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의 언어로, 어떤 믿음으로 – 교회에 대한 잡감

0. 올해 성령 강림 주일의 성서 본문은 이랬다. 사도 2:1-21, 에제 37:1-14, 요한 15:26-27, 16:4-15

1.
성령 강림 사건 (오순절)의 핵심은 “혀 같이 생긴 불길”이 사람들 위에 내렸다는 것이고, 그 사람들이 저마다 한번도 해본 적이 없는 다른 지방 말을 했다는 것이다. 이 다중 언어 사건은 극단적 종교 체험의 비언어적인 표출이 아니라, 소통이 가능한 지역 언어의 구사였다고 성서는 증언하고 있다. 실상 이 ‘방언’ 기적의 핵심은, 목소리 없는 무지렁이들이 제 목소리를 얻었다는데 있다. 그 목소리로 죽임을 당하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증언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무지렁이들이 증언과 선교의 주체가 되었다. 성령의 불 같은 형상은 기존의 세상을 불태우는 상상력에 닿아 있다. 그러니 오순절 사건은 전복에 대한 증언이다. 한참 어린 것들인 “아들 딸들은 예언을 하고, 젋은이들은 계시의 영상을 보며, 늙은이들은 꿈을 꾸는 것”이다.

2.
예언자 에제키엘은 광야에 흩어져 있던 “마른 뼈들”에게 숨결이 돌아 살이 붙어 살아나게 되었다고 선포한다. 이 마른 뼈들의 주인들은 적어도 고관 대작은 아닐 것이다. 전쟁에 끌려 나가 개죽음을 당했거나, 떠돌이로 살다 굶어 죽은 이들, 그도 아니면 어떤 집단 학살의 결과였을 것이다. 하느님의 숨결이 먼저 닿은 것은 수습하지도 못해 방치되었던 이름없는 이들의 뼈들이었다.

3.
성령 강림일에 읽는 복음 말씀은 굳이 해설이 필요하지 않다. 삶을 향해 난 창으로 그 너머를 응시할 때 깨닫는 말씀이다.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는 더 유익하다. 내가 떠나가지 않으면 그 협조자가 너희에게 오시지 않을 것이다…

그분이 오시면 죄와 정의와 심판에 관한 세상의 그릇된 생각을 꾸짖어 바로잡아 주실 것이다…

이 세상의 권력자가 이미 심판을 받았다는 사실로써 정말 심판을 받을 자가 누구인지를 보여 주실 것이다…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너희를 이끌어 진리를 온전히 깨닫게 하여 주실 것이다.

4.
교회는 이런 성령 강림일에 어떤 말들을 전하고 들었는가? 우리 사회의 많은 교회들은 이미 우파 이념에 눈이 멀고 귀가 먹었다. 수구적 이념에 대한 증거 구절(proof-text)로만 성서를 보는 이들이 교회를 지배한다. 그러면서 자신들의 축자주의(문자 하나 하나를 그대로 따르는 방식)를 옹호한다. 엄밀히 말해 축자주의는 세상에 없다. 늘 선택적 축자주의만 있을 뿐이다. 이처럼 제멋대로 선택한 증거 구절로 만들어내는 교리 체계나 교회의 가르침은 실상 “그리스도교”라고 할 수 없다. 그리 주장하더라도, 적어도 그들이 믿는 성서와 내가 읽는 성서는 전혀 다르고, 당연히 그들이 믿는 신과 내가 믿는 하느님은 전혀 다르다. 믿는 대상이 다르니 같은 종교에 속해 있다고 할 수 없다. 쉽게 말해서 2mb을 호위하고 있는 이들은 내게 그저 타종교인이다. (타종교를 폄하하는 말로 쓴 것이 아니라 실제로 다른 종교라는 뜻이다.) 그러니 같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개탄할 필요가 전혀 없는 사안이라는 생각까지 미친다.

