도 여기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10.
천주교의 신학과 체제에 대해서 바람직한 인상을 두고 말씀하신 것에 대해서는 저로서도 할 말이 많습니다. 다만 그 내용이 적시되지 않았기에 넘겨 짚는 위험을 피하려 합니다. 제 자신이 신앙 형성의 중요한 시기에 천주교에서 신앙 교육을 받았고, 이후에도 천주교 쪽의 신학의 영향과 대화하고, 또한 교회의 현실도 아는 처지에서 바라보자면, 천주교의 신학 – 아무래도 교리가 되겠지요 – 과 체제에 대해서는 일반적으로 쉽게 말해서 판단할 사항은 아니라고 봅니다.

11.
“양형 영성체”에 대한 이야기는 매우 흥미롭습니다. 실은 이미 천주교회는 모두 떡과 잔을 모든 신자들이 나눌 수 있도록 했습니다. 유독 안되고 있는 곳이 한국 천주교가 아닌가 생각합니다(예외가 있긴 하지만). 오죽하면 저랑 같이 공부하는 여러 천주교 신부님들이 한국천주교는 바티칸보다 더 보수적이라고 개탄을 할까요. 

12.
한국성공회가 이른바 “복음주의”를 운운하며, 이상한 개신교 흉내를 내고 있는 일은 개탄할 일입니다. 아무도 이는 앞서 말할대로 자신의 근거없음에 대한 어떤 열등의식의 발로이겠고, 달리 보면 작은 교단으로서 살아가다보니 생겨나는 생존의 몸부림이기도 합니다. 동정해할 지점과 비판해야 할 지점이 겹쳐있기에, 서로 상처나지 않도록 보듬고 품어서 길을 찾도록 서로 얼굴과 마음을 맞대야 하는 것이겠지요. 문제는 그러질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매우 비관적이고 암울한 처지인 것을 저도 알고 있습니다.

13.
“사족”이라고 하신 것에 대한 제 나름의 “사족”도 유효하리라 생각합니다.

# “독서대”의 중요성을 성공회가 폄하한 적은 없습니다. 오히려 문제라면, 설교대와 독서대를 나눠서 사용했던 문제들이 지적될 수 있어야 하리라 봅니다. 독서대와 설교대는 하나로 통일하면 그만입니다. 아니면 설교자가 회중 가운데서 말씀을 전하면 되지요. 복음서를 “회중 안에서” 읽는 전통은 앞서 말씀드린대로 정교회의 독서대인 “베마” (이것이 회중 한가운데 자리한 갓집 형태를 갖고 있습니다)를 좀더 역동적인 형태도 성공회 안에 적용시킨 것이라 보면 될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러하셨듯이, 자리를 박차고 나와 회중을 둘러 세워놓고 선포하신 말씀을 상징하기에 적절합니다. 저는 이곳에서 천주교 미사와 성공회 미사를 비교하면서 이런 복음서 독서 전통이 참 그립웠습니다. 물론 공간적인 맥락을 고려해야 하고, 적절하지 않은 곳에서 이를 억지로 행하는 것은 더 우습지요. 비좁은 곳에서는 독서대를 사용하면 그만입니다.

# “파워포인트”를 이용한 예배 중 프리젠테이션에 대해서는 저도 ** 교우님과 크게 다른 생각이 없습니다. 다만 그것이 도움이 될 수 있는 상황에서는 전례의 공간적 맥락을 고려하여 사용할 수 있다고 봅니다. 일례로, 종종 찾아가서 미사를 드리는 인근의 큰 천주교 성당이 있습니다. 일반 교회이면서 동시에 대학 청년들을 대상으로 한 “전례를 통한 선교”에 열심인 이 성당은 전례 중에 “파워포인트”를 이용합니다만, 그리 어색하지 않고 좋았습니다. 문제는 사용 여부, 도입 여부가 아니라, 어떤 맥락에서 어떻게 사용하느냐 하는 것이지요.

# “전례가 곧 신학”이라고 하는 것을 성공회만큼 중요하게 여긴 교회 전통이 없다고 자부합니다. 그러나 이런 자부심이 교회의 현실이 아닌 경우가 많을 뿐이지요. 지적하신 말씀에 절대로 동의합니다. 전례를 하나의 치장으로 보는 태도가 만연해 있거나, 일반적인 개신교처럼 “머리로만 드리는 예배”와는 달리 “몸과 삶으로 드리는 예배”로서 전례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느 교회나 마찬가지라고 봅니다. 

