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교회 밖에 있는 이들에게

느슨하게 약속한 글이 있었다. 블로깅에 대한 잡감을 적다가, 내 블로그를 찾는 이들 가운데 교회 밖에 있는, 다시 말해서 교회를 다니지 않는 이들에게 부탁할 말을 한번 써보겠다는 것이었다. 여기서 ‘교회 밖’이란 어떤 거창한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인이든지 아니든지 현재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을 편하게 아우르는 말이다. 그러니 하느님께서 마음에 두시는 더 큰 의미의 교회와는 차이가 있다.

‘교회 밖에 있는 이들을 향한 글’을 작정하고 쓰려다 보니, 여러 미묘한 생각이 겹쳐서 주저했다. 느슨하나마 약속을 했으니, 성의를 보여야겠다 했지만, 잘 안됐다. 실은 마음에 불필요한 욕심이 있었던 탓이었겠다. 그래서 생각을 바꾸고, 이런저런 넋두리나 적기로 했다. 그 틈에서 뭔가를 발라 읽어주면 고마운 일이겠다고. 그러니 오늘 올라가는 몇 개의 글은 이 즈음에서 읽을지 말지를 판단하면 좋겠다. 시간을 아끼시라.

블로그 독자들

내 블로그 독자가 어떤 분들인지 잘 모른다. 미안한 일이다. 댓글을 달지 않는 한 어떤 의견도 들을 수 없는 일방적인 이야기만 하는 셈이다. 댓글이나 종종 건네오는 이메일로 가늠하자니, 그리스도교 신앙인(성공회 신자와 다른 교단)도 조금 있고, 종교와 관계없는 이들도 있다. 어찌 보면 종교에 관심 있되 전혀 몸을 담지 않는 분들이 더 많은 것 같다는 인상이다. 이 짐작이 맞다면, 그런 독자에게는 미안함과 고마움이 겹친다. 내 블로그는 그 부제가 표명하듯이 어떤 특정한 신앙 전통의 ‘제도적'(혹은 공식적)인 성직자가 적는 지극히 좁은 시각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좀 더 시각을 넓히면 좋으련만, 내 그릇 크기가 그뿐이기에 하릴없다.

이 즈음에 성공회 신자들에게 불평은 좀 해야겠다. 게시판과 블로그를 운영한 지난 10여 년 동안 느꼈던바, 기존의 성공회 신자들은 공개적으로나 사적으로 대화하기를 꺼린다는 것이다. 묻기도 어려워하고, 자기 이름 내놓는 것도 주저하는 것 같다. 의문과 질문이 약하고, 대화와 토론이 부족하고, 격려와 공감에 인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야말로 성공회 전통에 반하는 일이 아닌가? 물론, 아닐 수도 있다. 한국의 성공회 신자들이 내 기대와는 달리, 혹은 다른 교단이 신자들과는 달리 부끄럼이 많은 탓일 수도 있다. 아니 이심전심/염화미소를 대화의 경지로 여기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래도 내 아쉬움은 사라지지 않는다. 대화로 확장되지 않는 한 생각과 마음이 커 나갈 수 없음을 나 자신이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어디에?

댓글이나 이메일로 오가는 피드백을 언급했으니, 잠시 덧붙인다. 내 블로그는 성공회 ‘전도 모드'(?!)를 애초부터 갖고 있다. 내 시각의 한계를 인정하는 것이고, 또 우리 사회에서 작은 교회로 존재하는 신앙 전통을 다른 방식으로 나누려는 시도이다. 이 과정에서 많은 이들과 대화를 나눴다. 7-8년 전 이메일로 일 년이 넘게 여성 사제직 문제로 상담하던 어느 천주교 수녀님은 마지막 피정을 간다는 말씀을 전하고는 소식을 끊었다. 어떤 이들은 오랜 상담과 인연을 맺은 끝에 성공회에 와서 성직자가 되기도 하고, 신자가 되기도 했다. 물론 몇 가지 신앙적인 교리적인 문제로 씨름하며, 혹은 그저 호기심에 나눈 대화와 상담도 있었다. 블로그 글 자체에 관심이 있는 이들은 대체로 ‘교회 불참형’ 신자들이나, 무종교인들이었다. 여전히 소식을 주고받는 이들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이들이 훨씬 많다. 내 블로그에 달린 댓글을 볼 때마다, 나는 그들을 떠올린다. 그리고 그들이 어디에 있든지 하느님의 크신 은총 아래서 살아가길 빈다.

