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교 사회주의, 그리고 기억

영국 천주교 신학자 니콜라스 래쉬(Nicholas Lash, 1934- )는 최근 한 인터뷰에서 그리스도교와 마르크시즘의 관계에 대한 질문에 이렇게 쏘아 붙였다.

Q. 당신은 마르크시즘에 대해서 동정적으로 글을 써왔는데요, 공산주의의 붕괴 이후, 마르크시즘은 여전히 그리스도인들이 관계할 필요가 있는 철학인가요? 왜 영국이나 미국에서는 살아남을 만한 그리스도교 사회주의를 상상하기 어려운 것일까요?

N. Lash: 그리스도인들이 여전히 마르크스에 관계할 필요가 있다는데 의구심을 갖는 사람들은, 우리가 여전히 아리스토텔레스나, 칸트, 헤겔과 관계할 필요가 있느냐며 의심하는 사람만큼이나 바보스러운 겁니다. 자본주의 생산 양식에 대한 마르크스의 분석의 핵심에는, 이 생산 양식의 기계적인 필연성이라 할 수 있는 “상품 형태의 보편화,” 그러니까 모든 사물들뿐만 아니라, 모든 관계들마저 상품성으로 변이된다는 통찰력이 있었죠. 런던 세인트 폴 성당에 있는 크리스토퍼 렌 경(Sir Christopher Wren) 기념비의 말마따나, 마르크스 박사의 기념물을 찾는다면, 주위를 둘러보시오 (Si monumentum requiris, circumspice).

친한 마음에서 나오는 격분으로 좀 극단적으로 말해볼까요? 미국처럼 메시아적인 자본주의에 이끌리고 매몰되어 있는 문화에서 여러 형태의 사회주의가 동정심을 얻기 힘들다는 걸 이해할 수는 있어요. 하지만 우리를 당신 편으로 끌어들이지는 마세요. 20세기 영국의 사회주의는 그리스도교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고, 역사가라면 누구나 말해 줄 수 있을테니까요. 지난 몇 십년 동안 끔찍하도록 지배적이었던 자본주의가 노동당을 해체하고 있죠. 그러나 원래의 사회주의적 전망을 완전히 상실할 정도는 아니에요. 그리스도교 사회주의를 이해하기 어렵다는 건 말이 안돼요. 우리는 그걸 기억하고 있거든요.

The Christian Century, Dec. 11, 2007: 32

역사적 실험과 경험을 “기억하고 있는” 한, 힘들다고 포기할 일만은 아니라는 뜻으로 듣겠다. 그런데 영국의 경험에 대한 기억으로만 – 영국적인 자존심을 내세우고 미국을 약간 경멸하는 투로 – 이 미국인 인터뷰어를 나무랄 일이 아니었다. 사실 미국의 그리스도교계에도 이에 대한 “역사적 기억들”이 상존하기 때문이다. 영국에서 이른바 그리스도교 사회주의라는 말이 나왔고, 교회와 사회 안에서 여러 실험과 경험이 있던 것처럼, 미국에서도 개신교 진영에서 “사회 복음”(Social Gospel, 라우센부쉬)이나, 로마 가톨릭에서 “가톨릭 노동자” 운동(Catholic Workers, 도로시 데이)으로, 그리고 성공회에서는 성사적 사회주의 전통(Sacramental Socialism, F.H.스마이스)으로 펼쳐지고 그 유산들이 여러 방식으로 살아남아 분투하곤 했다.

다만 20세기 초 중반에 이르기까지 활발했던 이 흐름이 그 이후에 왜 영국과 미국에서 동시에 쇠퇴했는가 하는 점을 면밀히 알아볼 필요가 있겠다. 영국 노동당에 남아있다는 “사회주의적 전망” – 실제로는 유럽의 전 사회적 복지 정책과 관련한 소극적인 현실을 과장한 것이겠지만 – 은 조금은 애처롭게 들린다. 그만큼 “세계화” 프로젝트를 이끌고 있는 자본과 “제국”의 힘에 압도당하고 있다는 반증일까?

여전히 “기억”을 되살려, 새롭게 체현하는 일이 필요하다. 그런데 역사는 “기억”과 “망각”의 싸움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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