마지막으로… 이런 대화가 오가는 중에도 ** 교우님은 여러가지 실망스러운 일들만 계속해서 겪는 것으로 보입니다. 앞서 말씀드린대로 매우 유감스럽고 애석하게 생각합니다. 저도 답답합니다. 하지만 세상에는 완전한 교회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내가 몸담아 사랑하며, 자신도 변하면서, 그곳을 그리스도의 몸으로 변화시켜나가는 그런 교회만이 존재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그 교회가 성공회라고 생각했고, 지금도 여러가지 어처구니 없는 행태와 처지에서도 이런 생각에 변함이 없습니다. 오히려 어느 대주교님이 말씀하신대로, 성공회는 교회의 일치와, 하느님의 선교를 위해서라면 스스로가 사라지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교회라는 점에서 그 겸손함과 열림에 제 신앙의 자리를 둥지틀고 있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렇게 좋은 전통이 있으면서도 허점이 많은 곳이기에, 새로운 변화의 가능성도 어느 교회보다도 많다고 생각합니다. ** 교우님께도 감히 그런 제 경험과 고민 속에서 자신을 위해, 그리고 성공회를 위해, 나아가 그리스도의 몸을 위해 우리 교회 전통 안에서 남아 애써 달라고 부탁합니다.

참 깊고 좋은 대화의 기회를 마련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주낙현 신부 합장

(2007년 1월 3일)

4 Responses to “성공회 전례의 현실 II – 기본에 관한 상념들”

  1. 정요한 Says:

    나름대로 ‘보다 낮은 전례’에 대해 고민하던 중에 좋은 토론 감사히 잘 읽고 갑니다. 주신부님 말씀처럼 이 세상에 완전한 교회는 없겠지만, 우리에겐 완전한 주님이 계시니 소망이 있습니다. 그것은 어느 교단을 막론하고 마찬가지일거라 여겨지고, 또한 우리 성공회가 오랜세월 하나되기 위해 열린 마음으로 힘써온 이유라 여겨집니다. 요즘들어 여러가지 번잡한 소식들이 들리기는 하지만, 온전한 그리스도를 바라보면, 두려움 없이 나아갈 수 있으리라 여겨집니다. 항상 좋은 글들과 토론들을 읽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Reply]

  2. 신선규 이냐시오 Says:

    늦은 밤이라 눈이 침침하여 신부님께서 쓰신 좋은 글의 많은 부분을 제 눈과 뇌가 담아내지 못하는 것이 아쉽네요…. 아 제 소개를 하자면….저는 천주교 신자입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제 눈과 뇌가 졸음에 겨워 많은 것을 제 안에 담아내지 못합니다만…. 아무래도 천주교와 성공회의 차이 때문에서인지 천주교인의 시각으로 바라보자면 상당한 괴리감이랄까….이질감이랄까… 그런 부분이 몇 군데에서 느껴지네요….

    몇 가지는 제가 알고 있는 실제와 다른 부분(종파에 따른 신학이나 가치관의 차이가 아니라 객관적인 사실에 대한….)이 있어서 그 부분만 간단하게 말씀드릴까 합니다…

    양형영성체를 한국 천주교에서 하지 않는다는 말씀…. 실제와는 좀 다릅니다. 양형영성체를 한국에서도 하고 있으니까요. 다만 대부분의 경우 영성체를 하는 회중이 많은 데다가, 일일히 성혈까지 모시게 한다면 자칫 성혈이 한 방울이라도 흐를 염려 때문에 성혈까지 모시는 일은 가급적이면 하지 않을 뿐입니다. 어차피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성체 찬미가처럼 두 가지 형상 모두에 그리스도께서 물리적으로 현존하신다는 것은 사실이니 성체만을 모셔도 그 분의 몸을 모시게 되어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룬다는 것은 변함이 없으니까요.

    둘 다 모셔야 그리스도를 모신다는 입장은 과거에 체코의 얀 후스가 견지했던 입장이지만 이 입장은 이단으로 파문당했습니다. 이것이 루터에게 영향을 주었다던데, 아무래도 빵과 포도주 각각에 그리스도께서 살아계신다는 입장이 전제가 된다면 불가능한 주장인지라….. 결국 성체와 성혈이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아니라 이를 모시는 이에게 성사적으로 성령께서 임재하시어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게 된다는 임재론적 입장이 된 듯 합니다.

    우리나라 가톨릭 교회에서는,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경우나, 비교적 인원이 적은 특정 공동체를 대상으로 하는 미사일 경우, 혹은 수도회의 사제가 집전하는 전례일 경우에는 양형영성체를 합니다.

