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는 것들과 감추인 것들 2

1.
나는 “성공회” 사제다. “신부” 혹은 “사제”라는 호칭 앞에 굳이 “성공회”라는 수식어를 붙이지 않으면 사기치는 사람으로 오해받기 십상이다. 천주교 신부를 사칭했다는 죄목을 가장 먼저 쓸 공산이 크다. 정교회(Orthodox Church) 신부 혹은 사제도 굳이 그렇게 해야 한다. 적어도 한국에서는, 수식어가 붙지 않은 “신부”나 “사제”는 천주교만의 전유물로 당연시된다.

긴 말 필요없이, 천주교가 수적으로 절대 다수이기 때문이다. 언제부턴가 우리는 숫자에 껌벅 죽게 된지라, 정당한 이유나 근거에 기반한 설명이 먹히질 않는다. 소수에 대해서는 ‘저리 찌그러져 있어!’라는 호통이 우세하거나, 그들이 한소리라도 낼라치면 ‘가난한 놈들은 질시와 불평만 많다!’라는 찬소리를 되받기 일쑤다. 우세한 목소리와 숫자들이 부각되어, 그저 작은 것들은 가려지고 감춰지고 만다.

왜 이런 허튼 소리로 시작했나? 한국 천주교에 대해서 한마디 언급하려는데, 혹시 사칭한다고 할까봐 미리 켕켜서다. 제 것 아닌 다른 교단 전통에 대해서 말하는 일이 적지 않게 부담스럽다. 천주교라는 거대 무리에 대해서는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내 자신이 천주교 전통에 기대어 그리스도교 신앙의 깊이를 다시 발견하게 되었고, 내 성소 식별의 과정 안에서 인간의 연으로나 공부의 맥락에서 빚진게 크거니와, 지금도 여러 천주교 사제 친구들과 교류하고 있으니 한마디 보탤 수는 있다는 생각이다. (아, 콩만한 간덩어리여! – 도입이 길다는 건 벌써 쫄았다는 거다!)

2.
일전에 김수환 추기경을 추모하면서 그분의 30여년 전 말씀을 인용한 바 있으나, 현재 한국 천주교는 스스로를 “담장 안에서” 성명서나 발표하는 무리가 되어가는 듯하다. 사실 그 성명서라는 것들이 내내 그럴싸하게 들린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과 관련된 촛불 정국 때나 용산 참사 사건에서도 보여준 성명서에 나타난 “말”들은 좋다 못해 자못 훌륭하다.

그런데 이를 내놓는 “주교회의”(산하 정의 평화 위원회) 내 주교들의 행동들은 이 “말”과는 판이하다. 작년 8월에 있은 서울대교구의 인사에서 정의구현사제단 소속 사제들이 어떤 일을 겪었는지를 보면 분명하다. 흥미롭게도, 주교회의의 성명서는 일이 다 끝나갈 무렵, 모두들 알고 있는 사실과 주장들을 하나 마나 한 소리로 요약한다. 문제는 이게 마치 어떤 행동의 신호처럼 해당 사건에 관련된 이들에 대한 조치가 따라 나온다는 것이다. 용산 참사에 대한 성명서도 그런 인상이 짙다. 이게 다시 시국 미사를 주도하는 정의구현사제단이라는 작은 무리를 향한 또다른 조처에 대한 신호일까? 시국 미사, 참사를 당한 이들을 위한 위령 미사를 드리는 이들의 주축이 이번에는 수도회 소속 사제들이나 수도자들이어서 그 조처가 미치지 못할까?

김수환 추기경에 대한 추모 열기로 천주교는 다시 전국민의 관심사가 되고 있다고 한다. 이 참에 신자들도 더 늘어나지 않을까 점치는 수준이라 한다. 그런 호기를 잡지 못한 다른 교단이나 종교들은 아쉬워 하는 바가 없지 않다고들 한다. 이 참에, 이렇게 보이는 것들과 감추인 것들 사이의 간극을 다시한번 돌아다 본다. 조명을 받은 물체는 곧장 어둔 그림자를 남긴다. 그 덩치가 클 수록 드리운 그림자 더욱 크고 깊다.