5.
그러나 현실은 다시 언어의 지배력이다. 그 권력의 방식은 미디어에 대한 지배이다. 그동안 교회가 벌이는 이데올로기 재생산 구조와 그 효용을 너무 과소평가했다. 아니, 알뛰세를 몰라서 이 문제를 인정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교회 안에서 그런 구조에 저항해야 한다고 했지만, 대패했다는 게 맞는 말일 것이다. 이른바 욕망 교회의 분신들인 대형 교회나 그 이데올로기가 교회의 모든 미디어를 잠식해 버렸다. 신학교, 언론, 출판사, 연구소, 혹은 다른 교육 기관을 보아도 이겨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 큰 이유 가운데 하나는 이들의 엄청난 자본 권력이다.

6.
이러한 처지에 이들과의 싸움은 여러모로 승산이 없어 보인다. 그러고 보면, 냉철하게 객관적으로 판단하여 이끌어야 가야 한다는 주장도 어떤 의지에 기대지 않으면 힘을 잃을 것이다. 정의로운 것에 대한 믿음이 더욱 힘겨운 몸부림을 견디게 하리라. 그 몸부림을 좀더 풍요롭게 하려면, 세상을 불태우는 상상력 안에서 무지렁이의 목소리가 좀더 구체적으로 모아져 들려지고, 거기에 들어있는 슬픔과 기쁨의 다양한 삶의 결을 향유해야 할 것이다. 오늘 우리는 누구의 언어가 어떻게 들리도록 하는가?

7.
공교롭게도, 세상 떠난 이의 글을 이런 생각 끝에 접하게 되었다. 우리 사회의 변화를 위해서도, 우리 교회의 변화를 위해서도 가장 시급한 일이다.

민주주의든 진보든 국민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만큼만 가는 것 같습니다. 시민운동도, 촛불도, 정권도, 이 한계를 넘어설 수는 없는 것 같습니다. 80년대 반독재 투쟁이 성공한 것은 국민이 생각하는 만큼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결국 세상을 바꾸자면 국민의 생각을 바꾸어야 합니다.

국민의 생각을 바꾸는 데는 미디어가 중요합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영향력 있는 미디어는 돈의 지배를 받습니다. 돈이 없는 쪽은 돈이 들지 않거나 적게 드는 매체에 의존할 수밖에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인터넷에 새로운 기대를 걸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터넷에 들어가 보면 정보는 넘쳐나지만, 내용이 부실합니다. 분노와 증오는 넘쳐나지만, 사실과 논리는 부족하고, 깊이도 모자라고, 비슷한 생각끼리도 서로 앞뒤가 맞지 않고 충돌합니다. 이렇게 해서는 사람들의 생각을 움직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협업으로 역량을 확대하고, 토론과 검증을 통하여 완성도를 높여보자는 것입니다.

미디어이든, 인터넷이든, 연구소든, 출판이든, 어디를 보아도 우리가 열세입니다. 그냥 열세가 아니라 형편없는 열세입니다. 이런 열세를 딛고 세상을 바꾼다는 것은 역사의 진운이 함께할 때에만 가능할 것입니다.

우리는 역사가 돈의 편이 아니라 사람의 편으로 가고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이 길을 가는 것입니다. 다만, 그 막강한 돈의 지배력을 이기기 위해서는 우리가 가진 모든 힘을 다 짜내고 이를 지혜롭게 조직해야 할 것입니다.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_print.asp?article_num=20090527140200

7 Responses to “누구의 언어로, 어떤 믿음으로 – 교회에 대한 잡감”

  1. 임종호 Says:

    지난 번 부제성직고시 면접에 관하여 대화하다가 성직자에게 가장 중요한 덕목이 무엇일까를 물었습니다. 여러가지 답이 있지만 저는 역시 “분별(식별)력”이라고 생각합니다.

    분별력은 단순히 어떤 정보수집 파악 능력이기 이전에 사태를 대하는 태도에서 시작하는 것 같습니다. 그 사태가 남의 일처럼 여겨져서는 안되는 것이지요. 객관성을 위해서 이해관계를 포기해야 하는 것처럼, 그럴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착각인 것 같습니다.

    신앙적인 분별력은 평면적인 차원에서 이해관계를 편드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 이해관계를 무시하는 것도 아니겠지요.사태에서 드러나는 이해관계를 예민하게 파악하고 가슴아파 하지만 그 편드는 일은 입체적인 차원에서 행하는 일이 아닐까 합니다.