    일례로 저도 경기도 어농에 있는 순교성지에서 양형영성체를 했고, 예수회의 수사 신부님들이 집전하시는 미사 때에는 반드시 양형영성체를 할 수 있었습니다. 예전에 정동에 있는 성 프란치스코회의 미사 때에도 거기 신부님이 축성하신 성체와 성혈 모두를 모셨지요….

    [Reply]

  3. fr. joo Says:

    신선규 이냐시오님 / 반갑습니다. 서로 다른 전통 안에서 같은 주제를 두고 함께 고민할 수 있다는 것은 매우 큰 축복입니다. 또한 구체적인 사안에 대한 현실을 적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만 제 글에 대한 오해가 없으시기를 바랍니다. 저는 천주교에서의 양형 영성체에 대해서 이렇게 썼습니다.

    11.
    “양형 영성체”에 대한 이야기는 매우 흥미롭습니다. 실은 이미 천주교회는 모두 떡과 잔을 모든 신자들이 나눌 수 있도록 했습니다. 유독 안되고 있는 곳이 한국 천주교가 아닌가 생각합니다(예외가 있긴 하지만). 오죽하면 저랑 같이 공부하는 여러 천주교 신부님들이 한국천주교는 바티칸보다 더 보수적이라고 개탄을 할까요.

    실제로 이냐시오님의 이야기는 제 이야기를 방증하는 사례로 들립니다. 이 글의 이해를 돕자면, 어떤 분이 천주교로 이적을 할까 고민하는데 그 걸림돌이 양형 영성체를 하지 않는 것이라고 밝힌 것에 대한 제 생각이었습니다. 그분이 천주교의 일반적인 교회에서 경험하고 느낀 것이었습니다. 현실 자체는 어떤 이유로든 이냐시오님이 말씀하신 것과도 동일합니다.

    “성혈을 흘릴 염려때문”에 양형영성체를 피한다는 이야기는 천주교 내에서도 그리 썩 좋은 사유가 되지 못한다고 천주교 안에서 지적되고 있습니다. 물론 한국천주교의 태도는 모르겠습니다. 저는 한국에서 예외가 있다는 것도 언급했고, 대체적으로 그리 하지 않는다는 것을 지적했으며, 이것은 제가 가까이 알고 있는 한국 천주교 신부님들도 동의하는 바입니다.

    “둘 다 모셔야 그리스도를 모신다는 입장”을 제가 주장하지 않았고 그렇게 말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또한 정말로 얀 후스가 그렇게 말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이하의 설명은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게다가 성혈을 영할 때 흘릴 위험이 있어서 피하고 있다는 말씀하신 뒤,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경우나,” 언급하신 다른 상황에서는 양형 영성체를 한다는 말씀은 서로 모순되어 보입니다. 거기에도 분명히 성혈을 흘릴 위험이 있으니까요. 한걸음 나가 이런 다른 적용들은 미사(성찬례)에도 격이 있는건가 하는 오해를 낳을 수 있습니다.

    성체(축성된 떡)을 영하는 것으로만도 족하다는 것이 정말로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이 하신 말씀이신지 모르겠으나, 그 논리를 따른다면 굳이 성찬기도에서 포도주를 축성할 이유도 없어지고 맙니다.

    천주교의 입장을 “화체”(혹은 “성변화”)라고 말하고, 그에 반하여 다른 교회의 입장을 임재설(?)이라고 부르는 말들도 정확한 표현도 용법도 아닙니다. 비록 다른 개신교에서 그렇게 말할지라도 말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언젠가 “질문 답변” 게시판에 글을 쓴 적이 있으며, 또한 성공회와 천주교의 성찬례 이해에 관한 문서인 “ARCIC I” 문서를 읽어보시길 권해드립니다. (문서자료실)

    전통이 다르기에 이질감이 존재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저는 우리가 나누고 있는 공통점이 더 많다고 보고 거기서 시작하고 싶습니다. 이 가운데 서로를 비춰서 스스로를 성찰할 수 있는 기회를 갖고 싶을 따름입니다. 그런 예를 들어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Reply]

  4. via media 주낙현 신부의 성공회 이야기 » Blog Archive » 성사와 성사성 - 제임스 화이트, 성공회 전통 Says:

    […] 근대 전례 운동(the liturgical movement)이 태동하여 영향을 주기 시작한지 100년이 넘지만, 그 깨달음과 울림은 식민지 선교의 유산에 파묻혀 있는 한국 그리스도교계에는 멀기만 하다. 아니 최소한 주어진 전통에서나마 겨우 그 “감각”을 몸으로 익혀 온 것들 마저 멀어지고 희미해지는 양상이다. 화이트가 지적한 세가지 장애물을 빗대어 우리 교회(최소한 한국성공회의 전례 현실)를 성찰해 볼 일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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