3.
이쯤 적어놓고 생각을 삭이고 있는 참에, 오마이뉴스의 기사가 보인다 (적으려던 여러 생각을 접게 해주었으니 감사할 일이다). 김수환 추기경 추모와 더불어 생각한 한국 천주교의 보수화에 대한 걱정어린 분석 글이다. 대체로 공감한다. 개인적인 관찰뿐만 아니라 천주교 쪽 지인들에게서 들었던 걱정들과 대체로 일치하는 내용이다. 등록 교인 수는 많아지는데 실제로 주일 미사 참석수는 줄고 있다는 관찰도 보인다. 주위에서 듣기로 젊은 세대의 냉담률이 높아지고 있다는 것을 보탤 수도 있겠다.

그러나 문제의 핵심은 종교의 “심리적 중산층화”가 아닐까 한다. 말인 즉, “중산층”의 욕망, 그리고 “중산층이 되고자 하는 욕망”은 종교 선택에서도 확연하다. 개신교인들이 줄고 있다고는 하나, 이른바 강남 대형 교회들이나 그 밖의 “중산층”을 선교 대상으로 한 대형 교회들은 여전히 성장하고 있다. 천주교의 성장도 이와 같은 선상에 있다. 천주교는 그동안 비판적이면서 지적인 ‘이미지’를 키워왔다. 이 ‘이미지’는 개신교의 그것과 차별화되기도 해서 더 유효했다. 그렇지만 이것들이 짐짓 뻐기는 “중산층 욕망”에 기반한 것이라는 점에서, 성장하는 개신교 대형 교회와 천주교의 성장도 같은 맥락에 있다. 그러는 동안 이 ‘이미지’ 뒤에 가려진 힘없는 목소리는 더욱 힘을 잃어간다.

4 Responses to “보이는 것들과 감추인 것들 2”

  1. 민노씨 Says:

    종교가 세상 살이의 각박함을 치유하고, 위무하는 것은 옳고, 또 그것이 종교의 가장 ‘세속적인 기능'(긍정적인 어감에서요)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말씀처럼 ‘계급적 박탈감’을 보상받기 위한, 혹은 좀더 높은 계급적 표지를 획득하기 위한 ‘욕망의 악세사리’가 되어서는 곤란하지 않나 싶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말미에 지적하신 것처럼 “이 ‘이미지’ 뒤에 가려진 힘없는 목소리는 더욱 힘을 잃어”가게 되는 것은 아닐는지… 저와 같은 범인도 참으로 걱정되는 풍경이 아닐 수 없네요…

    [Reply]

  2. 지적이게 보이고 싶은 마음 « My Blog Says:

    […] 이른바 강남 대형 교회들이나 그 밖의 “중산층”을 선교 대상으로 한 대형 교회들은 여전히 성장하고 있다. 천주교의 성장도 이와 같은 선상에 있다. 천주교는 그동안 비판적이면서 지적인 ‘이미지’를 키워왔다. 이 ‘이미지’는 개신교의 그것과 차별화되기도 해서 더 유효했다. 그렇지만 이것들이 짐짓 뻐기는 “중산층 욕망”에 기반한 것이라는 점에서, 성장하는 개신교 대형 교회와 천주교의 성장도 같은 맥락에 있다. _ http://viamedia.or.kr/2009/02/23/462 […]

  3. DEOKKYU.NET» Blog Archive » 지적이게 보이고 싶은 마음 Says:

    […] 이른바 강남 대형 교회들이나 그 밖의 “중산층”을 선교 대상으로 한 대형 교회들은 여전히 성장하고 있다. 천주교의 성장도 이와 같은 선상에 있다. 천주교는 그동안 비판적이면서 지적인 ‘이미지’를 키워왔다. 이 ‘이미지’는 개신교의 그것과 차별화되기도 해서 더 유효했다. 그렇지만 이것들이 짐짓 뻐기는 “중산층 욕망”에 기반한 것이라는 점에서, 성장하는 개신교 대형 교회와 천주교의 성장도 같은 맥락에 있다. _ http://viamedia.or.kr/2009/02/23/462 […]

  4. 지적이게 보이고 싶은 마음 | 記 Says:

    […] 이른바 강남 대형 교회들이나 그 밖의 “중산층”을 선교 대상으로 한 대형 교회들은 여전히 성장하고 있다. 천주교의 성장도 이와 같은 선상에 있다. 천주교는 그동안 비판적이면서 지적인 ‘이미지’를 키워왔다. 이 ‘이미지’는 개신교의 그것과 차별화되기도 해서 더 유효했다. 그렇지만 이것들이 짐짓 뻐기는 “중산층 욕망”에 기반한 것이라는 점에서, 성장하는 개신교 대형 교회와 천주교의 성장도 같은 맥락에 있다. _ http://viamedia.or.kr/2009/02/23/46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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