    예수의 성육신과 십자가와 부활과 승천의 이야기에서 그 역동적인 움직임을 깨닫습니다. 예수의 성육신은 가난하고 무지하고 병들고 억울한 이들 가운데서 그들을 편드는 삶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편듦은 어떤 이들이 “예수가 내 편이다”라고 주장될 수 있는 그런 성격은 아닌 것이지요. “하늘”에서 보는 “땅”의 문제, 하느님의 시각에서 보는 인간들의 문제, 하늘의 질서에서 보는 세상의 질서라는 가치체계가 편듦의 내용이 되어야 하는 것이겠지요. “복되다, 가난한 이들! 하늘나라가 그의 것이니!” 그 가난은 단순한 빈곤 자체가 아니라 하늘의 질서를 구하는 땅의 사람들의 현실입니다.

    “모든 일이 정치이나 정치가 모든 것은 아니라”는 경구를 기억합니다.
    신앙인으로서 저는 이 땅의 정치가 평면적인 이해관계의 조정이 아니라, 입체적인 정의실현의 도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오랜동안 저역시 정치인을 허접한 인간들로 냉소적으로 경멸하며 현실적으로는 그들의 결정에 수동적으로 삶의 현실을 내맡기는 멍청한 이중성으로 살아왔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그의 삶과 죽음으로 저야말로 얼마나 허접한 종교인인가를 깨닫게 해주었습니다.
    대한민국의 최고권력자였던 그가 딴나라에서 온 것 같은 외계인 정치인이 아니라
    나처럼 소박하게 진지하게 합리적으로 고민하되 현실의 벽 앞에서 여전히 여리고 무능한 인물이었기에 저는 진정한 존경과 사랑을 그에게 돌리게 됩니다.
    정치에 신앙의 차원이 더해지기를 바라는 제게
    그는 가장 진정한 신앙인으로 생각되는 것입니다.

    이 땅의 종교의 수준이 얼마나 천박한 것인지를
    “노무현”의 삶과 죽음을 통해 알게됩니다.
    그의 안타까운 생애에 실은 교회가 적지않은 책임이 있을 터인데
    이제 고작 “자살 운운”하는 수준은 대체 뭔지…

    한 사람의 신앙인으로서 저는
    노무현 대통령의 삶과 죽음이 갖는 신앙적인 의미를
    깊이깊이 살려내고 오래오래 전해가고 싶습니다.
    그의 경험처럼 한 사람 한사람의 생각을 바꾸는 일에
    진지한 사랑으로 헌신하고 싶습니다.
    물론 주신부님과 함께요….

    [Reply]

    fr. joo Reply:

    임종호 / 신부님의 말씀 속에서 “식별”의 근거를 되새깁니다. 그것은 “편드시는 하느님”(하느님의 당파성), 좀더 자세히는 “가난한 사람을 향한 우선적인 선택”입니다. 신부님 말마따나 이 “식별”은 어떤 객관적 분석에 기반하지 않고, 예수의 깊은 “측은지심”(compassion)에 자리합니다. 교회의 ‘자살 운운’하는 것들은 정죄의 기준으로 삼았던 교리에 기반한 것이지, 측은지심에 뿌리하지 않은 독하고도 천박한 언설이라는 걸 보여줍니다.

    신부님께서 종종 ‘이심전심’을 말씀하셨는데, 아직 ‘염화미소’로 응대하지 못해 미안하고 부끄럽습니다.

    [Reply]

  2. via media » 식별의 공간 - 어느 벗에게 Says:

    […] 격려하는 임종호 신부님께서 “식별(분별)력”이 얼마나 중요한 지 댓글에서 되새겨 주셨다. 달포 전에 어느 분과 편지를 나누는 가운데 이 식별에 […]

  3. via media » “맑은 감염”을 퍼뜨리는 일 Says:

    […] 기대어: 제 블로그와 성직자 카페에도 인용해 올렸지만, 죽은 이에게는 또 다른 유언이 있었습니다.  행동 전략에 관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미디어에 […]

  4. 김바우로 Says:

