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가 이빨을 드러낼 때, R.S. 토마스를 읽다

어지러운 마음을 다스려야 할 때 R. S. 토마스(1913-2000)를 찾는다.

세를 부리는 힘들이 사람을 곤고하게 하여, 때로 그에 대한 분노에 자신을 놓아 버리려 할 때. 모두 상처입은 짐승들인 처지에, 그 이빨을 드러낼 때. 아울러 상처입은 사제직의 본연과 긴장을 놓치려 할 때. 질시가 오해를 일으켜 주위에 퍼지고, 모욕과 배신감에 다다를 때. 그리하여 미움과 두려움이 영혼을 먹어치우려 할 때. 그리하여 이때다, 하고 악마가 속삭일 때.

아니, 그저 이름 없는 “시골 성직자”인 벗들이 그리울 때.

굳게 닫힌 방을 뚫고 들어오시어 “그대에게 평화가 있기를” 하며 인사를 건네시는 부활하신 예수의 음성처럼, R.S. 토마스를 읽는다.


무릎을 꿇고

지극히 고요한 순간들
돌로 지은 교회의 나무
제대 앞에 무릎을 꿇고
여름날, 하느님을 기다리니
계단 위의 바람이 말을 하고
햇빛은 정적 속에서
나를 감싸느니, 내가 마치
위대한 주역을 연기한 것처럼. 그리고 청중,
빽빽이 모여든 그 영혼들은 가만히
기다리나니, 나처럼,
그 말씀을.
제게 일러주소서, 하느님
그러나 아직은 마소서. 제가 말할 때,
그 말 속에서 비록 당신이 말씀하시는 것이나
저를 통하면, 잃어버리는 것이 있으니,
그 뜻을 기다립니다.

R. S. Thomas, “Kneeling”


부활

부활절. 겨울이 드리운 무덤의 옷은
아직 여기에 여전하나, 주님의 무덤은
비었네. 하늘의 사자는
무덤에서 우리에게 말하네
우리에게서 그 돌이 어떻게 굴러가 버렸는지
나무 하나가 그 꽃망울로
어둠에 빛을 밝히느니.
길을 걷는 나그네가 있네
헐벗은 나무에서
들려오는 음악을 들었네. 그리고 한 아이가
그 일이 어떻게 일어났는지 일러주니
작년의 사건, 기계는
기름이 없어 옆으로 멈춰 섰으나
그 위에 지금 꽃은 만발하고.

R. S. Thomas, “Resurrection” (미출간)


그 환한 밭

나는 보았네. 햇살이 뚫고 들어와
작은 밭을 비추는 모습을
한동안, 내 길을 가다가
잊고 말았지. 그러나 그것은 진주였네
값비싼, 그 밭은
그 안에 보물을 품었었네. 이제야 깨닫네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다 줘서라도
그것을 가져야 한다고. 인생은

멀어지는 미래를 향해 서둘지도 않고,
지어낸 과거를 그리워하지도 않는 것. 인생은
모세가 불타는 떨기나무 기적에 몸을 돌렸듯
그대 청춘처럼 한때 지나가는 듯한
어떤 환한 빛에 몸을 돌리는 일
그 빛이 그대를 기다리는 영원이리니.

R. S. Thomas, “The Bright Field”

(번역: 주낙현 신부)

3 Responses to “상처가 이빨을 드러낼 때, R.S. 토마스를 읽다”

  1. 아거 Says:

    무릎을 꿇고는 읽으면서 콧노래로 작곡을 해봤습니다만.. 제가 음을 다스리는 사람인데다가, 악보를 그릴 줄 몰라서.. 쿨럭..

    [Reply]

    fr. joo Reply:

    아거 / 아거님의 콧노래를 들었으면, 참 좋았을텐데요. 저는 음을 너무 심하하게 다스리다보니, 음이 저를 싫어서 도망 다녀요. 😉

    [Reply]

  2. 경계를 걷는 그리스도인 Says:

    […] 성공회 사제이자 20세기 위대한 시인인 R. S. 토마스의 “환한 빛”이라는 시도 함께 읽었습니다. 천국은 밭에 숨겨진 보화같다는 것, 그 밭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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