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교와 교회 – 스트링펠로우에 기대어
우리 교회 안에서 지속되는 논란 거리 가운데 하나는 신학교와 교회의 관계이다. 서로에게 불평들이 많다. 요즘 일반화된 평가 기준으로 볼 때, 교수진이나 학교 시설이 형편없던 옛날이나, 그 수준과 질의 변화가 뚜렷하다는 지금이나, 이 불평과 투정에서 만큼은 큰 차이가 없다. 오히려 옛날이 좋았노라고 회고하는 이들도 있어서, 나름 출중한 실력을 갖추고 훨씬 애쓰는 현직 신학 교수진들을 분노케 한다는 소식도 듣는다.
그런데도 신학교와 교회는 멀어지고, 그 결과, 교회는 교회 안에, 신학교는 대학 안에 자리를 틀고 앉아서, 서로에게 손가락질한다. 한쪽은 ‘신학’이라면 진저리를 치는 반지성주의 교회로, 다른 한쪽은 어디 하나 써먹을 데 없는 언어 유희나 즐기는 학문주의 집단으로 자리잡아가고 있다고들 맞고소한다. 그 어느 편이든 그 진단이 틀린 것 만은 아니다. 다만 그 와중에 어느 쪽에서도 자신을 스스로 비판적으로 돌아보는 소리는 듣기 어렵다.
나 같은 먹물들은 그럴듯한 용어과 개념으로 입바른 소리는 잘 하는데, 그 개념과 논리를 스스로에게 적용시키는데는 쑥맥이다. 쑥맥인 탓이 아니라면 학문 장사를 위한 위선이겠다. 사목자들은 거친 생존 현장의 살벌함을 호위삼아, 방향이 뒤틀린 부지런함으로 사유와 성찰의 게으름을 덮으려고 신학 무용론 같은 반지성주의를 부추긴다. 그러면서 신학 입문 1강이면 늘 등장하는, 닳고 닳은 “삶의 자리”(Sitz im Leben)를 들먹이며 서로 비판하곤 한다. 그러나 정작 신학교는 자신의 삶의 자리를 외면하고, 교회는 자기 성찰의 자리를 거절한다. 신학교의 삶의 자리는 큰 의미의 “교회”인데도 스스로를 대학이 짐짓 이상하는 학문 세계에 가두고, 교회는 자기 실천과 행동이 끊임없는 기준과 도전이 될 “신학”에 자리잡기를 멸시한다.
이를 넘어설 대안적 신학 교육은 무엇인가? 아니 그보다 먼저, 뭐가 뒤틀려 있을까?
뉴욕 할렘의 인권 변호사, 사회개혁가, 칼럼리스트, 그리고 성공회 (평신도) 신학자였던 스트링펠로우(William Stringfellow)는 30여 년 전에 이 점을 뼈아프게 지적한 바 있다. 그의 글 단편에서 읽는 것은 신학교의 자리와, 신학교의 임무이다. 그 시절과 지금은 분명 여러모로 다를 것이다. 그러나 반성이 학문의 기초이니, 나 같은 사이비 먹물이나, 신학교 관계자는 먼저 그의 신학교 비평을 쓰게 들었으면 좋겠다. 나로서는 평소 고민하던 바를 명징한 언어로 후려 맞으니 속이 다 후련하다.
신학교는 대체로 학문적으로 인정받기를 갈망하며, 스스로 대학의 기풍과 위계 안에 자리잡으려 했다. 그러나 신학교는 대학의 기풍과 위계와 같은 것들이 얼마나 신학교의 특별한 소명과 동떨어진 것이며 그 소명을 혐오하는지를 깨닫지 못하고 있다. 그리하여 신학교는 신앙을 이데올리기적으로 번안한 내용들을 유포하는데 스스로를 굴복시키고 말았다. 이것은 사상을 끊임없이 분류하고 비교하는 일에만 몰두하게 하여, 성서적인 증언에 담긴 역동성을 손상시킨다. 이 모든 것들은 투신을 머뭇거리게 하고, 신학에 대한 신심어린 공부를 회피하게 만든다.
오해하지 마시라. 나는 지금, 사제 서품이나 목사 안수에 필수적인 조건은 이 직무에 부름받은 사람이 신심 깊은 그리스도인이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는 종교 연구가나 신학적 논쟁가나, 혹은 학자연하는 사람들과는 구별된다는 뜻이다. 이 조건을 마련해주는 것이 신학교의 임무이며, 임무여야 한다. 그러므로 신학교가 자리할 곳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안이지, 대학 울타리 안이 아니다. 성직자를 준비시키고 그 능력을 키워주는 일을 위해 신학교가 취해야 할 태도는 교회의 모본을 보여줘야 하는 일이지, 대학을 흉내내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 대학의 이데올로기와 함께 유희하는 신학교는 성직자를 어떤 전문가 집단으로 만들어 버릴 우려가 있으며, 이는 교회 신자들의 성장을 중단시키고, 성직자의 소명이라 할 봉사자의 명분에도 모순된다…
내가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하는가? 무엇보다도 신학교는 그리스도의 교회를 위한 것으로 재정립되어야 한다.