‘전도 모드’? 그러나…

신앙생활을 다시 하려던 독자들 가운데는 내가 ‘선전’하는 ‘성공회 신앙 전통’에 혹하여 교회에 나갔다가 실망하여 편지한 이들도 있었다. 표현은 정중했지만, ‘네가 말하는 성공회 전통과 실제 교회는 너무나 다르더라. 당신에게 속은 것 같다’는 말로 요약할 수 있었다. 대꾸하기 어려웠다. 나도 그런 실망을 잘 아는 터에. 대신에 이런 경험을 들어 기회가 닿는 대로 동료 신부님들의 잘못을 탓하고 호통친 적도 있었다. 건방지기 짝이 없는 행동이었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동료 신부님들께 자극을 주기 위한 것이라며, 블로깅의 경험을 통해 교회 밖 사람들이 교회에 대해 갖는 비판과 기대, 그리고 희망을 나누기도 한다. 나는 이 일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여기까지 읽어주신 독자라면, 다음에 이어질 글을 읽어주시길 바란다. 고백하거니와 내 편견에 가득한 주장일 것이다. 그러나 수고롭게 허튼소리를 발라내어, 어눌한 이의 마음 한편을 읽어 주셨으면 좋겠다.

트위터 벗들에게 감사의 인사: 이런 이야기를 꼭 나눠야겠다고 결심하게 만든 @jonghwan 님, 이 문제로 트위터로 대화를 나눠주신 @gihong 님, @ntolose 님, @kojiwon 님, 그리고 ‘기대한다’는 트윗으로 압력을 행사하신 @00ooo 님께 감사드립니다. 이름에 누를 끼치지 않는지 죄송할 뿐입니다.

3 Responses to “0. 교회 밖에 있는 이들에게”

  1. via media 주낙현 신부의 성공회 이야기 » Blog Archive » “냉철한 열정” – 서구 주류 교회의 미래 Says:

    […] 던진다. 그 주장을 아래에 간단히 갈무리해보겠거니와, 며칠 전에 적었던 ‘교회 밖에 있는 이들에게’ 연속글과도 닿는 생각이라 […]

  2. Lee Gahnghee Says:

    Hello. Rev. Joo(is it correct?),
    I have read your column with hope and pleasure.
    I live in Philadelphia. I have a very strong interest in the trinity episcopal church. I tried but failed to find a Korean church here in Philadelphia.
    Can you help me find it around here. I am sorry, I have no Korean key board in my computer.
    Thank you.

    [Reply]

  3. Jaeyoung Choi Says:

    좋은 생각 나눠주심에 감사합니다. 신부님께서 올리신 글을 읽다가 든 생각이 있어 몇 자 적어봅니다. 신부님께서도 잘 알고 있으시겠지만, 제 생각에는 중요한 것은 신앙인의 정체성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제가 적는 글이 약간 루터적인(?) 사고일 수 있겠지만 그리스도인의 근저에 있어야 하는 것, 그리스도인이 머물러야하는 것은 '하느님'과 '나'의 교회라는 생각입니다. 이러한 개개인의 '정체성'이 올바로 서지 않는 이상, '교회'라는 일반적인 경계 혹은 범주로 논의하는 것은 공염불(?)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정체성은 단지 '윤리적으로 죄를 짓지 않는, 종교적으로 훌륭한 삶은 영위하는' 것과는 거리가 멉니다. 현실적인 자신의 행동이 '기존 (교회)의 가르침'에 어긋나고 어긋나지 않고가 아니라 하느님과 관계에 있어서 '나'의 정체성을 말합니다.

    잠시 심리학의 도움을 빌리자면, 사람은 자신이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서 세상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전이 (transference)' 를 통해서 다른 사람들이 다른 사물이 어떻다라고 판단하고 평가한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실제 사물이 어떤지 실제 사람이 어떤지에 대한 '관심'보다는 자신이 지금껏 느끼고 자라왔던 '방식'대로 이해하고 세상을 받아들이며 세상에 대해서 어떤 '감정'을 전이한다는 것이지요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그것이 '옳다'라고 생각한다고 저는 봅니다 (이는 지극히 개인적인 저의 생각입니다).

    일례로, 저는 '천주교 정의구현 사제단'의 얘기를 하고 싶네요. 물론 그 분들이 70-80년대 민주화 운동을 위해서 많은 부분 힘쓰셨다는 것에는 동의합니다. 그리고 그로 인해서 많은 사람들이 '천주교'에 입교하였고, 그리고 여전히 사제단의 영향력은 어마어마합니다 (좋게 생각하든지 나쁘게 생각하든지 말입니다). 그렇지만 '세상의 정의'를 위해 힘쓰시던 분들의 동시대의 '내부'의 문화를 보자면 유신독재를 하던 공권력(군대)의 문화와 하등 다를바가 없었습니다. 후배가 함부로 나선다느니, 줄빳다를 맞아야 한다느니 하는 '군대'의 문화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죠. (저는 그것이 그분들 탓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단지 '문화'가 가진 강력한 힘앞에서 어느누구도 자신이 '정의롭다'라고 말하기 어렵다는 것을 그저 말하고 싶을 뿐입니다.)

    그래서 문제의 본질은 항상 '밖'에 있지 않고 '안'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씀드리자면, 내가 판단하고 평가하는 '올바른 교회상'은 진정으로 내 '안'에서 실현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많아질 때 비로소 밖의(세상의) 교회가 올바로 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개개인의 신앙의 정체성이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봅니다.

    [Rep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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