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눔에 관한 상념 2: 나의 ‘투정’

아마 1998년이었을 것이다. 한국 성공회의 유일한 매체인 [성공회 신문]에 ‘세계 성공회 소식’이라는 난을 만들어 글을 내보냈다. 이후 6년간 그렇게 했다. 두 가지 목적이 있었다. 첫째, 한국에서 너무도 작은 ‘성공회’라는 교단에 대한 열등감을 세계적으로는 개신교 최대의 교단인 ‘세계 성공회’를 통해서 조금이나마 넘어 보자는 것이었다. 어린 마음의 치기이기도 했으나, 작은 이들은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것이다. 둘째는 훨씬 내부적인 이유였다. 우리 교회의 행태를 세계 성공회의 다양한 경험을 통해서 비춰보고 돌아봐야 할 것 같았다. 우리와는 서로 다른 경험과 도전, 실패와 성공, 슬픔과 기쁨을 나눠서 배워야 하리라 생각했다.

6년 후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일을 그만두었다(그 ‘말’과 ‘탈’은 적지 않겠다). 의지력이 고갈되기도 했으며, 이 또한 나 혼자 독점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다른 시도는 그리 잘 이어지지 않았다. 그 난이 없어졌지만, 사람들에게는 별로 서운한 내색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솔직히 서운했다. 이후에도 가끔 세계 성공회 관련 소식을 보내거나 올리기도 했지만, 중요한 사안이라고 보는데 전혀 소개되지 않는 것 같아서 내 풀에 견디지 못해 던졌던 호외성 기사이거나 기고였다.

그동안 내 관심은 다른 프로젝트 로 이어졌다. 질문 게시판에, 블로그에, 포럼에, 위키까지 뻗쳤다. 어떤 성과가 있었는지 알 수 없다. 블로그를 빼놓고는 피드백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피드백이 없으니 내 잘잘못을 평가할 눈도 가질 수 없었다. 다시 메일링리스트에 트위터까지 해봤다. 마찬가지 느낌이다. 흥미로운 일은, 그 적은 피드백마저도 우리 교회 외부에서 더 많이 나왔다는 것이다. 새로운 것을 느끼게 한다.

그 와중에 몇 가지 사건도 있었다. 그 때문에 생긴 상념 몇 가닥은 이미 이 블로그 여기저기에 적어 두었다. 그 사건 속에서 발견한 것 하나는, 숨죽인 독자들이 많다는 것이었다. 교회 안팎으로 떠돌며 고민하는 이들이 많았다. 그러나 그 숨죽임이 편만하여, 침묵으로 자리 잡는 모습도 보였다. ‘조금 기다려 보자’라는 유보의 의식이, 나중에는 또 다른 억압의 논리가 되는 일을 여기저기서 봤기에 걱정스럽기도 하다.

선별하여 집어치우든, 새로운 일에 손을 대든, 어떤 식으로든 계속해보려 한다. 그 어떤 형태의 지배하는 권력, 억압하는 권력에도 저항하겠노라고 다짐한 처지이니, 그 사적인 다짐에 책임을 져보려는 것이다.

이 책임의식은 내 현실을 돌아보면 매우 모순된 것이다. 공부하는 처지에서, 그것도 외국에서 보고 배우는 처지는 나를 지식과 정보의 권력으로 자리매김한다. 성직자인 것도 어떤 신자들에게는 권력이다. 나보다 어린 성직자나 신자들에게 나는 여전히 권력이다. 반면, 누군가에게 나는 여전히 철없는 사람이요, 경험 없는 이요, 아직 나이 어린 ‘것’이다. 성직의 위계에서 여전히 밑에 있는 이요, 생계 능력이 거의 없어서 아내의 등을 쳐 먹다 못해 골을 빼먹고 기생하는 사람이다. 누구에게는 있어 보이는 선생이지만, 여전히 가난하고 덜 떨어진 학생이다.

그러나 이 겹치는 모순을 인정하는 일은 내게 축복이기도 하다. 내가 지배할 수 있는 권력자이기도 하고, 또 다른 여러 형태의 권력 아래 있는 ‘신민’이기도 하다는 것을 직시하는 일. 그 순간 나는 아직 선로를 까는 노동자의 위치에 있다는 소명을 내 의식에 강제하고, 나 자신을 이끌려 한다. 그리고 그 강제의 실질적인 방법은 내 권력을 보장해 줄 어떤 것들을 어떤 형태로든 나누는 일이다. 지금으로서는, 억압하는 권력이 되지 않은 유일한 길이요, 궁극의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발뺌: 이마저 ‘인정해달라는 투정’으로 핀잔받을 수도 있겠다. (어디서는 비꼬는 말로 “인정 투쟁”이라는 거창한 말을 쓰던데, 인정해달라는 게 ‘투쟁’까지야 되겠는가?) 무엇을 요구하는 것은 아니지만, 투정은 맞다. 그리고 이런 투정 좀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도통하도록 으젓한 사람이 아닌 탓이니, 그리 봐 주시면 좋겠다.

5 Responses to “나눔에 관한 상념 2: 나의 ‘투정’”

  1. 아거 Says:

    깔고 계시는 선로가 하루 빨리 이어졌으면 좋겠습니다.
    매일 기도를 해드리지는 않지만 눈뜨면 주신부님의 온라인행적을 열고 말없는 문안인사 드리는 신도들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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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r. joo Reply:

    아거 / 기도와 격려에 감사드립니다. 일이 마음 먹은 대로 잘 안 되네요. 아거님의 기도와 ‘말없는 신도’의 문안에서 큰 힘을 얻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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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거 Reply:

    내부의 변혁이 그래서 가장 어려운게 아니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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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Textperia Says:

    성공회에 대해서는 시청 근처의 건물에 대한 지식정도 밖에 없다가 주신부님의 글을 읽고 관심을 가지게된 사람입니다. 블로그에 첫 리플을 남기게 되는군요.;

    문외한인 제가 보기에도 대체로 보수적인 종교 조직에서 변화를 꾀하는 것만으로도 쉽지 않은 길을 택하신 것 같습니다. 이전까지 성공회에선 이런 시도도 하는구나.라고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혼자서 열심히 노력하시는 것이었군요.

    부디 노력하시는 바를 풍성한 결과로 돌려받으시길 기원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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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r. joo Reply:

    반갑습니다. 제 블로그로 성공회에 관심을 두게 되었다니, 이런 일이 쓸모 있는 모양입니다. 😉

    어느 종교나 단체든, 한 사회에 속한 처지이니 그 사회만큼의 보수와 진보를 반영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종교만 보수적이랄 것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변화를 꾀하는 일은 늘 어려운 일이요, 신앙생활 자체도 어려운 일이니, 제 선택과 길이 딱히 남들 처지보다 어렵다고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희 교회에는 저보다 훌륭한 분들이 더 훌륭한 일들을 이미 많이 펼치고 있습니다. 혹시라도 제 글에서 저 혼자서만 분투하고 있다고 느끼셨다면, 제가 큰 잘못을 저지른 것입니다. 다시 살피겠습니다. 다만, 제가 할 수 있고, 필요한 일이라 생각하는 영역에서 아직 사람의 동의를 얻지 못해서 외로운 처지를 ‘투정’한 것이니, 그리 헤아려 주시기 바랍니다.

    격려에 감사드리고요. 트위터에서도 자주 뵙죠. 평화의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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