“The University and the Seminary,” A Keeper of the Word: Selected Writings of William Stringfellow (1994)
March 24th, 2009 at 6:36 pm
신부님, 많이 공감하고 갑니다.
비단 신학과 교회의 일이겠습니까?
모든 인문, 종교가 대학과 우리의 교양 혹은 정신 사이에 싸움질만을 계속하는 것 같아 속상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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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ch 25th, 2009 at 6:43 am
범위로 생각한다면 신학교 역시 교회 안에 들어갈텐데 인용하신 글에서 나온 것처럼 “반성이 학문의 기초”라는 점을 교회에서 모르는 척 하는 건 아닐까, 생각합니다. 물론 양쪽 다 고쳐야 할점은 있으나, 그 동력을 제공하는 건 교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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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ch 25th, 2009 at 7:43 am
서울비 / 저는 서울비(선생님)의 신기학교 이야기를 보고 들으면서, 더 많은 공감과 감명을 받았습니다. 대안적 신학 교육에 대한 생각을 좀더 가깝게 느끼게 해주셨어요.
의명 /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교회가 동력이라는 지적에 동의합니다. 그러나 어떤 교회, 누구의 교회인가는 여전히 질문으로 남는다고 봅니다. 거기에 서로 관심갖는 척하면서 실은 서로 모른 체하는 속내평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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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ch 26th, 2009 at 6:09 am
http://blog.naver.com/seewitch/70026638802
Jason Upton의 Into the Sky란 곡입니다.
제가 가진 신학책들을 다 던지면 그 신학책들이 ‘하나라도’ 날 수 있을까요?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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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ch 26th, 2009 at 6:46 am
리브가 / 오랜만이에요. 멋진 노래 고맙습니다. 아이에게 대답하지 않고, 제 자신에게 대답했습니다. “아니, 책들은 하나도 날 수 없을 거야. 날아야 할 것은 우리지, 책들이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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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ch 31st, 2009 at 9:49 am
부끄러운 이야기이지만, 몸은 어른인데, 정신은 어린이 수준인 게 우리 한국교회의 현실이지요. 그래도 이미 70년전에 자신의 일기장에 한국인들이 예수와 바울의 복음에 대해 토론하는 그 날이 올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고 쓴, 그래서 성서조선이라는 훌륭한 기독교 잡지를 발행한 분이 있었으니, 언젠가는 한국 기독교인들이 칼 바르트, 폴 틸리히, 김교신등에 대해 토론하며, 성서비평을 통해 성서말씀의 뜻을 헤아리는 게 자연스러운 날이 올 것으로 생각합니다.
추신 : 제가 대중적 신학서적 전문 북디자이너가 되려고 하는 것도 다양한 분야의 신학(종교간의 대화, 성서학, 전례 등)들을 접하는 것만이 한국 기독교인들의 지적인 수준을 높일 수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싸구려 책만 찾는 한국기독교출판계의 현실을 무시한 것은 아니냐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복있는 사람,한국기독교연구소등의 소장파 출판사들을 보면 전혀 가능성이 없는 이야기는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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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ch 31st, 2009 at 11:01 am
김바우로 / 잘 지내셨나요? 바라는 것들이 이뤄지는데는 오랜 노력과 끈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도움이 못돼서 늘 미안하지만, 지치지 않기를 바랍니다. (다른 곳에 댄 댓글은 그리 적합하지 않아서 지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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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cember 1st, 2009 at 12:28 am
늦게서야 신부님의 격려글을 읽었습니다.바라는 것들이 이뤄지는데는 오랜 노력과 끈기가 필요하다는 말씀은 신부님의 인생경험에서 나온 말씀일 것이기에 항상 마음에 담아두겠습니다. 올려주신 글은 제 블로그에 발췌하되, 코멘트를 달아서 써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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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bruary 15th, 2012 at 6:37 pm
‘신학교’를 ‘나’ 또는 ‘신학생’으로 고쳐 읽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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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 joo Reply:
February 16th, 2012 at 1:53 pm
그렇게 읽으니, 훨씬 깊이 찌르는군요. 좋은 독법 제안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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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ril 22nd, 2013 at 4:37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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