    숭실대 김회권 교수도 청년설교(복있는 사람)에서 에제키엘 이야기를 가리켜 절망의 시대에 사는 현대인들에 대한 복음이라고 했었습니다. 마른뼈같은 우리네 삶에 성령께서 주시는 생명이 가득하기를…
    추신:일부 글을 제 블로그에 인용하겠습니다. 인용하려는 부분은 다음과 같습니다.
    3.
    성령 강림일에 읽는 복음 말씀은 굳이 해설이 필요하지 않다. 삶을 향해 난 창으로 그 너머를 응시할 때 깨닫는 말씀이다.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는 더 유익하다. 내가 떠나가지 않으면 그 협조자가 너희에게 오시지 않을 것이다…

    그분이 오시면 죄와 정의와 심판에 관한 세상의 그릇된 생각을 꾸짖어 바로잡아 주실 것이다…

    이 세상의 권력자가 이미 심판을 받았다는 사실로써 정말 심판을 받을 자가 누구인지를 보여 주실 것이다…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너희를 이끌어 진리를 온전히 깨닫게 하여 주실 것이다.

    4.
    교회는 이런 성령 강림일에 어떤 말들을 전하고 들었는가? 우리 사회의 많은 교회들은 이미 우파 이념에 눈이 멀고 귀가 먹었다. 수구적 이념에 대한 증거 구절(proof-text)로만 성서를 보는 이들이 교회를 지배한다. 그러면서 자신들의 축자주의(문자 하나 하나를 그대로 따르는 방식)를 옹호한다. 엄밀히 말해 축자주의는 세상에 없다. 늘 선택적 축자주의만 있을 뿐이다. 이처럼 제멋대로 선택한 증거 구절로 만들어내는 교리 체계나 교회의 가르침은 실상 “그리스도교”라고 할 수 없다. 그리 주장하더라도, 적어도 그들이 믿는 성서와 내가 읽는 성서는 전혀 다르고, 당연히 그들이 믿는 신과 내가 믿는 하느님은 전혀 다르다. 믿는 대상이 다르니 같은 종교에 속해 있다고 할 수 없다. 쉽게 말해서 2mb을 호위하고 있는 이들은 내게 그저 타종교인이다. (타종교를 폄하하는 말로 쓴 것이 아니라 실제로 다른 종교라는 뜻이다.) 그러니 같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개탄할 필요가 전혀 없는 사안이라는 생각까지 미친다.

    5.
    그러나 현실은 다시 언어의 지배력이다. 그 권력의 방식은 미디어에 대한 지배이다. 그동안 교회가 벌이는 이데올로기 재생산 구조와 그 효용을 너무 과소평가했다. 아니, 알뛰세를 몰라서 이 문제를 인정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교회 안에서 그런 구조에 저항해야 한다고 했지만, 대패했다는 게 맞는 말일 것이다. 이른바 욕망 교회의 분신들인 대형 교회나 그 이데올로기가 교회의 모든 미디어를 잠식해 버렸다. 신학교, 언론, 출판사, 연구소, 혹은 다른 교육 기관을 보아도 이겨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 큰 이유 가운데 하나는 이들의 엄청난 자본 권력이다.

    [Reply]

  5. 민노씨 Says:

    성령 강림 사건 (오순절)의 핵심은 “혀 같이 생긴 불길”이 사람들 위에 내렸다는 것이고, 그 사람들이 저마다 한번도 해본 적이 없는 다른 지방 말을 했다는 것이다. 이 다중 언어 사건은 극단적 종교 체험의 비언어적인 표출이 아니라, 소통이 가능한 지역 언어의 구사였다고 성서는 증언하고 있다. 실상 이 ‘방언’ 기적의 핵심은, 목소리 없는 무지렁이들이 제 목소리를 얻었다는데 있다. 그 목소리로 죽임을 당하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증언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주낙현 신부)

    [Reply]

  6. 맑은 감염을 퍼뜨리는 일 | 홀리넷 Says:

    […] 기대어: 제 블로그와 성직자 카페에도 인용해 올렸지만, 죽은 이에게는 또 다른 유언이 있었습니다. 행동 전략에 관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미디어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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